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제 아들입니다
(23/111)
23. 제 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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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제 아들입니다
2022.10.19.
딱히 쥐어박지 않아도 눈을 부라리는 허영주의 모습은 다섯 살 아이에겐 충분한 위협이었다.
하지만 제 주인에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어 윤 실장은 어린이집 현관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잠시 후, 마침내 잎새 어린이집의 문이 열렸다.
“와~ 미끄럼틀 타자!”
“나는 공놀이! 공놀이할래!”
“나랑 칼싸움할 사람~!”
우르르 쏟아져나온 어린이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러대는 통에, 허영주는 귀가 따가워 미칠 지경이었다.
“아유, 무슨 참새처럼 짹짹대네! 어디 있어? 그 우주인가 뭔가 하는 애는!”
“잠시만요. 찾고 있습니다……. 어, 저기! 저기 있네요! 시소 타고 있는 아이요. 오른쪽.”
“어디, 시소?”
허영주가 두 귀를 틀어막은 채 놀이터 구석에 있는 시소로 눈을 돌렸다.
곧 샛노란 원복을 입은 두 아이가 사이좋게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해맑게 웃으며 콩콩 땅에 발을 딛고 있는 자그마한 아이를 향해 허영주는 눈을 붙박았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아이는 시소가 하늘로 떠오를 때마다 까르르 웃음꽃을 피워대고 있었다.
“어떠세요? 닮은 것 같습니까?”
“아, 좀 조용히 해봐! 집중이 안 되잖아.”
“……무슨 집중까지야.”
“뭐?”
“아무것도 아닙니다. 천천히 보세요. 본다고 뭐 결과가 달라지겠나요.”
“윤 실장 참 많이 컸어. 응?”
“다 사모님 덕분이죠, 뭐.”
허영주가 눈을 한번 흘기고는 다시 시소 위의 아이에게로 휙 돌렸다.
그녀는 한참이나 홀린 듯 웃고 있는 아이를 쳐다보았다.
잔뜩 집중한 눈동자가 시소를 따라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를 반복한 끝에, 허영주가 슬그머니 윤 실장의 팔뚝을 찔렀다.
“윤 실장. 차에 저번에 내가 사놨던 백화점 과자 세트 있지? 깜박하고 안 내린 거.”
“사모님께서 저얼~대 먹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신 과자라면, 아직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잊고 있었네요. 이따가 댁에 꼭 올려드리겠습니다.”
“아니, 지금 가져와.”
“네? 지금요?”
“빨리! 쉬는 시간 다 끝나겠어.”
어리둥절하면서도 윤 실장은 허영주에게 등 떠밀려 차로 향했다.
원래도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사람이니 일일이 이유를 알려고 하지 않는 게 편했다.
한편 허영주는 살금살금 어린이집 담벼락을 따라 시소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담이 허리 정도까지밖에 오지 않는지라, 이쪽이 안을 들여다보기에 훨씬 수월할 것 같았다.
역시나 반대쪽으로 돌아오니 시소가 바로 코앞이나 다름없이 가깝게 보였다.
덩달아 아이의 명랑한 목소리도 아주 선명하게 들려왔다.
“하율아. 사탕 있어?”
“한 개밖에 안 남았는데.”
“그거 우주 주면 안 돼?”
“안 돼. 나도 먹어야 된단 말이야!”
그까짓 사탕이 뭐라고, 기어이 안 주겠다는 하율이라는 아이가 얄미워 허영주는 빤히 시소 반대편을 노려보았다.
아이치고는 아주 표정이 냉담한 것이 사탕을 안 줄만 해 보였다.
때마침 윤 실장이 양손 가득 고급 과자를 들고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 과자를 휙 낚아챈 허영주는 대뜸 담벼락에 대고 그것을 흔들었다.
“얘! 얘!”
“……?”
우주와 하율이라는 아이가 허영주의 목소리를 따라 담벼락으로 동시에 얼굴을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허영주는 잽싸게 손짓을 했다.
“거기, 하얗고 예쁘게 생긴 너! 그래. 너 말이야. 이리 좀 와 봐라.”
허영주가 뚫어져라 보는 건 우주 쪽이었기에, 우주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천천히 시소에서 내려왔다.
그러더니 공손하게 배꼽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 부르셨어요?”
그 귀여움에 허영주는 물론, 윤 실장도 숨이 턱 막혔다.
최강의 미모를 가진 권채하 미니미 버전이 애교를 부리는 희귀한 장면을 보는 것만 같았다.
우주가 사정거리에 들어오자 정말로 쥐어박으려나 싶어 윤 실장이 허영주를 주시했다.
한데 그녀는 말과는 완전히 정반대로 행동했다.
덥석 아이의 손을 붙잡더니 과자를 한가득 들려준 것이었다.
“이거 너 먹어라. 그깟 사탕보다 백 배는 비싼 과자야.”
“네?”
“너 준다고.”
“…….”
당연히 좋아할 줄 알았는데 우주가 통 받으려 하질 않자, 허영주가 재촉을 했다.
“왜 안 받아? 비싸고 좋은 거라니까.”
“우리 엄마가 모르는 사람이 주는 건 받지 말랬어요.”
“뭐? 나 모르는 사람 아니야. 나는 네 할…….”
말을 하다 말고 허영주가 흠칫하더니 뒤에 서 있는 윤 실장의 눈치를 살폈다.
“어쨌든 난 모르는 사람 아니야. 네 이름이 우주인 것도 알고 있는 걸.”
“어? 우주를 알아요?”
“그래. 나는 네 엄마 친구……. 아니, 친한 사람이야!”
허영주의 궤변에 윤 실장은 혀를 찼다.
반면 아직 어린 우주는 제 이름도 아는 데다, 엄마 친구라 하자 경계가 풀린 모양이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허영주가 고사리 같은 두 손에 과자를 꼭꼭 들려주었다.
무어라 말을 더 걸려는 찰나, 쉬는 시간이 끝났다는 벨이 울렸다.
“어! 우주 들어가 봐야 해요. 과자 고맙습니다. 예쁜 할머니.”
“예…… 예쁜 할머니?”
허영주가 그 말에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미처 더 대화를 나눌 새도 없이 우주는 다시금 배꼽 인사를 건네곤 잎새 어린이집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문이 닫히고 우주의 모습이 아예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허영주는 눈을 떼지 못했다.
꼭 귀신에게 홀리기라도 한 듯 허영주가 넋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쟤가 채하 아이라고…….”
*
“엄마~ 우주 어린이집 갔다 왔어요!”
“나도 다녀왔어.”
현관에 함께 들어서는 부자를 보며, 설원이 읽고 있던 책을 덮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 같이 와요?”
“당연히 내가 어린이집에서 데리고 왔지. 선생님들도 당신보다 내 얼굴을 더 익숙하게 여기는 것 같던데.”
“당신이 너무 자주 가니까 그렇죠.”
“안 될 건 없잖아? 어때, 꼬마. 네가 대답해 봐. 대왕 아저씨가 데리러 가는 거 좋아, 안 좋아?”
“엄청 엄청 좋아요! 대왕 아저씨가 오면 우리 선생님들이 전부 다 나와서 쳐다봐요!”
“…….”
우주의 순수한 말에 담긴 뜻이 무언지 알아챈 설원은 괜스레 흠칫했다.
어딜 가도 눈에 확 띄는, 권채하는 본디 그런 남자니까.
“들었지? 우주는 내가 오는 게 좋다는군.”
“……저녁이나 들어요. 아주머니께서 조금 전에 차려주고 가셨어요.”
“마침 배고팠는데 잘 됐군. 자, 우주. 가방 이리 줘.”
“네! 대왕 아저씨!”
우주가 자연스럽게 어린이집 가방을 어깨에서 벗어 채하의 손에 건넸다.
“우리 꼬마, 입가에 뭐가 이렇게 잔뜩 묻었어.”
이어 더 자연스럽게 채하가 우주의 입가를 손으로 슥 닦아냈다.
그러자 마침 떠올랐다는 듯 우주가 해맑게 재잘거렸다.
“있잖아요. 오늘 예쁜 할머니가 우주한테 과자를 이따만~큼 주고 갔어요!”
“예쁜 할머니?”
“응! 엄청 엄청 맛있는 과자였어요!”
그 말에 채하가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앉더니, 우주와 눈높이를 맞췄다.
“꼬마.”
“네!”
“앞으로는 모르는 사람한테 그런 거 받으면 안 돼. 그 예쁜 할머니가 어쩌면 아주아주 나쁜 사람일지도 모르잖아.”
“응~ 근데 예쁜 할머니 나쁜 사람 아니에요! 엄마 친구라고 했어요!”
우주의 해명에 설원이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엄마 친구? 외국인이야?”
“아니에요. 한국 할머니예요.”
“……흠. 누구지?”
설원에게 딱히 친구랄 사람은 없는 걸 잘 알고 있는 채하의 미간이 더욱 심각하게 좁아졌다.
그가 찹쌀떡 같은 우주의 볼을 가볍게 꼬집으며 나름 엄한 어조로 주의를 주었다.
“어쨌든 조심해. 꼬마. 어린이들은 항상 과자를 주는 사람을 경계해야 하는 법이야.”
“알았어요! 우주 대왕 아저씨 말 잘 들을 거예요.”
우주가 방글방글 웃는 걸 보자 채하와 설원도 결국 긴장을 풀었다.
아무래도 어린이집이 주택가에 있다 보니, 지나가던 이웃 할머니가 과자를 준 모양이었다.
“그런데 과자는 어디 있어, 우주야? 이따만큼 받았다며.”
설원이 남은 의문점을 아이에게 묻자, 우주가 흰 이를 드러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어린이집 친구들하고 다 나눠 먹었어요!”
그 대답에 채하의 손이 우주의 밤톨처럼 동그란 머리통을 기특하단 듯 쓰다듬었다.
“누구 아들인지 크게 될 인물이야. 자, 그럼 이제 손 씻고 밥 먹자.”
“네! 대왕 아저씨!”
채하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서자 우주가 냉큼 작은 손으로 그의 손을 붙들었다.
그러고는 쪼르르 함께 세면대로 향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설원의 가슴 속에 문득 묘한 기분이 밀려왔다.
남편으로서의 권채하도 어색한 존재인 건 매한가지였지만, 아빠의 모습은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결코 꾸며낸 게 아니란 것쯤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우주에게 진심을 다하고 있다는 건 누구보다 엄마인 제가 잘 알았다.
그동안 재윤도 우주를 친아들처럼 잘 대해주었지만, 둘의 모습을 볼 때 이런 기분이 든 적은 없었다.
역시 채하가 우주의 진짜 아빠라서일까.
둘이 붙어 있는 모습만 보아도 설원의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애틋한 감정이 치밀어올랐다.
‘이래선 안 돼.’
쏴아아, 우주의 손을 씻기는 물줄기 소리에 설원은 자신의 부질없는 바람을 함께 씻어냈다.
이런 행복은 신기루나 다름없다.
어차피 그녀와 우주는 약속한 날짜가 되면 섬으로 돌아가야 할 테니까.
행여 채하를 아빠로 여기지 않도록, 설원은 후에 우주에게 단단히 당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게 결국은 그들 모자를 위한 일이니.
*
그 주 주말, 반가운 손님이 집에 방문했다.
“이거, 정말로 오랜만입니다. 작은 사모님. 무사히 돌아오신 걸 보니 기쁘기 그지없군요.”
주름이 자글자글해진 얼굴로 인사를 건네온 사람은 바로 정 비서였다.
채하의 오랜 수행비서였던 그는 모진 3년간의 결혼 생활 동안 유일하게 설원에게 잘해주었던 사람이었다.
허영주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그녀를 챙겨주었고, 무심한 채하 대신 말 상대가 되어주었던.
다시 볼 수 없을 줄만 알았던 그를 다시 보자, 설원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설원은 힐끔 옆에 서 있는 채하의 눈치를 살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두 손을 부여잡고 싶었지만, 지금은 모른 척하는 게 최선일 터였다.
어색하게 머뭇대는 사이 정 비서가 먼저 상황을 무마해주었다.
“참, 기억이 없으시겠군요. 전해 듣고도 깜박했지 뭡니까. 저는 부사장님과 오랫동안 동고동락한 사이입니다. 이쪽은 제 아들이고요. 인사해라.”
“안녕하세요. 작은 사모님은 처음 뵙네요. 정일환이라고 합니다.”
정 비서와 꼭 닮은 젊은 아들이 붙임성 있는 태도로 꾸벅 인사를 건넸다.
무척이나 싹싹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앞으로 저 대신 부사장님을 모셨으면 하는데, 어떻습니까?”
“아드님께서요?”
채하가 다소 어리둥절한 눈빛을 하자, 정 비서의 아들이 쾌활하게 답했다.
“예. 아버지께 듣자 하니 비서들이 줄줄이 그만둬서 마땅한 수행비서가 없는 상황이라면서요.”
“제 아들이지만, 일은 야무지게 잘할 겁니다. 어떻습니까. 부사장님?”
“정 비서님 아드님이면 당연히 나무랄 데 없죠. 좋습니다. 저도 마침 믿을 만한 사람을 곁에 두고 싶은 참이었으니까요.”
그렇게 순식간에 대를 이어 채하의 수행비서가 결정되었다.
어른들끼리 이야기를 하고 있던 그때, 인기척을 감지한 우주가 계단을 폴짝폴짝 뛰어 내려왔다.
그러자 정 비서 부자의 시선이 동시에 그쪽으로 향했다.
“오. 저 아이는……?”
“제 아들입니다.”
우주가 듣지 못하는 거리에서, 채하가 아주 단호한 말투로 선언했다.
마치 그 말을 하고 싶어 벼르고 별렀던 사람처럼.
설원의 가슴이, 순간 몹시도 따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