28. 씻겨줄까?
(28/111)
28. 씻겨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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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씻겨줄까?
2022.11.06.
“어흥~ 어흥!”
“……우주야?”
빗방울을 털어내며 우산을 접던 설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난데없이 튀어나온 아기 호랑이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채하가 여유로운 모습으로 서 있었다.
“잘 다녀왔어?”
“네. 기사님께서 편하게 잘 데려다주셨어요.”
“운전이 아주 노련한 사람이야. 언제든 당신 필요할 때마다 편하게 써.”
“……고마워요. 그런데 지금 이게……?”
“어흥! 엄마 어흥!”
우주가 호랑이 발톱을 세우며 설원에게 대롱대롱 매달리자, 채하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오늘 숲으로 소풍 간 김에 귀여운 호랑이를 한 마리 주워 왔지.”
“아…….”
“어때? 귀엽지 않아? 정말 누구 아들인지.”
“어흥! 엄마. 우주 귀여워요?”
귀여웠다. 확실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깜찍하고 귀엽긴 한데…….
“얼굴이 왜 이렇게 시커멓죠?”
그랬다. 얼굴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검댕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고, 덕분에 정글의 왕으로서의 위엄이 조금 줄어든 감이 있었다.
그녀의 의문에 우주가 호랑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목청 높여 답했다.
“우주 흑호랑이예요! 대왕 아빠가 흑호랑이가 멋있는 거랬어요! 엄마 보여주려고 호랑이 옷 안 벗고 기다린 거예요~.”
“대왕…… 아빠?”
“응~ 이제 대왕 아저씨 아니고 대왕 아빠예요!”
“아아…….”
말하자면 승진한 셈인가.
점점 변형되는 호칭에 설원조차 채하의 정체성이 헷갈릴 지경이었다.
자신의 늠름한 모습을 엄마에게 보인 게 흐뭇했는지, 우주는 연신 방긋거리고 있었다.
그런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설원은 지금 당장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그때, 같은 생각을 한 건지 채하가 선수를 쳤다.
그가 성큼 모자를 향해 다가오더니 진지하게 제안했다.
“씻겨줄까?”
“됐어요. 우주는 제가 씻겨줘야 해요.”
설원이 우주의 호랑이 옷을 벗기려고 손을 뻗었다.
한데 그녀의 손목을 채하가 먼저 붙들고는 기함할 소리를 꺼냈다.
“아니, 우주 말고 당신.”
“……네?”
“오늘 비 많이 맞았잖아.”
“…….”
이쯤 되니 설원은 그냥 연극을 그만두고 속 시원하게 묻고 싶은 충동이 들 지경이었다.
대체 나한테 왜 그러냐고.
다정하게 아내의 발을 씻겨주고, 아이와 온종일 놀아주고.
권채하 씨 그런 사람 아니지 않냐고.
하지만 역시 그럴 수 없었기에 설원은 슬며시 옆에서 방긋거리는 우주의 눈치를 살폈다.
어른들의 세상을 아직 다섯 살인 우주는 모르겠지, 속으로 안도하며.
그러나 설원은 이내 이 순수하고 해맑은 아기 호랑이에게 뒤통수를 맞게 되었다.
우주가 양손에 채하와 제 손을 하나씩 쥐고 욕실로 끌고 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좋아요! 엄마도 우주랑 같이 목욕해요!”
“우, 우주야. 잠깐만.”
“엄마랑~ 대왕 아빠랑~ 우주랑~ 같이 엄청 엄청 큰 욕조에 들어갈래요!”
“우리 꼬마가 역시 뭘 좀 아는군.”
말리지는 못할망정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는 채하를 보며 설원은 기가 찼다.
같이 씻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우주야. 그러지 말고 엄마한테 와. 엄마가 씻겨줄…….”
설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우주가 채하의 손을 두 손으로 덥석 잡았다.
그러더니 청천벽력 같은 통보를 해 왔다.
“아니. 우주 오늘은 대왕 아빠랑 씻을래요!”
“…….”
채하의 표정은 이제 만족을 넘어 오만방자에 이르고 있었다.
입도 열지 않았는데도 ‘어때?’라는 거만한 말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꼬마 뜻이 이렇다니 이 아기 호랑이는 내가 씻기도록 하지.”
“엄마! 우주 목욕하고 올게요~.”
“그래. 우주야…….”
제 품을 떠나는 아들을 보는 설원의 눈이 시무룩하게 처지자, 채하가 위로라도 건네는 듯 상냥하게 덧붙였다.
“원하면 언제든 들어와도 좋아.”
“응! 엄마도 우주랑 대왕 아빠랑 목욕하러 와요~.”
“물론 들어올 때는 목욕에 걸맞은 차림을 하는 거, 잊지 말고.”
“안 들어가요.”
“그래? 아쉽군. 아주 화기애애한 장면을 연출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지.”
서로 다른 목적을 품고 있는 부자의 말에, 설원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곧 둘은 손을 꼭 잡고서 사이좋게 욕실로 향했다.
말 그대로 화기애애한 그 모습을 보며 설원은 대체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꼭 알아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꺄르르~.”
“꼬마, 재밌어?”
“네! 저절로 헤엄을 쳐요! 엄청 엄청 신기해요~.”
우주의 웃음소리와 첨벙첨벙 물 튀기는 소리 사이로, 채하의 나지막한 웃음이 함께 새어 나왔다.
설원은 욕실 문에 귀를 댄 채 숨죽이고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듣자 하니 둘은 욕조 안에 작은 물고기 장난감을 띄워놓고 놀고 있는 모양이었다.
생각보다는 잘하고 있는 것 같아 왠지 기분이 묘해졌다.
아빠라고 밝히지는 않았지만, 채하는 지금 명실공히 아빠의 역할을 하고 있지 않은가.
우주는 혼자 도망치듯 숨어서 힘겹게 낳은 아이였다.
그런 아이에게 아빠의 부재만큼 제가 혼자서도 부모의 역할을 잘 해낼 거라고 다짐했었다.
많은 부를 줄 수는 없어도, 사랑만큼은 부족하지 않게 해주겠다고.
그 다짐대로 우주는 엄마와 섬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티 없이 맑게 자라났다.
지금 이대로도 나쁘지 않다고, 충분하다고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우주가 채하 씨를 저렇게 따를 줄은 몰랐네.’
어쩐지 이상한 감정이었다.
‘우주의 아빠’로서 채하를 바라보니, 그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영역은 분명 설원의 것과는 다르다는 게 실감 났다.
그 점이 조금은 미안하고, 조금은 허하기도 해 설원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예고도 없이 욕실 문이 열리곤 두 사람이 튀어나왔다.
“엄마~!”
“엄마야!”
두 모자가 동시에 엄마를 찾는 것을 보며, 채하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곧 그가 다가와 설원의 눈을 가린 손가락을 천천히 떼어냈다.
본능적으로 문이 열리자마자 올라간 손이었다.
“걱정하지 마. 난 옷 입고 있으니까.”
“아…….”
그제야 설원이 끔벅거리며 눈을 떴다.
“봐. 안 벗고 있는 거 맞지?”
“…….”
입고 있다고는 하나, 막상 그녀가 눈 둘 곳이 애매한 상태였다.
대충 두른 샤워 가운 사이로 젖은 근육이 반들거리며 탄탄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거기에 이마로 내려온 머리카락에서 떨어지는 촉촉한 물방울은 그의 선명한 이목구비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야말로 한없이 치명적이고도 섹시한 자태였다.
눈을 다시 가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심하던 설원은 또다시 ‘순수한 어린이에게 집중하기’ 방법을 쓰기로 했다.
설원이 허리를 숙여 말간 우주의 얼굴을 응시했다.
“우리 우주, 깨끗이 씻었어?”
“응! 대왕 아빠가 세수도 시켜주고, 우주 머리도 감겨 줬어요~.”
“그랬구나.”
과연 뽀드득 잘 씻겼는지 얼굴의 검댕은 다 사라지고 발그레 혈색이 돌고 있었다.
머리카락도 아주 깨끗해 보이는 데다 향긋한 샴푸 냄새가 기분 좋게 코를 찔렀다.
우주가 계속해서 이 목욕 시간의 자랑을 이어갔다.
“응~ 그리고 또~ 물고기 장난감도 가지고 놀았어요!”
“우리 우주 좋았겠네.”
“응! 물고기가 아주 많았어요.”
동심 가득한 대화를 나누다 보니, 설원의 의식에서 방금 본 채하의 치명적인 모습이 서서히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그때 우주가 정말이지 벼락같은 말을 내뱉었다.
“있잖아요. 엄마~ 대왕 아빠한테는 엄청 엄청 큰 물고기가 달려있어요!”
“어? 엄청 엄청 큰 물고기……?”
“응! 물속에서 막 헤엄쳤어요! 우주 물고기는 아직 많이 작은데, 어른이 되면 커진대요!”
“그…… 그렇구나.”
설원이 찌릿 채하를 흘겨보았다. 애한테 대체 무슨 소리를 한 건지.
한데 채하는 반성의 기미라곤 전혀 없이 도리어 도발을 해 왔다.
“어떤 물고기인지 안 궁금해? 뭔지 알고 싶으면 오늘 밤 당신한테도 보여줄 수 있는데.”
“안 궁금해요. 알고 싶지도 않고요. 보고 싶지도 않아요.”
“흐음. 그거 아쉽군.”
타오르는 눈빛으로 채하가 설원을 지그시 응시했다.
위험 발언이 나올 것을 본능적으로 예감한 설원은 우주를 데리고 방으로 냉큼 후퇴하려 했다.
한데 그 도주 행각을 그가 빠르게 저지했다.
“안 돼. 꼬마는 나랑 약속했어.”
“약속이요……?”
“응! 엄마. 우주 오늘부터 혼자 자기로 했어요. 대왕 아빠가 그러는데, 불 끄면 천장에 우주 이름처럼 우주 쇼가 펼쳐질 거래요!”
“들었지? 당신은 이제 잘 곳이 없어졌어.”
채하가 여유만만한 말투로 선언하자, 설원은 괜스레 초조해졌다.
겨우 한나절 집을 비웠을 뿐인데 일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우주도 이제 다섯 살이었다.
혼자 자는 연습도 필요하다는 걸 느끼고는 있던지라, 설원은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옆 방에서 잘게요. 대충 이불만 깔면 돼요.”
“안 돼.”
“안 된다고요?”
“그래. 우주 방이랑 내 방 빼고는 다 인테리어를 손볼 생각이거든. 그러니까 당신이 다른 방을 쓰면 곤란해.”
“…….”
뻔히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을 이렇게 태연하게 하다니. 설원은 잠시 머뭇거렸다.
어차피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권채하는 저와 같은 방을 쓰려할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이렇게 도망만 치는 건 좋지 않을 수도 있었다.
혹여나 그의 심기를 지나치게 거슬렸다간, 약속대로 엄마의 유서를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권채하는 제게 있어서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멀고 먼 존재니까.
이곳으로 돌아온 가장 중요한 목적을 잊어선 안 되었다.
마음을 정한 설원이 차분하게 입술을 열었다.
“알겠어요. 그럼 오늘부턴 같은 방 써요.”
그녀의 말에 채하의 입술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이 대답을 오매불망 기다린 사람처럼.
잠시 후, 우주가 잠든 것을 확인한 설원이 채하의 방으로 건너왔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종종 용건이 있을 땐 드나들긴 했지만, 아예 여기서 잠을 자야 한다는 생각에 설원의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반면 채하는 전혀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그녀가 이 방에 있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는 태도였다.
먼저 침대에 앉아 있던 그가 옆에 놓인 베개를 톡톡 두드리며 낮게 읊조렸다.
“자, 이리 와.”
“……한 침대에서 같이 자자고요?”
“같은 방을 쓴다는 게 그런 뜻 아닌가?”
“…….”
설원이 머뭇거리자 그가 소리 없이 웃음을 흘렸다.
드물기 그지없는 그 모습에 설원의 가슴 어딘가가 욱신거렸다.
헛된 바람임을 알면서도 저를 보며 그렇게 웃어주길 원한 때가 있었기에.
그녀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채하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불편하게 바닥에서 잔다느니 그런 말은 하지 마. 어차피 통하지도 않을 거란 거, 이쯤 되면 알고 있겠지만.”
“알아요. 권채하 씨가 얼마나 계략에 능한 사람인지 몸소 실감하는 중이니까.”
“고맙군. 자, 그럼 얼른 누워. 당신 오늘 일하느라 피곤할 테니, 내가 또 외조를 해야지.”
“외조요……?”
그 말에 설원의 머릿속에 순간 이상한 그림이 스쳐 갔다.
이게 다 채하가 제게 내내 외조는 야릇하다느니 하는 소리를 주입한 탓이었다.
이번에는 순수한 어린이인 우주의 부재 탓에, 설원의 생각은 고스란히 뺨의 홍조로 드러났다.
“그래. 맞아. 민설원 당신이 생각하는 그거.”
“……!”
“그러니까 얼른 이리 와. 내 옆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