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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우리 아빠 하면 안 돼요? (27/111)


27. 우리 아빠 하면 안 돼요?
2022.11.02.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마침내 채하에게 1호를 탈환할 절호의 찬스가 찾아왔다.


“소풍?”

“네. 알림장에 올라왔어요. 여름 소풍으로 숲 체험을 간다고.”

“숲이라…… 그렇군.”

“우주가 섬에서만 살아서 그런지 벌써부터 신이 잔뜩 난 것 같아요.”

“그런데 당신 표정은 왜 그리 어둡지?”

채하가 조금 전부터 잎새 어린이집의 일정을 보고 중이던 설원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아이의 소풍 이야기를 하는 엄마치고는 수심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러자 그녀가 움찔하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동행할 학부모를 2, 3명 정도 모집한대요. 프로그램이 여러 개가 있다 보니 어린이집 선생님들만으로는 통솔이 부족할 수도 있다고요.”

“동행?”

“네. 희망하는 사람은 오늘까지 신청하라고…….”

“그렇군. 그래서?”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채하가 다음 브리핑을 기다렸다.

설원이 이내 수심 어린 표정의 이유를 그에게 털어놓았다.


“우주가 엄마랑 같이 갔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하필 그날 꽃 페스티벌 준비로 중요한 사전 회의가 있어요.”

“중요한 회의라. 잘됐군.”

역시 계획대로야, 채하는 그녀가 눈치채지 못할 만큼 살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이런 공식 일정이 있어 줘야 제가 우주의 곁에 있을 기회가 더 늘어나는 법이니.


“뭐가 잘돼요? 우주가 상심이 클 거예요. 아무리 붙임성 좋은 아이라도 다닌 지 얼마 안 된 어린이집이니 아직은 낯설 테고…….”

“그건 당신이 정말 꼬마를 몰라서 하는 소리고.”

“네? 무슨 말이에요?”

“아무것도 아니야.”

우주의 잎새 어린이집 생활을 꼭 일거수일투족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채하를, 설원이 다소 의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우려를 불식시키며 그가 현명하고도 합리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걱정할 것 없어. 그 소풍엔 내가 갈 테니까.”

“네?”

“내가 간다고. 꼬마랑 같이.”

“……당신이 왜요? 당신은 바쁘잖아요.”

여전히 제 태도를 떨떠름해 하는 설원을 향해 채하가 빠르게 공격을 개시했다.


“첫째, 나 안 바빠. 둘째, 내가 우주 학부모인 건 서류상으로 증명 끝나지 않았나? 이 정도면 갈 자격은 충분하다고 보는데.”

단호하고도 논리적인 반박에 설원의 얼굴에 얼떨떨함이 스쳤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채하는 더욱더 듬직한 표정으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약속하지. 반드시 우주한테 아주 특별한 소풍을 만들어 줄 거야.”

하지만 그 약속은 시작부터 난관에 부닥쳤다.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기상이변이 바로 그 난관이었다.


“엄마. 우주 오늘 소풍 못 가요?”

거실 통창을 세차게 때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우주가 구슬피 중얼거렸다.

늘 흥분으로 통통 튀는 목소리가 소풍 당일 쏟아지는 폭우 앞에서 맥을 못 추고 있었다.


“잠깐만 기다려 보자. 우주야.”

그런 우주를 보며 설원은 안절부절못한 채 어린이집의 알림창 업데이트만 기다리는 중이었다.

어제저녁부터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더니만 새벽부터는 본격적인 폭우로 변하고 만 것이다.

그것도 전국 각지가 거의 영향권이었다.


“엄마, 우주 소풍 못 가는 거예요?”

“그게…… 아! 잠깐만. 소식이 떴네.”

다급하게 설원이 핸드폰의 화면 스크롤을 내렸다.

그 모습을 우주가 처연한 눈망울로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

설원의 입에서 외마디 탄식이 흘러나왔다.

소풍은 전면 취소되었고, 평소보다 늦게 등원해 달라는 알림이 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주야. 그게, 음…….”

천재지변을 어찌 설명해야 할지 설원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아이들에게는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뛰어노는 데 장애가 되지 않았으니까.


“괜찮아. 꼬마. 소풍은 예정대로 갈 거야.”

초조해하며 시계를 보던 설원의 고개가 휙 채하를 향했다.

통창에 볼을 딱 붙이고 있던 우주는 그 말에 화색을 띠며 쪼르르 달려갔다.


“대왕 아저씨! 우주 소풍 갈 수 있어요?”

“그럼 당연하지.”

“와! 우주 소풍 간다~ 소풍! 소풍!”

신나서 폴짝폴짝 뛰는 우주를 보며 설원이 우려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애한테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면 안 되는데…….”

“누가 안 지킨다고 했나? 말했잖아. 우주한테 아주 특별한 소풍을 만들어 줄 거라고.”

“그게 무슨…… 비가 이렇게 오는데 어떻게요?”

“자. 우리 바쁜 아내는 이만 일 하러 가야지.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여기는 안심하고 나한테 맡겨.”

“…….”

그의 입가에 영 수상쩍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지만, 당장 나가지 않으면 설원도 시간이 아슬아슬했다.

오늘은 페스티벌 관련한 첫 모임이었기에 절대 늦으면 안 되었다.

게다가 채하는 아까부터 눈빛으로 그녀의 등을 떠밀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설원은 두 부자를 남겨두고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야 했다.


“엄마. 안녕히 다녀오세요~.”

“그래. 우주, 아저씨 말 잘 듣고 있어.”

“응! 우주 말 잘 들을 거예요.”

“잘 다녀와.”

“……네.”

설원이 나가자마자 채하는 기다렸단 듯 정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세 번도 가기 전에 정일환 실장이 빠르게 전화를 받았다.


[부사장님. 찾으셨습니까? 오늘은 회사에 안 나오신다고 들었는데요.]

“부탁할 게 좀 있습니다. 정 실장님, 이전에 행사 업체에서 일했다고 하셨죠?”

그칠 기미가 없는 창밖의 비를 바라보며, 채하는 명료하게 용건을 전달했다.

엄청난 기대감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우주의 아기사슴 같은 눈망울이 시야에 들어오자, 그는 한껏 입가를 끌어올렸다.

지금까지는 제가 가진 지위와 재력 따위에 그다지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던 그였다.

한데 지금 그것이 아주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상 하나뿐인 특별한 존재를 위해서.

*

두 시간 뒤, 채하의 집 문이 열리자 우르르 어린이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샛노란 원복을 입은 앙증맞은 일행의 목적지는 옥상이었다.


“우와!”

“와~ 숲이다! 숲이 있어!”

“헤에~ 엄청나게 넓다~!”

채하의 연락을 받고 잎새 어린이집 아이들을 인솔해 온 선생님들도 이 스케일에 얼떨떨해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입구에서부터 이미 예감했지만, 막상 들어와 보니 옥상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비가 들어오지 않게 설치한 초대형 돔 안에는 아이들 말대로 숲이 구현되어 있었다.

부드러운 인공 풀밭과, 커다란 나무 사이에 동화처럼 자리한 간이 오두막집.

곳곳에 놓인 동물 인형들은 비록 진짜는 아니었으나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거기다 돔 외곽을 따라 돌고 있는 빨간 미니 열차도 놀이공원 못지않았다.

또, 구석 한편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솜사탕과 아이스크림 등이 담긴 카트가 줄줄이 놓여 있었다.

이쯤 되니 선생님들은 그야말로 할 말을 잃었다.


“아, 오셨군요.”

마침 채하가 끝쪽에서 걸어 나와 인사를 건넸다.

언제나 엄청난 존재감을 자랑하는 그의 모습에 어린이집 선생님들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우주네 댁으로 오라고 해서 오긴 왔는데…….”

“네. 비가 와서 소풍을 못 간다기에 소풍 장소를 바꿔봤습니다.”

“아. 아아…… 그런데 우주는요?”

“저기 있습니다. 아이가 하고 싶은 게 있다고 해서요.”

마침 제 이름을 들었는지, 방금 채하가 있던 구석에서 우주가 뿅 하고 얼굴을 내밀었다.


“어? 토끼반 선생님! 거북이반 선생님! 와~ 진짜로 우주 집에 친구들이 소풍 왔어요!”

“그래. 대왕 아저씨 말이 맞지? 마음에 들어?”

“엄청 엄청이요!”

해맑게 웃는 우주의 모습에 선생님들은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우주가 호랑이 분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럴싸한 호랑이 옷에다 얼굴에 호랑이 무늬까지 그리자, 제법 완성도가 있는 모습이었다.

곧 그 모습을 발견한 아이들이 우주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우와! 우주가 호랑이가 됐다!”

“어디, 어디?”

“진짜네? 나도! 나도!”

“나도 숲속의 토끼 할래!”

“그럼 나는 사슴! 뿔도 달아주세요!”

“어, 얘…… 얘들아.”

갑자기 다들 동물이 되겠다니.

어린이집 선생님들의 표정이 사색이 되자 채하가 빙긋 웃으며 뒤편을 가리켰다.

거기엔 정 실장과 몇 명의 직원들이 다양한 동물 의상과 분장 도구를 갖춘 채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가는 데는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곧 돔 안에 만들어진 숲에는 저마다 귀여움과 용맹함을 뽐내는 아기 동물들로 가득 찼다.

세차게 쏟아지는 빗소리는 이내 아이들의 즐거운 비명에 묻혀버렸다.


 


“자자, 우리 친구들. 이제 집에 갈 시간이에요.”

“여기 우주네 아저씨께서 친구들 선물을 준비하셨대요. 자, 감사하다고 인사해야지?”

“감사합니다~!”

잎새 어린이집의 원생 일동이 일제히 채하를 향해 배꼽 인사를 건넸다.

이어 정 실장이 아이들의 손에 신상 장난감을 하나씩 들려주었다.

신나게 놀고 배불리 먹은 데다 장난감까지 받은 아이들의 표정에 순수한 동경심이 떠올랐다.


“우주는 좋겠다. 멋진 아빠가 있어서~.”

“그러게. 우주 아빠 최고야!”

“헤헤. 우리 대왕 아저씨야!”

조그만 어깨를 으쓱거리며 우주가 얼굴에 다 번진 호랑이 수염을 문질렀다.

그러자 친구들이 키득대다가 문득 의아한 듯 물었다.


“근데 왜 아빠가 아니고 대왕 아저씨야?”

“그러게. 저 아저씨가 우주 너네 아빠 아니야?”

“으응?”

“자, 자. 얘들아. 이제 집에 가야지? 엄마 아빠가 걱정하신다?”

“그래. 하율아. 엄마가 밑에 데리러 오셨대.”

눈치껏 아이들을 떼어놓은 선생님이 채하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쉬움을 뚝뚝 떨구며 옥상을 채웠던 아기 동물들이 하나씩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 숲 가운데엔 자그마한 아기 호랑이, 우주가 멀뚱히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발견한 채하가 얼른 아이에게 다가가 허리를 낮춰 앉았다.


“꼬마, 왜 그러지?”

“어, 대왕 아저씨…….”

왜인지 우주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채하는 재촉하지 않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한데 우주가 그에게 아주 뜻밖의 말을 꺼냈다.

저를 닮은 굳건한 눈동자로.


“있잖아요. 대왕 아저씨. 아저씨가 우리 아빠 하면 안 돼요?”

“……!”

그야말로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제가 미치도록 바라마지 않는 것을, 우주가 먼저 입 밖으로 꺼낼 줄이야.


“네? 대왕 아저씨. 우주는…… 아저씨가 좋아요.”

고사리 같은 작은 손이 꼬물거리며 채하의 커다란 손안을 파고들었다.

그 사랑스러운 보챔에 채하는 이성이 날아갈 지경이었다.


“나는…….”

이미 내가 네 아빠야, 라는 말이 그의 목 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제 감정적인 토로로 인해 혼란을 겪게 될 아이와 민설원을 생각하면.

해서 채하는 아이의 바람과 제 욕심을 반반 섞은 절충안을 꺼내놓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제가 못 견딜 것 같았다.


“좋아. 꼬마. 그럼 6호 아빠랑 대왕 아저씨를 합쳐서 앞으로는 대왕 아빠라고 부르도록 해.”

아이의 눈빛이 환해지는 것을 보며 채하는 더불어 미소를 지었다.

‘아빠’라는 호칭이 이렇게나 좋은 것이었다니.

민설원과 우주가 제 세상에 들어온 이후, 황무지 같던 그의 삶에 비로소 꽃이 만개하는 것 같았다.

곧 우주가 활기찬 목소리로 새롭게 탄생한 호칭을 불러주었다.


“좋아요! 대왕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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