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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사랑하는 사이 (21/111)


21. 사랑하는 사이
2022.10.12.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진 것이 기뻤는지, 우주의 동그란 볼에 홍조가 피어났다.


“우주 잘했어요?”

“그래. 아주 탁월한 시점을 본능적으로 아는군. 당신도 들었지?”

“…….”

난감한 표정의 설원과는 달리 채하의 입꼬리에는 흡족함이 가득했다.

흡족해하는 것은 직원과 카메라맨도 마찬가지였다.

웨딩 촬영에 아이가 있는 경우는 드문지라 우려했는데, 이 귀여운 아이는 분위기 메이커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 그들은 두 사람을 냉큼 다음 세트장으로 데려갔다.


“좋습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키스 신 가보겠습니다! 우선 두 분 마주 보시고요!”

아까도 수없이 마주 보긴 했지만, 이번엔 뭘 할지 예고가 되어 있기에 설원의 뺨은 붉어질 대로 붉어졌다.

아무리 촬영이라 해도 우주 앞에서 그와 키스라니.

게다가 입을 맞추려면 채하를 올려다봐야 하는데, 눈꺼풀은 자꾸 아래로만 향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채하의 낮은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눈 피하지 마. 당신 내 앞에서 그렇게 수줍은 듯이 눈 내리깔면.”

“…….”

“더 입 맞추고 싶어지거든.”

그렇게 말하곤 채하는 고개를 훅 숙여 설원의 입술에 제 입술을 겹쳤다.

아주 가볍게 맞닿았음에도 순간의 열기는 그녀의 머릿속을 아찔하게 잠식했다.


“와! 엄마랑 대왕 아저씨랑 뽀뽀했어요~ 뽀뽀!”

“그래. 꼬마. 잘 봐둬라. 너도 나중에 커서 멋진 남자가 되면 이렇게 해야 해.”

“애한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 당신 표정은 아주 좋은데, 왜.”

“내가 언제…… 엇!”

설원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찰나, 채하가 한 번 더 그녀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내렸다.

닿기 전에 속삭이는 것도 잊지 않고서.


“부끄러울 거 없어. 우린 날마다 이렇게 입을 맞췄으니까.”

이번에는 빠르게 떨어지지도, 살짝 닿지도 않았다.

채하의 입술이 설원의 입술을 온전히 머금은 채 단단히 맞물렸다.


“……!”

“이야! 우리 신랑님 아주 저돌적이십니다. 좋아요! 그렇게 조금만 더! 네네, 완벽합니다!”

이런 모습을 아직 어린 우주 앞에서 보여줘도 되는 건지.

그러나 이성은 모두 그의 뜨겁고 부드러운 입술로 인해 날아가고 말았다.

웨딩 촬영은 정말이지 힘겹게 끝났다.


 
반면 이어진 가족 촬영은 우주의 재롱 덕분에 무척이나 수월했다.

채하가 일부러 간지럼을 태우지 않아도, 아이의 환한 미소에 저절로 웃음이 피어올랐으니까.

우주가 좋아하는 걸 보고 있으니 저마저 동화되는 기분이었다.

덕분에 아주 오랜만에 설원은 평온함과 행복이라는 감정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렇게 다소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촬영은 무사히 끝났다.

직원들이 세트장을 정리하는 사이 설원은 탈의를 위해 먼저 드레스룸으로 돌아왔다.

아까부터 너무 밀착해 있던지라 채하와 같은 공간에 한시라도 더 있는 게 숨 막혔기 때문이었다.

어깨와 가슴이 훅 파인 옷이니만큼 벗는 게 그다지 어려울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생각은 오산이었다.

뒤쪽 지퍼가 얼마나 단단히 여며져 있는지, 아무리 손을 뻗어 내리려 해도 지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애꿎은 팔만 계속 허우적대고 있던 그 찰나였다.

갑자기 채하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내가 해 줘?”

“……권채하 씨? 여긴 왜 들어왔어요?”

“난 벌써 끝냈거든. 갈아입는 거야 일 분이면 되니까. 그보다 혼자 버거워 보이는데 내가 내려줄게.”

“아니, 괜찮아요. 혼자 할 수 있어요.”

“혼자 못 하고 있잖아.”

더 이상의 반박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그의 손이 등 뒤에 닿았다.

차가운 지퍼와는 완전히 다른 뜨거운 감촉에 설원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부부 사이에 뭘 그리 긴장해. 방금 키스도 했는데 겨우 이 정도를 가지고.”

키스라는 단어에 설원의 뺨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아무리 촬영 때문이라지만, 그와 입을 맞춘 건 사실이었으니.

채하가 등 뒤에 서 있는 것이 다행이라 여기며, 설원은 애써 덤덤한 척 대꾸했다.


“누가 긴장했다고 그래요. 빨리 지퍼나 내려줘요.”

“알았어. 내려줄 테니 반듯하게 서 봐.”

“…….”

다소 의심스러웠지만, 설원은 그가 시키는 대로 순순히 자세를 바로 했다.

한데 채하는 곧장 지퍼를 내리는 대신 그녀의 어깨를 천천히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어쩐지 순수하게만 느껴지지 않는 손길에, 설원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뭐 하는 거예요.”

“갑자기 궁금해져서 말이야. 주치의의 처방이 조금은 효과가 있었는지.”

“효과요?”

“그래. 웨딩 촬영도 하고 예전만큼 진하게는 아니지만 입도 맞춰봤잖아. 어때? 이러니까 우리의 열렬했던 부부 생활이 떠오르지 않아?”

열렬한 적이 없었으니 떠오를 리가 만무했다.

설원은 그의 능청스러운 거짓말에 속지 않으려 애쓰며 보란 듯 어깨를 꼿꼿이 세웠다.


“……딱히 떠오르는 거 없어요.”

“흠. 그렇단 말이지.”

그는 별반 실망하는 기색을 비치지 않았다.

대신 한층 더 간지러운 손길이 목덜미 뒤를 스쳤다.


“할 수 없군. 우리 관계가 기억나도록 내가 더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수밖에. 그래서 말인데”

“네? 읏……!”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설원이 다시 움츠리려는 찰나였다.

채하가 그녀의 몸을 제 쪽으로 돌리더니, 턱을 가볍게 들어 눈을 마주쳤다.

아직 상기되어 있을 게 분명한 설원의 뺨 위로 그의 시선이 내려앉았다.

잠시 그대로 응시하더니 채하가 나른한 음성으로 속살거렸다.


“사실은 당신을 유혹하려고 여기 들어온 거거든.”

“유혹……?”

“그래. 유혹.”

그렇게 답하는 그의 표정은 말 그대로 지독하게 유혹적이었다.

입가에 미소를 건 채로 그가 본론을 꺼냈다.


“민설원. 이제 그만 나와 같은 방을 쓰는 게 어때?”

“……말했잖아요. 우주가…….”

“우주는 야광별을 달아주면 혼자 잘 용의가 있다고 나랑 이미 약속했어.”

“그건…….”

곤란한 표정의 설원이 다른 핑곗거리를 찾는 것을, 채하는 두고 보지 않았다.


“뭘 그리 망설이는 거지. 말했잖아. 우린 매일 밤 같이 잤다고. 그것도 딱 붙어서.”

“…….”

“난 당신 남편이고, 당신은 내 아내야. 부부가 한 침대를 쓰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이리저리 굴러가고 있던 설원의 눈알이 결국 채하를 향해 고정되었다.

그러자 그가 입꼬리를 한껏 더 끌어올리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에, 도무지 더 이을 변명이 없었다.


“그리고.”

이윽고 그의 입술에서 믿기 힘든 말이 흘러나왔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엔 더더욱 당연한 일이지.”

 

*

돌아오는 길, 피곤했는지 우주는 차에 타자마자 뒷좌석에서 곤히 잠들었다.

한편 조수석에 앉은 설원은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었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

두 사람의 관계를 채하는 그렇게 표현했다.

사랑……. 과연 그 단어가 둘 사이에 어울리기나 할까.

소복 눈 내리던 겨울.

한 침대에서 뜨거운 열기를 나누었지만, 그 행위에조차 사랑이 있을 거라 여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 만큼 채하가 던진 말은 설원의 가슴에 세찬 파문을 일으켰다.

정말로 그와 나눌 수 있는 게 사랑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평범한 부부로 지내면서 마음을 나누는, 그런 사이일 수 있다면.

하지만…….


‘정신 차려. 민설원.’

설원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곳에 돌아오자마자 마주쳤던 허영주와 백사라가 이 순간 떠오른 탓이었다.

그들은 결코 그녀가 채하의 곁에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터였다.

예전에도 그렇게 지독하게 굴었던 사람들인 만큼, 지금은 더욱이 방심할 수 없었다.

이젠 우주까지 곁에 있지 않은가.

그녀에게는 세상 그 무엇보다 귀한 아이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정확히 3개월을 채우고 나면 권채하와의 길었던 계약 결혼은 마침내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죽기 전에는 그를 잊을 날이 오겠지.

설령 잊지 못하더라도 그런대로 살아갈 수 있겠지.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세상의 진리는 설원도 비껴가지 않을 터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표정이 어두운데.”

“권채하 씨.”

명백히 거리감이 느껴지는 무미건조한 말투에, 채하가 미러 너머로 그녀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마주하지 않으려 애쓰며 설원이 힘겹게 말을 꺼냈다.


“다시 한번 확실하게 말하지만, 나와 우주는 약속대로 3개월이 지나면 떠날 거예요.”

“그게 내가 아까 한 유혹에 대한 대답인가?”

“……재윤 씨한테 당신이 누군지 듣고 난 뒤에, 그러니까 당신이 내 남편이고 우주의 아빠라는 사실을 듣고 난 뒤에 나도 조금 찾아봤어요.”

“뭘 말이지?”

“기사에서 봤어요. 조만간 백영 그룹의 막내딸 백사라와 혼인할 사이라고…….”

“민설원.”

고저 없는 음성에선 오롯이 맹렬한 분노만이 드러났다.

핸들을 쥔 손마디에 핏줄이 곤두섬과 동시에 채하가 입술을 짓씹었다.


“내 호적에 당신이 멀쩡히 내 아내로 되어 있는데, 내가 또 누구랑 결혼을 한다는 거지? 오늘 이 웨딩 촬영은 왜 했다고 생각하는 거고?”

“권채하 씨.”

“말했을 텐데. 나는 민설원, 당신을 위해 모든 걸 다 할 거라고. 그리고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오로지 기억을 찾는 것, 그거 하나뿐이야.”

무어라 더 대꾸하지 못하는 설원을 향해 채하가 마지막 일침을 가했다.


“이참에 우주도 호적에 올리도록 하지. 사실 당장이라도 그러고 싶었지만, 많이 참은 거야. 하지만 당신이 나한테서 도망갈 궁리만 하는 것 같으니, 나로서도 둘을 묶어둘 궁리를 좀 해야 할 것 같군.”

“…….”

“민설원. 당신은 내 거야. 이젠 그 어디로도 못 달아나.”

왜일까. 소유욕이 그득히 드러나는 그 말에,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아 설원은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정말로 그의 곁에 머물 수 있다면, 이렇게 괴로워할 필요도 없을 테니까.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채하는 우주와 셋이서 찍은 가족사진을 거실 한가운데 떡하니 걸어놓았다.

누가 봐도 둘은 부부고, 셋은 가족이었다.

사진 속의 행복한 미소를 낯선 듯 바라보며 설원은 가슴이 따끔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 사진 속의 미소를, 행복을 누구보다 간절히 원하는 건 바로 그녀 자신이었기에.

*



“정 비서님.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십니까?”

[이거 우리 부사장님 아니십니까? 소문은 들었습니다. 제가 안 그래도 곧 찾아뵈려던 참입니다. 작은 사모님이 돌아오셨다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죠.]

“언제든 환영이죠. 다만, 오실 때 가져오셔야 할 정보가 좀 있습니다.”

[이 늙은이의 정보 수집력이 예전만 못할 텐데요.]

“아뇨. 정 비서님이야말로 가장 적임자일 겁니다. 5년 전, 저희 어머니하고 백사라의 동향을 좀 조사해 주세요.”

[큰 사모님과 백영 그룹 백사라 양 말입니까?]

“네. 사소한 것 하나도 빼놓지 말고 철저하게 부탁드립니다.”

전화를 끊은 뒤 채하는 홀로 침대에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제게 시종일관 거리를 두며 조심스러워하는 아내, 민설원.

분명 기억을 다 하고 있으면서 어설프게 기억을 못 하는 척하고 있는 민설원.

그 배경을 파헤치는 일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시급해 보였다.

꽉 닫혀버린 그녀 마음의 문을 열기 위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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