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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야한 선물 (18/111)


18. 야한 선물
2022.10.02.



 
어머니에게 다녀온 후 며칠이 지났지만, 설원의 혼란은 깊어지기만 하고 있었다.

슬픔에 잠겨 있다가도, 채하가 어머니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면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앞으로의 제 인생은 민설원의 행복을 위해 존재할 겁니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의 인생에는 오로지 자기 자신뿐이었고, 그가 누군가를 위해 살아갈 만한 인물은 더욱이 아니었다.

하물며 그것을 말로 표현할 만한 사람은 더더욱.

그녀가 알기로는 하나뿐인 형이 죽은 뒤로 허영주는 둘째 아들인 채하에게 버거울 정도로 보상심리를 품었다.

일도, 결혼도, 아들로서의 역할도.

하지만 권채하는 그 누구의 대신도 되지 않았고, 그 누구를 위해서도 살지 않았다.

그 점이 어머니 허영주를 늘 노엽게 만들었으니까.


“진심일까…….”

부질없는 중얼거림 끝엔 허무함만 남는 것을 알면서도 설원은 몇 번이고 그가 했던 말을 되뇌고 있었다.

슬픔에 무너지던 순간 제 어깨를 단단히 지탱해주던 손을 떠올리면, 조금 벅찬 기분이 들었다.

기대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몇 번이고 반복되는 이 생각의 고리에 설원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휘둘리면 안 된다고 아무리 결심해도 그의 눈빛과 손길 하나에 번번이 그 결심이 흐트러졌다.

그때였다.

불쑥 문을 열고서 채하가 파스텔 빛의 아이 방으로 들어왔다.


“……왜요?”

“당신이야말로 왜 그런 표정으로 보는 거지?”

“내…… 내 표정이 어떤데요?”

혹시 뺨이 붉어졌나 싶어 설원은 양 볼에 손을 대보았다.

다행히 뜨거워지진 않은 상태였다.

흐음 하며 그녀를 살피던 채하가 문밖을 가리키며 가볍게 손짓했다.


“나와 봐. 당신 손님이 왔어.”

“손님이요?”

손님이라니, 저를 찾아올 사람이라곤 없는데.

설원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자 채하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아주 반가운 손님일 거야.”

그의 말은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1층 거실로 내려가자마자 두 팔을 뻗으며 달려온 로라 때문에 설원은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했다.


“설원!”

“로라?”

“조심해. 허니. 그렇게 세게 껴안았다간 설원 씨가 부서지겠어.”

로라의 뒤로 익숙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설원의 목소리가 반가움으로 높아졌다.


“제임스!”

“오랜만이야. 설원 씨.”

그랬다. 채하가 말한 손님은 옛날 그녀가 일했던 플라워숍의 주인인 로라와 제임스 부부였다.

세월이 지나 조금 나이는 들었지만, 로라의 밝고 익살스러운 미소와 제임스의 너그러운 표정도 여전했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어리둥절해진 설원이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여기는 어떻게?”

“설원 남편, 권채하 씨가 불러줬어요. 설원 씨가 돌아왔다고요!”

“네……?”

떨떠름한 표정으로 설원이 뒤를 돌아보자 계단 난간에 기대어 서 있던 채하가 한쪽 눈썹을 찡긋 올리며 말 없는 긍정을 해 보였다.


“세상에, 난 정말로 설원 씨가 죽은 줄 알고…….”

훌쩍거리며 로라가 꽃무늬 손수건을 꺼내 눈시울을 닦았다.

뒤이어 제임스 역시 뻘게진 콧등을 마구 문질렀다.

그 모습에 설원은 가슴이 찡해졌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들에게도 사정을 설명할 기회는 없었던 만큼 갑작스러운 이별이었다.


“로라…… 제임스.”

제가 죽은 줄만 알았을 두 사람을 다시 마주하니 저 또한 감격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때 채하의 정중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편히 이야기 나누세요. 제가 차를 내오겠습니다.”

“땡큐. 미스터 권!”

제임스가 그의 호의에 얼른 로라와 설원을 이끌어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차를 내오겠다는 채하의 뒷모습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던 설원은, 결국 눈앞의 두 사람에게 고개를 다시 돌렸다.

두 사람의 격한 환영은 단시간에 혼을 쏙 빼놓았다.

원래도 리액션이 좋은 부부인 데다가, 오랜만의 반가운 재회니만큼 그럴 만도 했다.


“그때 설원 씨랑 일했던 사람들은 다 그만뒀어요. 컴플레인이 너무 많이 들어왔거든. 그쵸, 달링?”

로라가 제임스를 바라보자 그가 어깨를 과장되게 으쓱였다.


“내가 보는 눈이 정확했지. 설원 씨가 남았어야 했는데 아쉽다니까.”

“어디 봐요. 설원 씨. 고운 얼굴이 반쪽이 됐네.”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세 사람은 그간의 회포를 풀며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었다.

편히 이야기할 수 있도록 채하가 자리를 비켜준 덕분에 설원도 긴장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담소를 이어가던 중, 마침 낮잠에서 깨어난 우주가 폴짝거리며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그 뒤엔 당연한 듯 보호자인 채하가 듬직하게 서 있었다.


“엄마!”

“우주야. 일어났어? 여기 엄마 손님 오셨어.”

“안녕하세요~.”

시키기도 전에 공손하게 배꼽 인사를 건네는 우주를 보며 로라와 제임스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오마이갓! 이 귀여운 베이비가 어디서 튀어나왔죠?”

“제 이름은 우주예요~.”

“이름도 예쁘네. 우리 설원 씨랑 채하 씨를 똑 닮아서 얼굴은 더 예쁘고 잘생겼고!”

로라와 제임스가 마치 손주라도 되는 양 우주를 요리조리 돌려보며 감탄을 나누었다.

밤톨 같은 머리를 쓰다듬기도 하고, 희고 말랑한 볼을 쭉 늘려보기도 하며 두 사람은 계속해서 와우! 원더풀! 등의 감탄사를 늘어놓았다.


“정말 엄마 아빠 판박이네!”

“어쩜 이렇게 딱 반반씩 닮았을까, 두 분 참 기쁘겠어요.”

“아, 네에…….”

멋쩍은 나머지 설원은 뒤쪽에 서 있는 채하를 차마 쳐다보지도 못했다.

이렇게 보자마자 당연하게 자신과 그의 아들임을 알아보는데, 애초에 속일 일도 아니었구나 싶어서.

그때였다.

아이의 존재 덕분인지 무언가 떠오른 듯 로라가 히죽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설원 씨. 우리가 그때 줬던 결혼선물은 써봤어요?”

“……네?”

“왜 우리가 핑크색으로 포장해서 준 그 레이스…… 읍!”

제임스가 난데없이 제 입에 들어온 커다란 떡에 놀란 눈을 빙그르르 굴렸다.


“아…… 하하하. 이 떡이 참 맛있거든요. 제임스 떡 좋아하잖아요.”

그러나 설원의 이 공격에도 로라는 아직 굴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가 발언 강도를 한 층 더 높이며 질문 상대를 채하로 변경했다.


“어땠어요? 우리가 준 선물. 채하 씨 아주 난리가 났을 것 같은데.”

“……!”

이번엔 떡을 물지도 않은 설원의 입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두 사람의 기억력에 그저 감탄하기에는, 그 선물은 위험도가 너무 높은 물건이었다.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망연자실하고 있자니 채하가 한 발짝씩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그러고는 무척이나 신사적인 미소로 그들의 질문에 화답했다.


“예. 정말 미쳐버릴 뻔했죠.”

“오마이갓! 역시!”

“거봐요. 제임스. 내가 그 선물이 최고라고 그랬죠? 호호.”

너무도 기뻐하는 두 사람과,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채하를 번갈아 바라보며 설원은 결국 손을 툭 떨어트렸다.

사태는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

로라와 제임스가 돌아간 뒤 우주는 일찍 잠이 들었다.

워낙 텐션이 높은 둘과 뛰어노느라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아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설원은 아까 채하의 모습을 떠올렸다.

남과 말을 섞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줄만 알았는데, 의외로 그는 로라와 제임스와 자연스레 어울렸다.

제임스는 처음 채하가 꽃집에 찾아왔을 때 할리우드 배우가 온 줄 알았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로라 또한 올리지도 않은 결혼식을 보지 못해 아쉽다며 말을 보탰다.

뜻밖이었던 것은 채하였다.

자연스레 꽃에 대한 화제가 오르자 그는 설원에게 왜 꽃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물어왔다.

명색이 아내가 플로리스트인데 아직 듣지 못했다며.

당연했다. 물어본 적이 없으니 들었을 리가 만무했다.

굳이 답하지 않을 이유도 없었기에 설원은 꽃을 좋아하게 된 계기에 대해 말해주었다.

생전 아버지와 어머니가 처음 만나 가정을 꾸렸던 곳에 커다란 들판이 있었고, 거기에 수많은 들꽃이 피어 있었다고.

그래서 자연스레 행복한 가족의 풍경에 늘 꽃이 있었다고.


‘그랬군.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꽃은, 수선화겠지?’


‘맞아요.’

 
정원 가득 늘 수선화를 심어뒀으니, 이것만큼은 채하도 모를 수 없을 터였다.

이어 로라가 궁금한 듯 채하에게도 어떤 꽃을 좋아하는지 물었다.

그러자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은방울꽃’이라고 대답했다.


“아직 안 자겠지?”

잠든 우주의 고운 뺨을 한번 쓰다듬은 설원이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어쨌거나 저를 위해 일부러 두 사람을 불러준 것일 테니 감사 인사는 전하고 싶었다.

똑똑, 노크를 하자 대답 대신 문이 활짝 열렸다.

열린 문에 한쪽 팔을 짚은 채 채하가 설원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에 괜히 숨이 막혀 설원은 얼른 입을 열었다.


“저, 권채하 씨.”

“방에 들어오는데 일일이 노크할 필요 없어. 말했잖아. 여긴 우리 방이라고.”

“그래도…….”

“그리고 그렇게 딱딱하게 권채하 씨라고 매번 부르지도 말고. 역시 말했지. 당신은 내 이름을 아주 다정하게 불러줬다고.”

“나는 그런 기억이…….”

변명을 하려던 설원은 순간 흠칫했다.

로라와 제임스를 만나 반가움에 취한 나머지, 자신이 기억을 잃은 상태라는 것도 잊고 둘을 반기지 않았던가.

하지만 채하는 그다지 개의치 않는 듯했다.


“괜찮아. 당신 기억은 오로지 나만 잊었다는 거, 잘 알고 있으니까. 내 아내가 나만 기억 못 한다는 게 서운해도 뭐 어쩌겠어. 내가 더 노력해야지.”

“…….”

“용건이 뭐지? 용건 없이 들어온 거면 더 환영이고.”

말문이 막혔지만,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아 설원은 다급하게 용건을 꺼냈다.


“저, 오늘은 고마워요. 로라와 제임스를 불러줄 줄은 몰랐어요. 덕분에 오랜만에 반가운 사람들을 만났어요.”

“뭘, 당신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그럼…… 쉬어요.”

“겨우 그 말을 하려고 방에 들어온 거야?”

설원이 다시 나가려는 기미를 보이자마자 채하가 잽싸게 그녀의 손목을 붙들었다.

눈빛이 왜인지 이글거린다기보다는 능글거렸다.


“왜…… 그렇게 봐요?”

“궁금해서.”

“네? 뭐가요?”

“그 결혼선물. 로라랑 제임스가 당신한테 줬다는.”

“……!”

설원의 입이 꾹 다물어지자, 채하가 손목을 잡은 채 성큼 한 걸음 더 앞으로 다가섰다.

두 사람의 거리가 금방이라도 닿을 듯 가까워졌다.

살짝 고개를 내려 그녀의 눈을 마주하며 채하가 다시금 질문을 던졌다.


“핑크색으로 포장되었다는 그 레이스, 내가 보면 미친다는 그 선물이 대체 뭐야?”

“그, 글쎄요. 나도 모르죠. 기억에 없는 일이라서요.”

“그래? 기억에도 없는데 왜 그리 다급하게 제임스 입에 떡을 집어넣었지?”

“그건…… 갑자기 제임스가 떡을 좋아하던 게 생각나서…….”

“흐음. 결혼이라는 인륜지대사까지 잊어버린 사람치곤 놀라운 기억력이군.”

“…….”

꼼짝없이 덫에 걸렸다는 기분에 설원은 도망칠 궁리조차 할 수 없었다.

곧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 걸려 기뻐하는 사자처럼, 그가 천천히 제 입술을 핥았다.


“당신이 그렇게 반응하니까 더 궁금해지네. 설마 결혼 선물을 버렸을 리는 없을 테고, 같이 찾아볼까?”

“찾아보자고요?”

“그대로 썩히긴 아깝잖아. 내 생각엔, 꽤나 야한 선물이었던 것 같은데.”

손목을 쥐고 있던 그의 손이 어느새 설원의 팔을 타고 어깨로 올라왔다.

그러더니 어깨 위로 찰랑거리고 있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뒤로 가볍게 넘겨버렸다.

희고 뽀얀 설원의 피부가 그의 시야에 무방비하게 드러났다.

이윽고 참을 수 없다는 듯 억눌린 목소리가 곧 그의 목 깊은 곳에서부터 새어 나왔다.

이번에는 능글거림이 아니라 명백한 이글거림이었다.


“그 선물, 오늘 밤 써 보는 게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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