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원래 외조는 야릇하게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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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원래 외조는 야릇하게 하는 거야
2022.10.26.
[처리?]
“그래. 처리.”
[또? 넌 뭘 그리 매사 처리할 게 많냐. 나이도 먹었는데 좀 너그러워져 봐라. 그리고 나 이제 그런 일 안 해. 조만간 대표직 오르려면 몸 사려야 한다고.]
예상대로 심드렁한 대답이 돌아왔지만, 백사라는 실망하지 않았다.
이 인간에게 아무것도 쥐여주지 않고 부려 먹을 수 있으리란 기대 따윈, 애초에 없었으니까.
백재영과 백사라.
네 살 터울의 둘은 성향이 완전히 달라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남매지간이었다.
흔히 재벌가의 자식들은 마냥 풍족할 거라 여기지만, 가진 게 많을수록 싸움은 치열한 법.
특히나 나눠 먹어야 할 파이가 탐스러울수록 우애 같은 단어는 사전에나 존재했다.
게다가 운 좋게 먼저 태어난 것에 비해 백재영은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경영 능력이라곤 쥐뿔도 없는 제 오빠가, 백영의 장남이라는 이유만으로 늘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게 백사라는 늘 못마땅했다.
본디 그녀는 백영 그룹에 큰 욕심을 갖고 있진 않았다.
원래는 채운에 시집가 떵떵거리며 살 작정이었으나, 그 목적이 허물어진 뒤론 백사라는 백영 자체에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제 몫을 당당하게 챙기기 위한 일환으로 보란 듯 화장품 브랜드를 론칭한 것이기도 했고.
그리고 이런 여동생의 행보를 당연하게도 백재영은 탐탁지 않게 여겼다.
“도와주면 내가 아빠한테 잘 말해서 대표직 맡을 수 있게 힘 실어줄게.”
[사라 네가? 그 말을 내가 믿을 거 같냐? 사고만 쳤다 하면 아버지한테 바로 보고되는 게 누구 입에서부터 나온 건지 모를 거 같아?]
“그게 다 내가 오빠를 걱정해서 그런 거 아니겠어?”
[아. 모르겠고, 이 오빠는 엔터 사업하느라 아주 바빠요~ 옛날처럼 한가하게 시답잖은 네 사랑 타령이나 들어줄 시간 없다. 이만 끊자.]
흥미 없다는 듯 백재영이 전화를 끊으려 하자, 백사라는 얼른 회심의 무기를 꺼냈다.
“오빠 내 친구 소진이 알지?”
[……소진이? 그…… 엄청 예쁜?]
드디어 상대가 덥석 미끼를 물었다.
옛날부터 백재영을 쥐고 흔들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커다란 약점 덕분이었다.
바로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쓴다는 것.
그 때문에 백재영은 젊은 시절부터 수없이 사고를 쳤고, 백영의 망나니로 낙인이 찍혀 있었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백사라가 방금 낚은 낚싯대를 냉큼 끌어 올렸다.
“그래. 옛날부터 오빠가 캐스팅하고 싶어 했던 애. 개인적으로 만나게 해달라고 맨날 졸랐잖아.”
[……갑자기 걔는 왜?]
“내가 소개해 줄게. 듣자 하니 요즘 남자친구랑 헤어졌다더라.”
[이렇게까지 나오는 거 보니 어지간히 지저분한 부탁이구만. 바라는 게 뭐냐. 백사라?]
지저분한 부탁이라…….
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지저분한 것은 눈에 띄었을 때 빨리 처리하는 편이 나았다.
백사라는 손톱 끝에서 대롱거리는 큐빅 네일 파츠를 힐끗 내려다보곤, 손으로 튕겨 날려버렸다.
그러고는 본격적인 용건을 꺼냈다.
“오빠가 지겨워하는 사랑 타령.”
[자세히 털어놔 봐. 이 오빠가 다 들어줄게.]
“진작 그렇게 나왔어야지. 일단은…….”
민설원의 최근 행적을 샅샅이 조사하라고 지시한 뒤 백사라는 집으로 돌아왔다.
해외에서 초빙한 건축가가 지은, 그야말로 대궐 같은 집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줄을 서도 살 수 없는 한정판 명품 의류들과 발에 챌 정도로 넘쳐나는 보석들.
화장품 브랜드의 대표라는 그럴싸한 직함에, 누가 봐도 세련되고 귀티 넘치는 외모까지.
세상이 부러워하는 모든 걸 가졌는데도 백사라는 한 번도 제대로 된 충족감을 느끼지 못했다.
이유는 딱 한 가지였다.
그녀가 가장 원하는 존재, 권채하를 손에 넣지 못했다는 분함.
“권채하…….”
까드득 손톱을 깨물며 백사라는 그를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사춘기 무렵, 부모님을 따라갔던 모임에서 본 스무 살의 권채하는 그야말로 군계일학이었다.
그가 뽐내는 이질적인 매력은 뭇 재벌가 자녀들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았다.
숨길 수 없는 총명함과 정열이 담겨 있는 무심한 눈동자.
거기에 그만이 가진 특유의 분위기는 척박한 땅에 홀로 피어난 꽃 같았다.
타인에게 곁을 주지 않는 점까지도 완벽하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백사라는 그야말로 그에게 한눈에 반했다.
그리고 자신이 백영 그룹의 딸이라는 사실에, 태어난 이래 가장 감사하게 되었다.
그들이 속한 재계는 으레 계산속에 따라 정략혼을 하기 마련이었다.
나이 차이며 두 그룹 간의 관계며, 미래 권채하의 짝은 그녀 외에는 없어 보였다.
아쉽게도 끈질기게 친한 척을 하는 동안 채하는 그녀에게 단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하나 그건 다른 여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기에 큰 위기감은 없었다.
오히려 닿을 수 없는 존재가 언젠가 제 것이 되리라는 우월감에 취해 있었을 뿐.
한데 모든 것이 뜻대로 흘러가던 백사라 인생에서, 유일하게 틀어지는 일이 발생했다.
그리고 하필 그 일이 바로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원하고 또 바랐던 일이었다.
권채하와의 결혼.
혼담을 한껏 푸시하고 있던 즈음, 난데없이 민설원이 나타나 그를 가로채 간 것이다.
하찮기 그지없는 잡초 같은 여자가.
“아악! 짜증 나!”
백 번을, 천 번을 되새겨도 분통이 터져 백사라는 새로 산 핸드백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금속으로 된 체인이 긁히며 날카로운 굉음을 냈다.
제 인생에 반을 권채하만 바라보고 살아왔는데.
그를 얻기 위해서 물불 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건만, 돌아보니 너무 물렀었다.
아예 뿌리를 뽑았어야 했는데 쓸데없이 몸을 사려선 결국 이런 우환을 남기지 않았던가.
그에 생각이 미치자 그녀의 눈에 광기 어린 이채가 번뜩였다.
“좋아. 이렇게 된 거, 이번만큼은 확실하게 처리해주겠어.”
*
정 비서 부자가 다녀간 뒤로 설원과 채하 사이에 감돌던 긴장감은 조금 누그러졌다.
커다란 집에 타인의 온기가 머물다 간 흔적은 생각보다 포근했다.
덕분에 두 사람은 제법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왜 그렇게 힐끔거리는 거지? 그냥 대놓고 봐도 되는데. 가까이서 봐주면 더 좋고.”
“내, 내가 언제 힐끔거렸다고 그래요?”
“그래? 난 또 아까부터 일 분에 한 번씩 이쪽을 보길래 당신이 내 얼굴을 엄청 엄청 보고 싶어 하는 줄 알았지.”
능청스레 우주의 말투까지 따라 하며 채하가 입꼬리를 씩 끌어올렸다.
그런 그를 보며 설원은 아까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꺼낼까 말까 머뭇거렸다.
한데 채하가 이미 의중을 파악한 듯 대화의 물꼬를 터주었다.
“말해도 돼. 그게 뭐든 오케이할 거니까.”
“……정말이에요?”
“그래. 그러니까 내 눈치 보지 말고 말해. 우린 옛날에도 허심탄회하게 모든 걸 터놓는 사이였으니까.”
어쩌면 저렇게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지.
철면피를 뒤집어쓴 것 같은 채하를 애써 외면하며, 설원이 결국 용건을 꺼냈다.
“그게, 로라랑 제임스한테서 일 제의가 들어왔어요.”
“일?”
채하가 마시고 있던 홍차 잔을 내려놓으며 눈썹을 씰룩였다.
그 반응에 설원은 내심 조마조마해졌다.
옛날 결혼 생활을 할 때도 지나가는 말로 일을 하고 싶다고 건넨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채하의 대답은 똑같았다. 안 된다, 도 아니고 그럴 필요 없다.
그녀의 입장이 아닌 오롯이 채운 그룹 권채하의 입장에서 나온 그 대답에, 설원은 빠르게 포기해버렸다.
그는 자신을 아내라는 한 사람으로 보는 게 아니라, 그저 계약 상대이자 하나의 거래 대상으로만 보고 있었으므로.
운을 띄워놓고 정작 말을 이어가지 않자, 채하 쪽에서 먼저 답을 해 왔다.
“하는 게 좋지 않겠어? 당신, 꽃 좋아하잖아.”
“네?”
“해보라고. 로라랑 제임스라면 나도 찬성이야.”
“아…….”
듣지도 않고 매정하게 거절할 줄 알았는데, 너무도 뜻밖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채하는 마치 기다렸던 사람처럼 적극적인 질문 공세를 펼쳤다.
“어떤 일인데? 언제부터? 어디서 하는 거고?”
“그건…….”
채하의 기세에 눌려 설원은 로라와 제임스로부터 온 제안을 상세하게 털어놓았다.
요는, 한 달 뒤에 있을 지방의 유명 꽃 페스티벌에 장식팀으로 참가하는 것이었다.
로라 앤 제임스뿐만 아니라 타 화훼업체들도 다양하게 참여하기에, 설원에게도 도움이 될 거라며 제임스가 특히 강하게 푸시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중앙 정원 장식을 그녀에게 전적으로 맡긴다는 파격 제안까지 곁들여서.
내용을 진지하게 경청한 채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당신한테 딱인 것 같군.”
“해도…… 괜찮아요?”
“당연하지. 내가 언제 당신 의견에 반대한 적 있었나.”
“…….”
아주 신사적인 웃음을 지어 보이며 채하가 이 안건에 쐐기를 땅땅 박았다.
“뭐, 질투는 나지만 당신은 꽃을 만질 때 제일 예쁘니까. 아, 물론 얼른 기억이 돌아와서 옛날처럼 열렬하고 뜨겁게 나도 만져줬으면 해.”
“내가 언……!”
흠칫, 또 걸려들 뻔한 것을 깨달은 설원이 얼른 입을 닫았다.
이상한 거짓말을 해놓고 그는 되레 태연하게 되물어왔다.
“응? 왜?”
“……아니에요. 그런데 지방에 왔다 갔다 해야 할 일도 생길 거 같은데, 우주는 어쩌죠?”
능글거림의 수위가 점차 높아지자 설원은 얼른 화제를 순수한 어린이로 돌렸다.
그러자 채하가 믿음직스러운 표정으로 단호히 답했다.
“우주는 걱정할 거 없어. 내가 잘 챙겨줄 테니. 명색이 대왕…… 아니지, 아빠잖아.”
“정말 해도 돼요?”
“그래. 오히려 잘됐군. 이참에 내가 당신 외조를 하면 되겠어.”
외조…….
설원이 그 단어를 낯설게 읊조리고 있자니, 채하가 야릇한 눈길을 그녀를 향해 던졌다.
“말 나온 김에 지금 당장 하지.”
“……뭘요?”
수상한 낌새를 감지한 설원이 슬슬 뒷걸음질을 치려 하자 채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더니 대뜸 시계를 보았다.
“좋아. 우주는 낮잠에서 깨어나려면 아직 멀었군.”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상관이 있지. 어린이가 듣기엔 낯 뜨거운 소리가 흘러나갈 수 있으니.”
“……!”
기겁한 설원이 이젠 슬슬이 아니라 대놓고 달아날 채비를 갖췄다.
그러나 채하의 커다란 보폭은 단 두 걸음 만에 둘 사이의 간격을 훅 좁혀왔다.
순식간에 두 손을 붙잡힌 설원이 커다랗고 새까만 눈으로 그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파르르 떨리는 눈망울은 마치 독수리에게 잡힌 아기새 같은 꼴이었다.
그 표정을 지그시 바라보던 채하가 소리 없는 웃음을 지었다.
“민설원 씨 머릿속에 지금 상당히 위험한 그림이 스쳐 가고 있는 모양인데.”
“아, 아니에요!”
“아니라고? 그럼 내가 하자는 대로 얌전히 할 거야?”
“그건…….”
“따라와.”
설원의 손을 잡아끌고, 채하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두근두근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귓가까지 톡톡거려왔다.
잠시 후, 목적지에 도착한 채하가 설원의 자그마한 손을 놓아주었다.
“권채하 씨……!”
그녀의 눈앞에 놓인 것은 커다란 욕조였다.
남사스러운 광경에 설원이 기겁을 하며 다시 달아나려 하자, 채하가 냉큼 등을 떠밀어 욕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제 아내, 민설원을 상대로 설득력 있는 의견을 한껏 피력하며.
“당신이 모르나 본데, 원래 외조는 야릇하게 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