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안겨도 되는데
(19/111)
19. 안겨도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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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안겨도 되는데
2022.10.05.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써 보자니…… 절대 그런 게 아니에요!”
“흐음. 그런 게 뭔데? 기억 안 난다는 사람치곤 꼭 선물이 뭔지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군.”
그답지 않게 순진무구한 목소리를 내며, 채하가 설원을 비스듬히 내려다보았다.
아차 싶어 설원은 얼른 변명을 이었다.
“그게 아니라…… 저 두 사람이 방금 당신이 말한 그런 걸 줬을 리가 없다는 뜻이에요.”
“어린애도 아니고, 부부 사이에 왜 제대로 말을 못 하지? 야한 거라고 말이야. 게다가 아까 두 사람 태도로 봤을 땐 더한 것도 줬을 것 같던데.”
“…….”
웃음기가 드리운 입술이 유난히 조명 아래 붉게 빛났다.
그 입술이야말로 그녀가 받은 선물보다 훨씬 야릇하게 느껴져, 뺨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그러자 채하가 피식 웃음꽃을 피우며 설원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우리 아내는 나하고의 야한 기억도 다 잊은 나머지, 지나치게 순진해진 것 같군.”
“나는…….”
“뭐, 좋아. 그것도 나름대로 잡아먹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아.”
“잡, 잡아먹다뇨? 이상한 말 하지 말아요. 권채하 씨.”
설원이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듯 화들짝 귓가를 떼어냈다.
이러다간 지금 당장 그에게 잡아먹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쯤 하면 놓아줄 거라 예상했는데, 채하는 다시 한 발짝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조금 전 머리카락을 넘겨버려 뽀얗게 드러난 목덜미 뒤로 커다란 손을 집어넣어 감쌌다.
“아……!”
갑작스러운 간질거림에 설원이 몸을 움츠리자, 채하가 가느다랗게 눈을 접으며 속삭였다.
“당신 이렇게 목덜미 뒤에 손 집어넣는 거 좋아했잖아. 기억 안 나?”
“……안 나요.”
“흠. 할 수 없군. 부끄러워할까 봐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뭘요?”
채하가 뜸을 들이자 설원은 불안함에 그를 재촉했다.
그러자 그가 정말 큰 비밀이라도 털어놓는 듯 진지한 얼굴을 하고 다시금 속닥였다.
“당신은 침대에서 참 적극적이었어. 덕분에 내가 늘 밤잠을 아껴가면서 당신을 만족시키느라…….”
설원의 눈동자가 더 커질 곳도 없을 정도로 커다래졌다.
아무리 제가 기억을 못 한다고 해도 그렇지, 이런 일까지 기억을 조작해버릴 줄이야.
억울하고 또 억울해 설원은 아랫입술을 살포시 깨물었다.
“아니에요. 나는…….”
하지만 그다음 말을 잇는 건 기억을 한다는 자백이나 다름없었다.
설원은 채하를 얄밉다는 듯 지그시 노려보았다.
겨우 딱 하룻밤을 보냈을 뿐인데, 그것도 충동적인 하룻밤을.
그런데 적극적이고 말고 할 새가 어디 있었단 말인가.
“꽤나 억울한 표정이네.”
채하가 빙긋 또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응시했다.
그의 손이 천천히 턱을 타고 올라와, 이번엔 설원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차갑기 그지없는 남자인데 손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따뜻했다.
“그런 표정으로 보면, 정말로 참기 어려워지잖아.”
“…….”
이윽고 옴짝달싹 못 하는 설원의 고운 뺨 위로, 채하의 붉고 뜨거운 입술이 내려앉았다.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애정 어린 입맞춤이었다.
비록 아주 짧게 스치고 떨어졌지만, 이 순간 설원은 키스보다 뽀뽀가 자극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뺨의 솜털이 곤두서는 게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였으니.
입술을 떼어낸 그가 아쉬움 가득한 눈빛을 보내며, 설원에게 말했다.
“기대할게. 당신이 나와의 밤을 기억해낼 날을 말이야. 로라와 제임스의 선물은 그때 쓰도록 하지.”
“……쓸 일 없어요.”
설원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겨우 그것뿐이었다.
정말로 그뿐이었다. 이토록 유혹적인 남자, 권채하 앞에서는.
다음 날.
채하가 출근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설원은 일부러 모습을 비치지 않았다.
간밤에 그 때문에 잠을 설쳤다는 것을 절대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말했던 대로 채하는 우주의 등원을 직접 시켜주겠다 했지만, 설원은 그냥 기사를 쓰자고 그를 설득했다.
이런저런 이유를 대긴 했으나 진짜 이유는 우주가 혹여라도 채하와 정이 들까 봐서였다.
그녀가 섬에서 돌아온 이후로 채하는 늘 칼같이 퇴근해 우주와 놀아주었다.
안 그래도 자주 붙어 있는데, 재윤이 해주던 역할까지 그가 맡는다면 우주에게도 혼동이 생길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설원의 노력과는 정반대로, 채하는 미친 듯이 거리를 좁혀왔다.
“이게 다 뭐예요?”
화려한 저녁 밥상 앞에서 앞치마를 두른 채 모자를 기다리고 있는 채하를 보며, 설원은 눈을 끔벅거렸다.
생전 처음 보는 차림을 한 채하가 빙긋 웃으며 그녀가 처한 상황을 친절히도 안내해 주었다.
“보는 대로야. 당신과 우주를 위해서 직접 저녁을 차려봤어. 꼬마한테 엄마랑 꼬마가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고 물었더니 수십 가지를 나열하더군. 당신이 그렇게 먹는 데 진심인 줄 몰랐어.”
“…….”
“우와! 그럼 이거 다 대왕 아저씨가 만든 거예요?”
“그래. 꼬마 네가 좋아하는 소시지도 특별히 문어 모양으로 준비했지.”
“와! 멋진 문어! 엄청 엄청 맛있겠다~.”
“뭐 해. 앉지 않고.”
신나서 자리에 덥석 뛰어올라 앉는 우주를 보며, 설원은 주춤주춤 의자로 걸음을 옮겼다.
정말로 식탁 위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순두부찌개를 비롯해 정갈한 한식 반찬 차림이 가득했다.
설마하니 우주에게서 이런 정보가 새어 나갔을 줄이야.
“자, 식기 전에 얼른 먹어.”
“네…….”
이미 포크로 문어 소시지를 콕 찍은 우주는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설원은 조심스레 수저를 들곤 찌개 위에 동동 떠다니는 몽글몽글한 순두부를 떴다.
채하의 시선이 내내 수저를 따라왔지만, 애써 모른 척하며 덤덤히 입안에 두부를 집어넣었다.
“……!”
“어때? 맛있지?”
맛은 어때, 도 아니고 당연하게 맛있냐고 묻는 거만함.
하지만 이미 한입을 먹은 설원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통통하게 살아 있는 완벽한 두부의 식감, 거기에 싱겁지도 짜지도 않은 간까지 완전히 그녀의 입맛을 저격했기에.
“맛……있네요.”
“우주도! 우주도 대왕 아저씨가 해준 반찬 다 엄청 엄청 맛있어요~.”
“많이 먹고 쑥쑥 커라. 꼬마. 아저씨가 매일 밥 해줄 테니까.”
“진짜요? 문어 소시지 맨날 만들어줄 거예요?”
“당연하지. 문어 말고 상어랑 가오리도 해줄 수 있어.”
“와아~ 신난다! 우주 상어도 좋아해요!”
너무도 자상하게 우주를 다루는 채하의 모습을 보며, 설원은 얼떨떨했다.
혹시나 제가 정말 기억을 잃었나 싶을 정도로 그런 그가 낯설어서.
그때였다. 채하가 불쑥 뜬금없는 제안을 해 왔다.
“당신도 돌아왔으니 우리 웨딩 촬영을 하는 게 어떨까 싶은데.”
“네? 웨딩 촬영이요?”
“그래. 예전에 했던 건 아쉽게도 사진이 남아 있지 않아서 말이야. 우주도 있고, 이참에 리마인드 웨딩 촬영을 하면 좋을 것 같은데 어때?”
“촬영? 사진? 찍을래요! 우주도 찍을래요!”
어느새 저도 모르게 채하의 응원군이 되고 있는 줄도 모른 채, 우주가 해맑게 목소리를 높였다.
예전에 했다는 건 당연히 거짓말이었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설원은 할 말이 없었다.
그저 바쁜 사람이 자꾸 왜 이러는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그녀의 입장을 알면서 이용이라도 하듯 채하가 여유롭게 말을 이어갔다.
“3개월 동안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잖아. 당신의 기억을 되돌리려면 죽도록 노력해도 부족한데.”
“……그런 걸 한다고 기억이 돌아올 리는 없을 것 같은데요.”
“아니. 내가 우리 주치의한테 물어봤어. 그랬더니 기억을 되돌리려면 옛날에 함께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다시 해 보는 게 효과가 있을 거라고 하더군.”
태도를 보니 아무래도 치밀하게 계획을 짠 게 틀림없었다.
그는 자신이 주치의라도 된 듯 사뭇 심각하게 이 ‘기억 소생법’을 설명했다.
“이렇게 같이 식사도 하고, 놀러도 가고. 과거의 큰 이벤트를 재현해보는 거야. 웨딩 촬영이 그런 일환인 셈이지.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우리가 침대에서 밤마다 했던…….”
“그, 그냥 웨딩 촬영으로 해요!”
위험 발언이 나올 것을 예감한 설원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러자 씨익 채하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왜인지 꼭 여우 꼬리가 살랑이는 것처럼 보여, 설원은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름대로 3년의 결혼 생활을 하면서 권채하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안다고 생각했는데, 눈앞의 이 남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 해도 무방했다.
“와, 신난다! 웨딩~ 웨딩 촬영! 어? 근데 웨딩이 뭐지……?”
어리둥절해하는 우주의 동그란 이마를 살포시 콕 찍으며, 채하가 대답했다.
“그건 네 엄마랑 이 아저씨가 한 아주 중요한 일을 말하는 거야. 바로 결혼이란 거지.”
“으응? 결혼하면 부부랬는데? 토끼반 선생님이 그랬어요!”
“바로 그거야. 꼬마.”
“으응? 부부면 그러니까…….”
잔뜩 의문에 잠긴 우주의 눈치를 보며 설원은 조용히 식사를 이어갔다.
원래라면 항상 그때그때 호기심을 풀어 주곤 했지만, 차마 지금은 그 결혼으로 인해 두 사람이 엄마 아빠가 되었다는 사실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아니, 그냥 앉아 있어. 내가 할 테니까.”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설원의 어깨를 잡아 앉히곤, 그가 다시 앞치마를 둘렀다.
그러고는 냉장고에서 먹음직스러운 과일 타르트를 꺼내다 식탁 위에 놓았다.
“자, 디저트. 아쉽지만 내가 베이킹까지는 아직 배우지 못해서.”
무어라 더 말할 새도 없이 체리 위에 포크 두 개를 콕콕 찍어준 뒤 채하는 싱크대로 향했다.
앞치마를 두르고 설거지를 하는 권채하를 보게 되다니.
우주에게 체리 알을 하나 물려 주고서 설원은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새삼 이렇게 보니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는 별반 변한 게 없어 보였다.
얼굴엔 예전보다 더 깊은 분위기가 생겼고, 체격도 전보다 더 좋아진 것 같았다.
물끄러미 그의 등을 보고 있자니 왠지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떡 벌어진 어깨와 넓은 등은 보는 것만으로도 묘하게 설렘이 느껴졌다.
저 넓은 등을 안는 건 어떤 기분일까.
당연하게도 한 번도 그를 뒤에서 안아 본 적은 없었다.
그런 백허그 같은 건 진짜 연인이나 할 법한 자연스러운 스킨십이었으니.
‘민설원,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제 생각에 소스라치게 놀란 설원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때마침 채하가 슬쩍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꼬리가 또다시 호선을 그리더니, 설원을 향해 유혹의 멘트를 던졌다.
“와서 안기고 싶으면 얼마든지 그래도 되는데.”
“……아, 안 해요!”
“그래? 난 또 등에 따가운 시선이 내리꽂히길래, 당신이 그런 마음을 품은 줄 알았지.”
대답조차 하기 멋쩍어 설원이 휙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은 차마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백허그를 거부한 설원 대신에 자그마한 실루엣이 다다다 채하를 향해 달려갔다.
그러더니 그를 뒤에서 꼬옥 껴안았다.
“우주가 대왕 아저씨 안아줄게요!”
“…….”
미처 허리에도 닿지 않는 키 때문에 채하의 허벅지 한쪽만 어설프게 껴안은 꼴이었지만, 너무도 사랑스럽고 앙증맞은 모습에 설원의 입가에서 절로 웃음이 번졌다.
그건 채하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의 입꼬리가 느슨해지더니, 우주를 향해 한없이 다정다감한 눈길이 내려앉았다.
“이거야, 아쉽다고 불평도 못 하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