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 팔불출 (26/111)


26. 팔불출
2022.10.30.


곧 소리 없이 욕실 문이 닫혔다.

문을 등지고 선 채하가 방금 한 말을 실현하려는 듯 설원에게 야릇한 시선을 던졌다.

이어 그가 대뜸 셔츠 소매를 거침없이 걷어 올렸다.


“오, 옷은 왜 벗어요?”

“소매만 걷은 건데.”

“그, 그러니까 소매는 왜……!”

설원이 당혹감을 숨기지 못하며 뒷걸음질을 쳤지만, 그녀의 등이 닿은 곳은 결국 욕실 벽이었다.


“마침 잘됐네. 당신 서 있는 그 자리가 위치가 딱 좋군. 얼른 벗어.”

“……벗으라고요?”

커다란 눈동자를 끔벅거리며 설원은 눈앞의 이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한 침대를 쓰자는 꼬임을 기껏 떨쳐냈더니만, 아예 한층 더 과감한 장소로 변경할 줄이야.

도무지 제 앞에 펼쳐진 상황을 믿기가 어려웠다.

속이 고스란히 비치는 그녀를 향해 피식 웃음 지으며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다.


“우리 아내가 스스로 벗을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 할 수 없군. 내가 벗겨줄 수밖에.”

“아, 안 돼요! 오지 마요!”

다가온 채하를 밀어버리기 위해 설원은 눈을 질끈 감고는 두 팔을 힘껏 뻗었다.

한데 무슨 영문인지 손끝에 그의 몸이 닿지 않았다.


“못 본 사이에 당신 상상력이 꽤 풍부해진 것 같은데. 아니면, 욕구 불만인가?”

채하의 나직한 목소리가 아래쪽에서 들려왔다.

‘욕구 불만’이라는 단어에 기함한 설원이 눈을 도로 번쩍 떴다.

그러자 아주 뜻밖의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

깜짝 놀란 나머지 설원은 하마터면 욕실 벽에 뒤통수를 부딪칠 뻔했다.

그가 제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깨끗한 대야와 향긋한 비누를 정갈하게도 준비해 놓고서.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권채하 씨?”

“보시다시피 벗기고 있어. 매정한 민설원 씨와 다르게 나는 욕구 불만이 맞거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설원의 발이 들리고 얇은 양말이 훌렁 바닥으로 던져졌다.

무어라 하기도 전에 나머지 한쪽 발도 같은 신세가 되었다.

설마 했지만, 그 설마가 맞았다. 채하는 지금 그녀의 발을 씻겨주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서 있으면 힘들 테니까 당신도 앉아. 뒤에 간이 의자 있어.”

“돼, 됐어요. 내가 씻을게요.”

“사양하면 다른 곳을 씻겨주고 싶어질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안 앉을 건가?”

“…….”

돌려 말했는데도 뉘앙스가 불순하기 그지없었다.

할 수 없이 설원은 시키는 대로 순순히 간이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채하가 물을 받은 대야에다 그녀의 자그마한 두 발을 쏙 집어넣었다.

물 온도가 기분 좋게 적당해, 기겁하며 거절한 게 무색하게 금방 편안해졌다.

곧 채하가 그녀의 한쪽 발을 가볍게 제 손바닥 위에 얹었다.


“당신은 발도 참 희고 뽀얗군. 하긴 온몸이 다 그렇지만.”

“……발은 갑자기 왜 씻겨준다는 거예요.”

자꾸만 툭툭 나오는 위험 발언에 설원이 황급히 말을 잘라냈다.

여전히 웃음기를 머금은 채, 그가 그녀의 발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성실하게 대답해 왔다.


“말했잖아. 내가 당신을 위해 외조할 거라고.”

“그렇다고 발까지 씻겨줄 필요는 없는데요.”

“아니지.”

발을 조몰락거리던 채하가 느른하게 시선을 올려 설원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이것도 말했잖아. 기억이 돌아오려면 예전에 했던 걸 하나하나 해 봐야 한다고.”

“……당신이 내 발을 씻겨줬다고요?”

너른 채하의 어깨가 잠시 흠칫했다.

설원도 이번에는 일부러 던져본 말이었다.

아니면서, 그런 적 없으면서 왜 자꾸 안 했던 짓을 하는 건지 그의 의중이 궁금했다.

침묵은 짧았고, 채하는 진중한 말투로 그녀의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그래. 씻겨주고 싶었거든. 늘.”

“…….”

“그리고 당신 하고 싶은 거 내 눈치 보지 말고 다 해. 나 권채하는 언제든 이렇게 무릎을 낮추고 민설원을 기다릴 거니까.”

그의 말에 설원의 가슴이 속절없이 요동쳤다.

어쩌자고 가슴이 찡해지는지, 어쩌자고 이런 거짓말에 감동을 받고 있는지.

자책해봐도 소용없었다.

자칫 눈시울이 붉어질 것만 같아서 설원은 황급히 시선을 내려 씻고 있는 발에 고정했다.

그걸 재촉의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채하가 다시금 부드럽게 발을 쓰다듬었다.

커다란 손이 이렇게 섬세하게 느껴지다니 정말로 이상했다.


 
한데 채하는 그녀의 발만으로는 만족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애써 감정을 추스르고 있는 설원에게 그가 도발적인 멘트를 던져왔다.


“감동했으면 뽀뽀 정도는 해주는 게 어때? 그런 게 부부 사이의 도리가 아니겠어?”

도발과 함께 고개를 든 채하의 눈빛은 아까와는 달리 타오르는 열망으로 번져 있었다.

순간 발끝까지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이러다간 그에게 잠식되고 말 것이란 예감에 설원은 다급하게 발을 털며 일어섰다.


“부부의 도리를 해 달랬더니 어딜 가는 거지?”

셔츠에 튄 물방울들을 가볍게 털어내며 채하가 들으란 듯 볼멘소리를 냈다.

그러나 욕실에서 빠져나가기 급급한 설원은 그의 말에 반응할 여유가 없었다.


“우주가 깬 것 같아요. 지금은 엄마의 도리가 우선이에요.”

“꼬마가 깼다고?”

“네. 지금 웅얼웅얼 잠꼬대하는 소리가 났어요. 전 가볼게요. 씻겨준 건…… 고마워요.”

“…….”

이 집의 방음이 얼마나 철저한데, 어설픈 변명을 하며 달아나는 설원의 뒷모습을 채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실망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모습은 채하의 마음 깊은 곳을 강하게 자극했다.

옛날에는 표정이 없고 딱딱하기만 했던 그녀였는데, 지금은 말랑하기가 그지없지 않은가.

하, 한숨을 내쉬며 채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말은 자신 있게 했지만, 그녀를 외조하다가 제가 먼저 피가 말라 죽을 것만 같았다.


“예쁜 것만으로도 버거운데 이젠 귀엽기까지 하다니. 아무래도 민설원이 나를 미치게 하려고 작정했나 보네.”

 

*

채운 그룹 본사.

부사장실이 자리한 30층에서는 그를 둘러싼 묘한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우선, 원래도 칼 같은 채하가 요즘 들어 더 칼 같아졌다는 소문이었다. 특히 시간에 있어서.

옛날에는 책상에 고정이라도 된 것처럼 딱 붙어 떨어질 줄 모르더니, 요즘은 날마다 6시만 되면 스프링 튕기듯 일어선다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줄줄이 이어졌던 회의도 요즘은 소강상태라며, 다들 은근히 기뻐하는 눈치였다.

채운 그룹의 부사장 권채하의 변화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강 주임님. 부사장실 벽에 걸린 이상한 그림 보셨어요?”

“아, 그래! 그거! 지난번에 불려갔다가 내가 그걸 보고 입이 떡 벌어졌다니까?”

“그림이요? 부사장님은 원래 그림 같은 거 장식 안 하지 않았어요? 너무 깔끔하다 못해 부사장실이 휑할 정도라던데.”

“윤 대리. 놀라지 마. 내가 곁눈질로 슬쩍 봤는데 글쎄, 무슨 다섯 살 먹은 어린애가 그렸을 법한 초상화 같은 게 걸려 있지 뭐야?”

“초상화요?”

확실히 이상하긴 했다.

채운의 황태자, 권채하는 그런 걸 걸어둘 사람도 아니거니와 꼭 걸어야 한다면 최소 갤러리 소장품을 고를 남자였으니.


“그래서 이 부장님이 총대를 메고 한번 넌지시 물어봤다나 봐.”

“뭐라고 하셨대요?”

“엄청난 잠재적 재능을 지닌 영재가 그린 추상화라고 하셨대. 심지어 값을 매길 수 없다나.”

“아아…….”

어쩐지 석연찮은 대답에 탕비실에 모여 있던 직원들의 표정이 동시에 어색해졌다.

그러자 때마침 떠올랐다는 듯 윤 대리도 말을 보탰다.


“그러고 보니 저도 지나가다가 이상한 걸 봤어요.”

“뭔데?”

“지난번에 짐 옮길 게 있어서 부사장실 앞을 몇 번씩 지나갔거든요. 그때 마침 문이 살짝 열려 있었는데, 부사장님이 지갑을 열고 혼자 히죽거리고 있는 거 있죠?”

“히죽거렸다고?”

“네. 저만 본 게 아니에요. 식사하러 가서도 십 분에 한 번씩 지갑을 열어본다는 것 같던데요.”

“흐음…….”

미궁에 빠진 사건을 추리해보려는 듯 직원들은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도무지 마땅한 답을 도출해낼 수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채운의 황태자, 얼음 같은 부사장 권채하가 히죽거리는 장면 자체도 상상이 가질 않았다. 오소소 소름만이 돋아날 뿐이었다.

짧은 침묵 끝에 결국 최근 입사한 발랄한 신입이 손뼉을 치며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오! 미연 씨. 뭔데? 빨리 말해봐!”

신입사원 미연이 손가락 하나를 들어 까딱이며 회심의 어조로 단언했다.


“백지수표가 들어 있는 게 분명해요!”

“아아…….”

“왜요? 강 주임님. 제 추리가 정확한 거 같은데요.”

“부사장님이 그런 걸로 기뻐할 인물 같진 않은데…….”

“에이! 그건 모르는 거예요. 돈 앞에 장사 없다고, 아마 지금도 수표 꺼내서 히죽거리고 있을걸요?”

그들의 대화는 반은 맞고, 반은 빗나갔다.

그 시각 채하는 부사장실에 걸린 그림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최고급 액자를 주문해 눈만 들면 보이는 위치에 걸어둔 그 작품은, 최근 우주가 어린이집에서 그려온 제 그림이었다.

병아리처럼 재잘대던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선했다.


‘선생님이 좋아하는 사람을 그려 보라고 해서 우주가 대왕 아저씨 그렸어요!’


‘좋아하는 사람?’


‘응~ 그래서 엄마도 그리고 대왕 아저씨도 그렸어요!’

 
어쩌면 그토록 기특한 소릴 할 수 있는지.

제 아들이지만, 정말이지 사람의 마음을 쥐고 흔들 줄 아는 녀석이었다.

채하는 다정한 눈으로 그림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나름 날렵한 턱을 묘사하려고 했는지 그림 속 그의 턱은 빗살무늬 토기가 되어 있었다.

거기에 채하 특유의 짙은 눈썹과 깊은 눈매는 꼭 멍든 것처럼 음영이 생겨나 있었지만, 그의 눈에는 세상 어떤 화가가 그린 그림보다 걸작이었다.

겨우 이런 그림 하나로 자그마한 꼬마가 저를 들었다 놨다 할 수 있다는 게 놀랍기만 했다.

우주를 생각하고 있자니 그새 또 보고 싶은 기분이 들어, 채하는 얼른 지갑을 꺼내 펼쳤다.

그 안에는 얼마 전 웨딩 촬영 때 찍었던 가족사진이 들어 있었다.

턱시도와 웨딩드레스를 갖춰 입은 누가 봐도 부부인 설원과 저 사이로, 하얗고 동그란 우주가 해맑게 웃음을 짓고 있는 사진.

그야말로 세계 평화를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미소였다.


“아무래도 오늘은 내가 직접 데리러 가야겠군.”

한쪽 턱을 괴고서 채하는 사진 속 우주에게 한참이나 시선을 고정했다.

그간 아이와 친해지기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설원 모르게 기울였던 그였다.

등·하원도 그녀가 아는 것보다 두 배는 더 직접 했고, 티 나지 않게 신상 장난감들을 하나씩 늘려나갔다.

도우미 아주머니에겐 특별히 아이가 좋아하는 식단 위주로 짤 것을 지시했고, 그것을 매번 우주에게 어필했다.

또한 우주의 ‘엄청 엄청’ 화법에도 진심으로 응하며 그 역시 ‘엄청 엄청’을 자주 구사해 주었다.

그래서인지 처음에는 계속 ‘재윤 아빠’거리며 최재윤을 찾던 우주가, 요즘은 제 앞에서 그 이름을 올리는 일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채하는 겨우 이 정도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에게서 1호를 탈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대왕 아저씨가 아닌 진짜 아빠로 불리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사실 채하의 가슴 속에는 새로운 욕심이 움트고 있었다.

바로 우주가 엄마보다 저를 더 좋아하게 만들겠다는.

그것은 채하가 지금껏 인생에 가져본 어떤 야망보다도, 가장 강한 야망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