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의심과 압박
(22/111)
22. 의심과 압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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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의심과 압박
2022.10.16.
“아버지가 오늘 집에 좀 들르라고 하신다.”
퇴근길, 허영주의 일방적 통보에 채하는 본가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설원과 우주에게 줄 고급 디저트를 기껏 줄까지 서서 샀건만, 달갑지 않은 부름이었다.
특히나 이런 타이밍의 호출이니만큼 용건도 예상이 갔고.
예상대로 집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달려 나온 허영주는 그를 향해 정신없이 쏴대기 시작했다.
“얘, 채하 너! 나한테 제대로 설명 좀 해 봐! 대체 그 여자, 어디서 나타난 거야?”
“어머니.”
“감쪽같이 우리도 모르게 집에다 데려다 놓고, 너 대체 무슨 속셈이니? 하필 사라까지 그 꼴을 같이 봐서 사달이 났다고! 내가 변명하느라 얼마나 애쓴 줄 알아? 응?”
“아버지는요?”
“얘 좀 봐? 너 내 말에 대답 똑바로 안 할 거야?”
“왔냐. 거기 앉아라.”
“예.”
제 항의가 완전히 무시당하자 허영주가 분에 겨워 발을 동동 굴렀다.
그녀는 들어가 있으라는 권강호 회장의 만류를 기어코 거부하곤, 두 사람 사이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왜 부르신 겁니까? 일 관련이라면 회사에서 말씀하셔도 될 텐데요.”
“일 관련인 건 맞지만, 사적인 얘기도 좀 할 필요가 있어서 집으로 불렀다.”
“그래! 그 여자 때문에…….”
“당신은 조용히 있어. 자꾸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방으로 들어가고.”
서슬 퍼런 권 회장의 눈총에 허영주가 마지못해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권 회장이 채하를 향해 본격적인 용건을 꺼냈다.
“백영에서 리조트 부지 건으로 압박을 해 왔다.”
“그렇습니까?”
“그쪽이 보유한 부지가 사실상 일 순위 후보이긴 했지. 백영 건설에서도 오래전부터 낙점해뒀던 알짜배기 땅이니까.”
“뭐라던가요?”
“혼인 건에 대해 빠르게 답을 주지 않으면, 경쟁사에 그 부지를 넘기겠다는구나.”
권 회장의 말투는 무척이나 덤덤했다. 그리고 채하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예상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군요. 어차피 그걸 주겠답시고 제안해왔을 때부터, 여차하면 약점으로 쥐고 흔들 거란 건 알고 있었습니다.”
“듣자 하니 그 아이를 찾았다면서.”
“예. 5년 만에 아주 힘겹게 찾아냈습니다. 정말 꼭꼭 숨어 있더군요.”
“살아 있었다니 다행이구나.”
두 부자의 대화를 듣고 있는 허영주의 표정에서는 못마땅함이 감춰지질 않았다.
설원이 이 집의 며느리로 있을 때도, 권강호 회장은 비록 따사롭진 않았어도 그녀를 엄연한 채운 가의 일원으로 대했었다.
허영주가 아무리 길길이 날뛰어도 그는 재계의 집안 행사가 있으면 빼놓지 않고 설원을 대동시켰다.
게다가 귀에 딱지가 앉도록 채운의 며느리는 백사라라는 사실을 주입해도, 권 회장은 딱히 백사라를 마음에 들어 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가 백영과는 오로지 사업 관계로만 남고 싶다고 늘 선을 긋는 바람에 허영주는 빠르게 일을 진행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새에 민설원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여자가 나타나 채하의 곁을 채간 것이다.
“어쩔 작정이냐?”
“어느 쪽을 물으시는 겁니까? 백영, 아니면 제 아내?”
“둘 다 채하 네 의견이 궁금해서 불렀다.”
권강호 회장의 묵직한 눈빛이 마치 시험이라도 하듯 채하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당연히 채하로서는 답을 망설일 필요가 조금도 없었다.
“백영이 그런 식으로 나올 거란 건 예상했습니다. 그래서 애초에 다른 부지들을 후보로 봐두고 있었고요. 위치며 지가며 충분히 괜찮은 곳들이 여럿 있습니다.”
“잘했구나.”
“예측 가능한 문제에도 대비하지 못한다면, 채운에 제 자리가 있을 필요가 없죠.”
만족스러운 듯 권 회장이 잠시 숨을 돌리며 차를 음미했다.
그 사이 채하는 어머니 허영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두 번째 대답은 그녀를 향해서라는 것처럼.
“제 아내에 대해서는 당연히 제가 책임질 겁니다.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지만, 저희 사이에는 이미 아이도 있고요.”
“너…… 권채하! 아이라니? 감히 누가 누구 아이라는 거야!”
“원하시면 어머니께도 보여드리죠. 친자 확인 검사 결과지 말입니다.”
“여, 여보! 당신 뭐라고 좀 해 봐요! 어디서 누구 애인지도 모를 애를 데리고 와서……!”
“친자 확인 검사를 끝냈다는데, 우리 채하 아이가 아니면 누구 아이란 말인가? 당신은 말 좀 가려서 해. 어째 나이가 들수록 사람이 품위가 없어지나.”
매서운 눈초리로 권 회장이 허영주를 째려보았다.
그에 개의치 않고 채하는 묵묵히 제 할 말을 이어갔다.
“저한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새 리조트 설립이 아니라, 제 아내에게 5년 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내는 겁니다.”
“……!”
권강호 회장의 눈초리에 푹 숙였던 허영주의 고개가 다시 퍼뜩 들렸다.
숨길 수 없이 파들파들 떨리는 눈동자에는 모종의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왠지 모르게 아내의 사고가 단순한 사고가 아닐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요.”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채하 너? 그 여자는 자기 차랑 같이 방파제 아래로 추락했잖아!”
“그랬죠. 세상에 알려진 대로라면요.”
“뭐, 뭐가 또 있다는 거야?”
“아내를 잃은 슬픔에 몇 가지 간과했던 점들이 새삼 눈에 보여서 말이죠. 왜 차는 끌어 올려졌는데 블랙박스만 사라졌는지, 왜 아내의 사고 직후 장모님까지 세상을 떠나셨는지.”
“블랙박스 같은 건 당연히 물에 빠져서 없어졌겠지! 그리고 네 장모인지 뭔지는 어차피 오늘내일하던 사람이었잖아!”
또다시 저도 모르게 저급한 발언을 내뱉은 허영주가 남편의 눈치를 보며 황급히 입을 닫았다.
그러자 채하가 서늘하게 목을 긁으며 낮게 읊조렸다.
“이상하군요. 어머니는 꼭 제 아내가 사고였다고 주장하고 싶으신 것 같네요.”
“그게 아니라……!”
“뭐, 됐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어머니를 추궁할 것도 아니고요. 아들 된 도리로서 그래서야 쓰겠습니까. 하지만.”
“…….”
“그건 어디까지나 어머니께서도 어머니의 도리를 해주셨을 때 이야기겠죠.”
팽팽한 긴장이 그들 사이에 맴돌았다.
권강호 회장은 좀처럼 생각을 읽기 어려운 표정으로 두 모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살벌한 긴장감에 서둘러 마무리를 지으며, 채하는 마지막 한마디를 던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만일 어머니께서 도리를 저버리는 일을 하셨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부들부들 떠는 어깨를 감추지 못하는 허영주를 뒤로하고, 그는 채운 가에서 빠져나왔다.
초여름의 공기에 탁한 한숨이 섞여 터져 나왔다.
“하…….”
떠보려고 던진 말이었지만, 허영주의 반응은 지나치게 투명했다.
역시 5년 전 설원의 사고에는 제 어머니가 연관되어 있음이 틀림없었다.
다만 심술은 많아도 그 심술을 그저 일차원적인 행동으로밖에 옮길 줄 모르는 그녀가, 치밀하게 일을 꾸몄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백사라…….”
설원의 죽음으로 이득을 얻을 사람. 그녀의 존재를 제 어머니만큼이나 눈엣가시로 여겼던 사람. 그건 바로 백사라였다.
디저트가 들어 있는 종이봉투를 쥔 채하의 손에 시퍼런 핏줄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설원이 기억을 못 하는 척하는 이유가 그토록 무심하고 무정했던 저 때문이라고만 여겼다.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모종의 무언가가 있다는 확신은 커져만 갔다.
허영주, 백사라.
그녀를 제 세상에서 사라지게 한 게 두 사람이라면.
그게 설령 어머니라 할지라도 채하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녀가 없던 지난 5년간이 그에게는 지옥보다 더한 지옥이었기에.
*
“윤 실장. 내가 시킨 건 알아봤어?”
“예. 사모님. 여기 가지고 왔습니다.”
“얼른 이리 줘 봐.”
허영주가 탁자에 놓아둔 안경을 끼곤, 자신의 수족인 윤 실장이 건넨 물건을 앙칼지게 낚아챘다.
그녀의 의뢰 물품은 다름 아닌 채하 아들의 사진이었다.
“문 앞에서 지키고 있다가 오늘 아침에 몰래 찍은 겁니다.”
“…….”
“이름은 우주라고 부르더군요.”
“우주?”
허영주는 자그마한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 아이가 채하의 아들이라고?
확실히 눈매나 콧대, 전체적인 분위기가 채하가 어릴 때 모습을 많이 닮은 것 같았다.
어릴 때부터 지나치게 의젓했던 채하와는 달리, 어린애다운 순수함으로 방글방글 웃고 있는 아이의 사진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더 큰 사진은 없어?”
“네?”
“윤 실장. 나 눈 안 좋은 거 알잖아. 좀 크게 뽑아왔어야지!”
“그래도 아이 얼굴만 확대한 거라 잘 보일 텐데요.”
“하여간 요즘 윤 실장 일 처리가 꼭 하나씩 부족하다니까.”
콧방귀를 뀌며 허영주가 사진을 향해 고개를 더 바짝 들이밀었다.
오목조목 또렷한 이목구비를 보면 볼수록 채하의 어릴 때 모습과 겹치는 것 같았다.
그때만 해도 제 말이라면 넙죽 잘 듣던 아들이었는데, 새삼 분이 치밀었다.
“흥! 어디 그따위 천한 여자가 낳은 애를 채운의 손주라고 인정할 것 같아?”
대리석 탁자에 사진을 던지듯 내려놓고는, 허영주가 고고하게 양 팔짱을 꼈다.
불쾌함 가득한 그녀의 기색에 윤 실장이 사진을 거둬가려는 찰나였다.
“이 애, 어린이집에 다니는 거야?”
“아, 예. 등원할 때 찍은 겁니다. 멀지 않은 곳으로 다니는 것 같더군요.”
“어딘데?”
“네?”
윤 실장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허영주의 안경 너머를 살폈다.
뒷조사에 특화된 그의 특성상,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은 물론 파악해둔 참이었다.
다만 안 그래도 아이의 존재를 거슬려하는 이 사모님에게 굳이 그런 세세한 정보까지 건넬 의향이 없었을 뿐.
그가 대답을 하지 않자, 허영주는 도수 높은 안경을 벗고는 눈알을 부라렸다.
“어디 어린이집에 다니냐니까, 이 아이?”
“아……. 잎새 어린이집이랍니다.”
“가자.”
“네?”
“눈이 침침해서 사진이 잘 안 보여. 내가 직접 가서 진짜 채하 애가 맞는지 똑똑히 확인해야겠어.”
그리하여 한 시간 뒤, 윤 실장과 허영주는 잎새 어린이집 앞에 도착했다.
안경 대신 선글라스를 쓴 허영주가 고개를 쭉 빼고는 문을 살폈다.
“이제 곧 놀이터에서 놀 시간이라고 하지 않았어? 왜 안 나와?”
“곧 나올 겁니다. 사모님. 조금만 더 기다려보세요. 그렇게 자꾸 앞으로 나가지 마시고요. 그러다 들키겠어요.”
“앞으로 나가긴 누가 나갔다고 그래?”
허영주가 저를 만류하는 윤 실장의 손을 짜증스럽게 뿌리쳤다.
그러자 윤 실장이 보란 듯이 한숨을 내쉬곤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직접 본다고 뭐가 달라집니까, 사모님. 어차피 부사장님께서 친자 확인 검사까지 다 끝내셨다면서요.”
“모르는 소리 하지 말아! 채하 걔가 얼마나 무서운 놈인데. 내 아들이지만 정말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그 결과지인지 뭔지도 조작했을지 모르지!”
“그럴 리가요. 부사장님이 자기 아들도 아닌데 데려올 위인이십니까, 어디?”
“어쩌면 민설원 그 계집애가 채하 아들이라고 거짓말하는 걸 수도 있잖아! 그랬다간 진짜로 큰일이지! 내 눈으로 확실히 봐야 알 수 있어!”
거의 망상에 이르고 있는 허영주를 윤 실장이 탄식하며 달랬다.
그도 아까 사진을 본 바 있었고, 보자마자 한눈에 권채하의 아들이라는 걸 확신했으니까.
“그래서, 보시면 어쩔 건데요? 진짜로 부사장님과 작은 사모님 아들이면요?”
“당연히 한 대 쥐어박아 줘야지. 그 여자 아들을 내가 그냥 두고 볼 거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