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그물을 칠 시간
(2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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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그물을 칠 시간
2022.10.23.
아들. 채하가 힘주어 뱉은 그 호칭에 정 비서의 눈빛이 노을처럼 따스해졌다.
“그렇군요. 과연 두 분을 똑 닮았습니다.”
“아. 아직 아이한테는 비밀입니다.”
우주가 그들에게 도착하기 직전, 채하가 단단히 입막음을 시켰다.
곧 우주가 다다다 달려와 두 사람을 번갈아 올려다보며 배꼽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저는 우주예요. 우리 엄마 아들이에요.”
“세상에. 인사도 잘하는구나. 몇 살이니?”
“다섯 살이에요~.”
“그래. 우주, 이 할아버지한테 한번 와보련?”
“네~!”
우주가 냉큼 정 비서의 품에 가 안기자, 지켜보던 설원의 입가가 부드러워졌다.
섬에 워낙 노인이 많았던지라 자연스레 우주는 저를 귀여워해 주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무척 좋아했다.
함께 식사하는 동안에도 우주는 정 비서 부자 사이에 껴서 병아리처럼 내내 재잘거렸다.
우주 또래의 아이가 있다는 정 실장은 무척이나 능숙하게 아이를 다루었다.
그리고 왜인지 채하는 그 모습을 내내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우주랑 마당 구경하러 갈래요? 재미있는 게 엄청 엄청 많아요!”
“이 할아버지는 다리가 아파서 엄마랑 여기서 쉬고 있으마. 아저씨하고 다녀오렴.”
“네! 그럼 작은 아저씨랑~ 대왕 아저씨랑~ 우주랑 셋이 가요!”
식사가 끝나자마자 우주는 신이 나서 양쪽에 두 어른을 끼고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작은 아저씨는 또 뭔지, 옅게 웃음을 흘리며 설원은 후식을 만들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
그녀가 종종 만들어주던 수박화채를 정 비서가 좋아했던 걸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보기 좋네요.”
화채를 만드는 동안, 정 비서는 거실 통창을 물끄러미 내다보고 있었다.
“이런 풍경을 보게 되다니, 이 늙은이가 주책맞게 눈물이 다 나는군요.”
“죄송해요. 정 비서님. 아까는 사정이 있어서…….”
설원이 조심스레 그에게 좀전의 일을 해명했다.
정 비서는 그녀가 이곳에서 유일하게 신뢰하는 사람인 만큼, 진실을 털어놓더라도 채하의 귀에 들어가지 않으리란 믿음이 있었기에.
무엇보다 자신을 항상 딸처럼 대해주던 그에게만큼은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아무렴 그랬겠지요. 그 사정 때문에 부사장님을 기억 못 한다고 하신 겁니까?”
“……네. 지금 전부 설명드리기는 어렵지만요.”
“그렇군요. 하지만 한 가지, 작은 사모님께서 아셨으면 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아주 뜻밖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작은 사모님께서 안 계신 동안 부사장님이 정말로 많이 힘들어하셨습니다.”
“……네?”
여전히 시선을 창밖에 붙박은 채, 정 비서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저도 그런 부사장님의 모습은 처음 보았습니다. 형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그 정도는 아니었거든요. 매사 냉정한 분이니까요. 한데 작은 사모님이 사라지고 나니 부사장님은 뭐랄까……. 심장을 밖에 내놓은 사람 같았지요. 껍데기만 남은 사람처럼요.”
“그게 무슨…….”
가슴이 이상하게 두근거리는 걸 느끼며 설원은 정 비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마 작은 사모님도 제가 본 걸 말하면 믿지 못하실 겁니다. 세상에는 왜 열녀비만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눈에는 부사장님이야말로 아내를 잊지 못하는 남편 중 제일이었으니까요.”
“…….”
“어쨌든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늘 지켜보면서 조마조마했습니다.”
“네에…….”
싱숭생숭한 기분과 함께 어설프게나마 화채가 완성되었다.
그러자 정 비서가 직접 우주 일행을 부르러 가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모습을 보며 설원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채하가 제게 수절했느니 마느니 했던 소리가 정말로 사실이었던 걸까.
대체 자신이 없던 동안 그의 모습이 어땠기에, 정 비서님이 저런 말을 하는 걸까.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볼 수는 없었다.
왠지 알게 되면 이 집에서 발길을 돌리기가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는, 본능적인 예감이 들었기에.
*
“어떻습니까? 조사한 내용은.”
수박화채를 다 먹은 뒤, 채하는 정 비서를 따로 제 서재로 불렀다.
이미 우주는 정 실장을 7호 아빠 정도로 여기고 있는지 방에서 함께 놀기 삼매경에 푹 빠져 있었다.
둘이서 할 이야기가 있다는 말에 설원은 알아서 자리를 피해주었다.
정 비서가 서재를 한번 둘러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5년 전 사고가 있던 무렵, 큰 사모님과 백영 그룹 백사라 양이 부쩍 자주 회동을 하긴 했더군요.”
“그렇습니까?”
“한데 두 분에게서 특별한 움직임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부사장님도 아시다시피 큰 사모님은 결혼한 후에도 백사라 양을 포기하지 못해서, 쭉 만남을 이어갔던 모양이니까요.”
“하아…….”
채하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탄식을 내뱉었다.
벌써 몇 년째, 집에 멀쩡한 며느리를 놔두고 밖에서 엉뚱한 짓을 벌이는 제 어머니가 기가 막혀서였다.
“일단 더 깊고 넓게 조사해 주세요. 분명 뭔가 걸리는 게 있을 겁니다. 그런 큰일이 있기 전에 때마침 자주 만나 밥 먹고 쇼핑하고 그랬을 리는 없으니까요.”
“알겠습니다. 부사장님. 우리 일환이도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부탁은 제가 드려야죠. 안 그래도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아무래도 지금은 중요한 시기이니까요.”
정 비서의 말에 담긴 깊은 뜻에 채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파헤쳐야 할 진상이 산더미 같은 지금, 아군은 많을수록 좋았다.
바야흐로 그물을 칠 시간이었다.
*
“사라야! 여기야, 여기.”
“어머님.”
건물 앞으로 나온 백사라가 방문객을 보고는 새침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예상대로 목표물이 그물에 걸려들었다.
그녀는 또각또각 힐 소리를 내며 허영주 여사를 향해 걸어갔다.
곧 걸음을 멈춘 백사라는 생긋 웃으며 늘 그랬듯 친근하게 허영주의 팔짱을 꼈다.
“저 일하는 곳까지 어쩐 일이세요?”
“그냥 보고 싶어서 왔지. 그나저나 사라네 회사는 건물도 참 세련됐네! 역시 건물도 주인을 닮나 봐.”
“네. 저희 건설사에서 특별히 신경을 써줬어요.”
백사라가 거만한 표정으로 보란 듯 건물로 시선을 돌렸다.
전체가 통유리로 되어 있는 이 건물은 그녀가 최근 설립한 코스메틱 브랜드 회사였다.
허영주가 목이 빠지도록 건물을 올려다보곤, 다시 백사라를 쳐다보았다.
“어쩜 우리 사라는 이렇게 예쁘고 능력도 좋을까. 겨우 서른 살밖에 안 됐는데 이런 큰 회사 대표까지 맡고!”
“과찬이세요. 어머님. 저희 아버지께서 다 그만큼 든든히 서포트 해주시는 거죠.”
그렇게 말하며 백사라는 끼고 있던 팔짱을 더욱 단단히 꼈다.
“채운하고 사돈이 되었으면, 저희 백영이 서포트 하나는 끝내주게 해줬을 텐데. 아쉽네요. 하지만 뭐 어쩌겠어요. 이미 임자가 있는 몸인데.”
백사라가 시무룩하게 입술을 삐죽 내밀자 당황한 듯 허영주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사라야. 우리 오랜만에 같이 쇼핑이나 갈까? 내가 우리 사라한테 선물 좀 해주고 싶은데.”
“선물이요?”
“그래. 요즘 통 같이 백화점에 안 갔잖니. 사라 네가 너무 바빠서.”
“호호. 좋아요. 어머님이 권유하시는데 당연히 가야죠! 얼른 가요.”
잽싸게 기사를 호출하며 백사라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단순한 허영주를 구워삶는 일이야 원래도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민설원이 돌아오면서 상황이 제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울고불고 난리를 쳐가며 사정한 끝에, 채운 그룹이 진행 중인 리조트 부지를 틀어쥐는 데 성공한 그녀였다.
이것이 제 손에 있는 한 허영주는 결코 저를 포기하지 못할 것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채운의 명성과 부에만 관심이 있는 여자였다.
그게 곧 제 명예와 부로 이어진다고, 굳게 믿고 있는 어리석은 여자.
잠시 후, 두 사람은 VIP 전용 안내를 받으며 백화점에 입성했다.
안 그래도 며칠 동안 쇼핑을 못 한 데다, 짜증이 나 있는 상태였으니 오늘 허영주의 지갑이나 시원하게 털어볼 작정이었다.
한데 그녀의 태도가 평소와는 상이했다.
막상 백화점에 도착하자 허영주는 정신이 딴 데 팔려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자주 가던 명품 층으로 가야 하는데, 뜬금없이 아동복 코너는 어디 있냐고 직원에게 묻질 않나.
거기다 어린이를 겨냥한 백화점 판촉물에도 통 눈을 떼지 못했다.
왜 그러냐 묻는 백사라에게 허영주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둘러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백사라는 허영주의 의중을 알게 되었다.
워낙 빤히 들여다보이는지라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어머님.”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백사라가 애써 웃음을 꾸며냈다.
“응? 다 골랐니? 어떤 걸로 할 거야?”
“선물이라길래 전 어머님이 직접 골라주실 줄 알았는데요. 그런데 아까부터 저한텐 관심도 없으시고, 어린이용품만 들여다보고 계시네요.”
“응? 내가?”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든 듯 허영주가 유리 진열장에서 눈을 떼어냈다.
분명 백사라에게 선물할 주얼리를 둘러보던 중이었는데, 언제부턴가 저도 모르게 미아 방지 목걸이와 팔찌를 살피고 있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허영주를 향해, 백사라가 따끔한 일침을 가했다.
“어머님 오늘 이상하시네요. 꼭 손주라도 둔 할머니처럼 구시잖아요.”
“뭐? 내가 언제? 내가 무, 무슨 손주가 있다고 그래?”
“아니시면 됐어요.”
“당연히 아니지! 내가 언제 그 우주라는 애를 손주로 인정……!”
흡, 하고 허영주가 입을 다물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아니, 그게…….”
“채하 씨 아이 이름이 우주인가 봐요.”
여전히 미소를 얼굴에서 거두지 않은 채였지만, 백사라의 두 눈은 더없이 싸늘했다.
커다란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은 허영주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런 그녀 대신 백사라가 대화를 마무리했다.
“오늘은 이만할까요? 저도 뭘 사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져서요.”
“그…… 그럴까?”
“예. 어머님. 기사 부를게요.”
“그, 그래. 고맙다.”
허영주를 태워 보낸 뒤, 백사라는 으드득 이를 깨물었다.
꼴을 보아하니 얼마 전 권채하의 집에 찾아가 마주친 이후로도 아이를 본 게 틀림없었다.
아까부터 어린이용품에만 눈이 데굴데굴 굴러가는 게 어쩐지 수상하더라니.
“하!”
민설원. 그 여자의 아이를 절대 손주로 인정할 일 없을 거라며 단언하더니만.
막상 보고 나니 새삼 애틋함이라도 생겨난 건지 뭔지 어이가 없었다.
권채하가 대뜸 결혼해 버린 이후에도, 사랑 없는 결혼이며 잠깐 스쳐 가는 비바람이라 내내 저를 설득했던 게 바로 허영주였다.
제멋대로 결혼해 놓고선 아내를 들여다보지도 않는다고.
시간이 한참 흘렀는데도 아이가 생기지 않는 걸 보면 둘 사이가 뻔하지 않겠냐고.
거기에 두 사람이 3년간의 계약 결혼이었다는 비밀까지 엿듣고 와 제게 알려준 게 바로 허영주 아니었던가.
조금만 참으면 민설원의 자리는 다시 제 것이 될 거라 열렬히 설득까지 하면서.
그랬던 그녀가 지금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조막만 한 어린애에게 정신이 팔려서 손바닥 뒤집듯 관계를 뒤집으려 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일로만 압박해서 될 일이 아니야.”
입술을 깨물며 백사라는 핸드폰을 꺼내 번호를 눌렀다.
어지간한 일로는 연락도 하기 싫은 백영의 공식 망나니, 제 오빠 백재영에게.
곧 수화기 너머로 경박하기 그지없는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사라. 이거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오빠?”
[네가 오빠라고 부르는 걸 보니, 지저분한 부탁 거리가 있나 본데?]
“지저분하다니, 말조심해.”
말투만 들으면 백영 산하의 엔터테인먼트 대표가 아니라, 동네 날건달이라고 해도 믿을 판이었다.
백재영. 같은 피를 나누었다는 것조차 수치스러워 어릴 때부터 싫어했던 인간이지만, 필요할 때는 또 그만큼 써먹기 좋은 인간이 없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처리해줘야 할 인간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