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뽀뽀는 언제 해요?
(20/111)
20. 뽀뽀는 언제 해요?
(20/111)
20. 뽀뽀는 언제 해요?
2022.10.09.
웨딩 촬영은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바로 그 주 주말, 웨딩카로 재탄생한 채하의 세단을 타고 설원과 우주 일행은 스튜디오로 향했다.
“왜 사람이 아무도 없죠?”
그들을 반기는 직원 외에는 텅 빈 스튜디오를 둘러보며, 설원이 어리둥절한 듯 중얼거렸다.
그러자 채하가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표정으로 덤덤히 대꾸했다.
“내가 통째로 빌렸으니까.”
“아…….”
“우와~ 엄청 엄청 멋지다!”
우주는 이미 각양각색의 세트장을 돌아다니며 감탄을 내뱉기에 바빴다.
“어린아이가 있다고 아이용 놀이터도 준비해달라고 했어. 우리 둘은 바쁠 테니까.”
우리 둘, 이라는 말을 어쩜 저리도 천연덕스럽게 하는지.
어색함을 감추려 설원은 짐짓 차분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웨딩 촬영. 설마 이런 걸 채하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혼인 신고만 했을 뿐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 무늬만 부부였던 터라, 그동안은 웨딩드레스를 입어 볼 기회조차 없었다.
한데 정말로 새신부가 된 것처럼 가슴이 제멋대로 설레는 바람에 난감할 정도였다.
때마침 나온 다른 직원이 두 사람을 드레스 셀렉트 룸으로 안내했다.
솔직히 채하는 지금 차림 그대로 촬영해도 될 만큼 근사했지만, 차마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신부님은 이쪽으로 들어오세요.”
괜히 쑥스러운 기분에 설원은 후다닥 셀렉트 룸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들어가자마자 우주처럼 감탄사를 입 밖으로 내뱉고 말았다.
“우와…….”
“예쁘죠?”
직원이 생긋 웃으며 한쪽에 가득 걸려 있는 드레스들을 손으로 가리켰다.
“보통은 스튜디오에 구비된 촬영용 드레스를 쓰시는데, 여기 걸린 것들은 전부 신랑님께서 따로 신부님을 위해 준비하신 거랍니다.”
“네?”
무슨 소린가 싶어 설원이 퍼뜩 드레스로부터 시선을 돌려 직원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직원은 더욱 흐뭇함을 감추지 않으며 생글거렸다.
“신부님께 어울릴 것 같은 드레스들을 직접 주문하셨대요. 어디 보자. 사이즈도 꼭 맞을 것 같네요. 바스트랑 허리랑……. 신랑님 눈썰미가 아주 훌륭하세요!”
“어, 얼른 입어볼게요!”
“호호. 네네. 신부님 설레는 마음 이해합니다. 자, 어떤 것부터 입어볼까요?”
진심으로 민망한 나머지 설원은 직원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물론 설원의 몸매는 5년 전과 그다지 변한 게 없었다.
하지만 이젠 저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게 된 자신의 사이즈를, 남보다 멀어졌던 권채하가 이토록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기분이 이상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
“와! 우리 엄마 엄청 엄청 예쁘다!”
메이크업까지 끝낸 뒤 밖으로 나오자 마침 세트장 투어를 마친 우주가 쪼르르 달려왔다.
그 너머로 턱시도 차림의 채하가 이쪽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완벽하게 어울리는 핏에 머리까지 깔끔하게 넘긴 그의 모습은, 드라마를 촬영 중인 배우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저렇게 멋진 남자가 자신의 남편이었다니, 그 사실이 새삼스러워 설원은 뺨을 붉혔다.
“어떠세요? 신부님께서 몸매가 워낙 좋으셔서 우선 머메이드 스타일부터 입어봤어요. 허리가 잘록한데 또 골반도 있으셔서 너무 잘 어울리죠!”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채하의 불꽃 같은 시선만이 설원의 드레스 자락에 머물고 있을 뿐이었다.
읽기 어려운 표정에 괜히 초조해지고 있는 그때, 우주가 명랑하게 외쳤다.
“엄마 꼭 인어공주 같아요!”
“어머, 똑똑하기도 하지. 이 드레스가 바로 인어공주님이 입는 드레스란다~.”
직원이 어린이집 선생님 톤을 흉내 내며 칭찬해주자 우주는 신이 나서 어깨를 으쓱했다.
그제야 채하가 천천히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왜인지 한 걸음 한 걸음 그가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조여오는 기분이었다.
진짜로 결혼식을 올리는 것도 아닌데, 긴장하고 있는 자신이 설원은 우습기만 했다.
“예쁠 줄은 알았지만, 예상보다 더 예쁘네.”
“아……. 고마워요.”
이런 말도 던질 줄 아는 남자였던가.
민망해진 설원이 얼른 직원을 향해 재촉하는 눈빛을 보냈다.
다행스럽게도 마침 카메라맨이 그들을 첫 번째 세트장으로 안내해 주었다.
생전 처음 해 보는 웨딩 촬영은 그녀에게는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카메라맨과 직원, 옆에 서 있는 헬퍼까지 모두가 이 포즈 저 포즈를 정신없이 요구해댔다.
문제는, 모두 지나치게 채하와 바짝 붙어야 하는 데다 과하게 다정한 포즈라는 것이었다.
“자, 신부님 허리 감싸주시고요~.”
“신부님은 신랑님 가슴에 손 살포시 올려주시고, 네! 좋습니다!”
“마주 서서 이마를 붙이시고~ 그윽하게 서로 응시해주세요! 네~ 바로 그겁니다!”
완전히 진이 빠진 저와 달리, 채하는 요구 사항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다.
오히려 응용까지 해가며 더 몸을 밀착하는 통에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였다.
폭풍이 몰아치듯 한 텀이 지나간 뒤, 설원은 다른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이번에는 반응이 그야말로 열렬했다. 우주와 채하, 두 부자에게 모두.
“우와~ 우리 엄마 진짜 공주님이다!”
심플한 장식에 머리를 올렸던 아까와 달리, 설원은 등까지 닿는 머리를 반으로 묶은 뒤 반짝이는 티아라를 얹었다.
거기에 풍성한 자락이 돋보이는 벨 라인의 드레스는 설원의 곱고 가녀린 상체 라인을 고스란히 드러내 주었다.
그야말로 청순함과 섹시함이 공존하는 차림새였다.
이런 옷을 입은 적은 처음이라 설원은 저도 모르게 채하에게 괜찮냐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그의 강건한 눈빛이 아주 세차게 흔들렸다.
“엄마~ 우주, 공주님 엄마랑 결혼할래요!”
우주가 티아라 뒤로 길게 늘어진 롱 베일의 끝을 붙들고는 병아리처럼 재잘거렸다.
이런 엄마의 모습을 보는 게 아이의 눈엔 무척이나 신기한 모양이었다.
한데 채하의 눈에는 더더욱 묘하게 다가온 듯했다.
꽉 억눌린 잇새로 그의 낮은 음성이 마치 짐승처럼 흘러나왔다.
“안 돼. 엄마는 아저씨 거야.”
유치한 건지, 단호한 건지 모를 그 말에 설원은 대꾸할 틈을 놓쳐버렸다.
곧 정신이 든 듯 채하가 천천히 설원을 향해 다가왔다.
그러고는 그녀의 목덜미부터 쇄골, 그 아래 유난히 뽀얀 살결에까지 느릿하게 시선을 내렸다.
어쩐지 눈빛만으로도 그의 손길이 어루만지는 듯 야릇한 기분이 들어, 설원은 어깨를 움츠렸다.
“……그렇게 보지 말아요.”
“보라고 입었는데 안 보면 서운하지.”
“…….”
그의 타오르는 시선이 너무 위험해, 설원은 지금이 낮이고 그들의 방이 아닌 밖에 있다는 사실에 안심해야 했다.
맹목적인 그 눈빛은 당장이라도 그녀를 한입에 삼켜버릴 것 같았으니까.
“자, 그럼 다음 세트 촬영 진행하겠습니다!”
직원이 이 훈훈한 분위기를 놓칠 수 없다는 듯 두 사람을 얼른 세트장으로 안내했다.
한데 이번에는 카메라맨이 설원을 콕 찝어 요청을 해 왔다.
“신부님! 아까는 우아한 드레스라서 살짝만 미소 지으셔도 괜찮았는데, 이젠 좀 활짝 웃어주세요!”
“네……?”
“신부님께서 너무 수줍으신가, 통 활짝 웃질 않으시네요~.”
“아…….”
권채하의 앞에서 활짝 웃으라니. 그것도 거의 얼굴을 맞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거리에서.
당혹스러움에 설원은 애꿎은 손만 꼼지락거렸다.
그때였다. 대뜸 목덜미 뒤로 뜨거운 감촉이 느껴졌다.
채하가 또 그녀의 목덜미 뒤에 손을 집어넣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곧고 기다란 그의 손가락이 연약한 목덜미를 깃털처럼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풉, 무방비한 웃음이 설원의 입에서 저절로 터져 나왔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카메라맨이 마구 셔터를 눌러대며 만족감을 표했다.
“좋아요! 신부님 미소 백 점!”
이윽고 잔뜩 웃느라 진이 빠진 설원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완전히 당했다. 바보처럼 소리까지 내면서 웃고 말다니.
반면 채하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기색이었다.
민망함을 감추지 못하고 앉아서 쉬고 있는 그녀에게 그가 다가오더니, 귓가에 후 숨을 불어넣으며 속삭였다.
“사실 내가 거짓말했어.”
“……?”
화들짝 놀란 설원이 귓가를 떼어내며 채하를 휙 돌아보았다.
그의 입가에 능글맞은 미소가 가득 번졌다.
“목덜미에 손 넣는 거, 사실은 당신이 아니라 내가 좋아했던 거야.”
“네?”
무슨 소린가 싶어 설원은 빤히 그를 응시했다.
확실히 그녀는 간지럼을 많이 타긴 했지만, 기억하기로 그의 손이 제 목덜미에 닿았던 적은 딱 한 번뿐이었다. 그 하룻밤.
채하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더 위로 올라갔다.
그에게선 좀처럼 보기 힘든 짓궂음이 담겨 있는 미소였다.
“이유, 알려줄까?”
홀린 듯이 설원은 그의 미소에 시선을 붙박았다.
이윽고 채하가 귓불을 거의 머금을 기세로 입술을 바짝 붙이고는, 그 이유를 숨결과 함께 그녀의 귓가에 불어넣었다.
“당신이 간지럼을 탈 때 아이처럼 해맑게 웃는 거, 너무 예뻤거든. 볼 때마다 미쳐버리는 줄 알았어.”
……이것도 저를 놀리려는 거짓말인 걸까.
얼떨떨한 나머지 설원은 그의 입술이 진짜로 제 귓불에 닿은 것을 깨닫지조차 못했다.
그러다가 흠칫 솜털이 곤두서는 감각에 놀라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야 했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지금 당신 모습, 그게 얼마나 날 미치게 하는지 알려주고 있지.”
어디 가서 연애 교육이라도 받고 왔나 싶을 정도로 낯선 대사를 읊어대는 채하를, 설원은 거의 기함하듯 쳐다보았다.
곧 그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서며 설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커다란 손을, 설원은 새삼스레 내려다보았다.
이 남자의 손을 잡는다는 것이 제게 어떤 의미였는지, 그는 알까.
덜컥 잡아버린 손을 나중에는 얼마나 놓기 어려웠는지, 권채하는 알고 있을까.
“신랑님, 신부님! 그럼 촬영 이어가겠습니다~ 우리 아기님도 예쁜 양복으로 입고 왔어요!”
“엄마! 대왕 아저씨! 우주 나비넥타이도 했어요~.”
자칫 가라앉으려는 마음 사이로, 우주의 귀여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귀여운 아동용 턱시도를 입고 빨간 리본을 달고 나타난 우주에게 두 사람의 시선이 쏠렸다.
너무도 앙증맞은 모습에 넋이 나간 사이, 허공에서 머뭇대던 설원의 손을 채하가 냉큼 붙들어 우주에게로 데리고 갔다.
“이거, 우리 꼬마. 멋진 옷을 입었더니 인물이 확 사네. 누굴 닮아서 그런 건지.”
채하가 동글동글한 우주의 얼굴을 한없이 다정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우주 역시 그런 그를 순수한 눈망울로 빤히 응시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폭탄 같은 말을 투척했다.
“그런데 엄마랑 대왕 아저씨는 언제 뽀뽀해요?”
“……!”
놀란 설원이 붙잡힌 손을 움찔하자, 채하가 그녀를 한번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아이를 향해 다정하게 미소를 던졌다.
“우리 꼬마, 그게 갑자기 왜 궁금하지?”
“응~ 토끼반 선생님한테 들었는데 부부는 뽀뽀하는 거랬어요! 엄마랑 대왕 아저씨는 이 웨딩…… 결혼을 했으니까 부부잖아요!”
“똑똑하군. 아주 기특해. 중요한 진실에 도달하기까지도 머지않은 것 같군.”
그의 입매가 계속해서 느슨해지는 것이 어째 불안해, 설원이 우주의 말꼬리를 자르려던 찰나였다.
손을 더 꼭 붙든 채로 채하가 설원을 향해 뜨거운 시선을 던졌다.
“꼬마, 말 한번 잘 꺼냈다. 마침 이제부터 할 생각이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