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그녀를 위해 살 겁니다
(17/111)
17. 그녀를 위해 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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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그녀를 위해 살 겁니다
2022.09.28.
더없이 진실한 심장의 고동.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어 설원은 그저 잠자코 있었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권채하에게서.
3년이라는 기간이 정해진 계약 결혼이었고, 그나마 그동안에도 제가 있거나 말거나 상관없어 보였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런 태도는 너무도 의아했고, 그래서 혼란스러웠다.
마치 그녀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했던 것처럼 느껴졌기에.
“……권채하 씨. 이거 놔 주세요. 누가 보겠어요.”
“우리 집인데 보긴 누가 본다는 거야. 그리고 봐도 상관없어. 죽은 아내가 살아 돌아왔는데, 이 정도도 못 하나?”
“…….”
이런 말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가.
설원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눈앞의 제 남편, 권채하를 새삼스럽게 올려다보았다.
언제나 그녀를 설레게 했던 짙고도 깊은 눈매.
그의 눈에 번져 있는 감정은 결코 거짓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무서우리만치 밀려오는 애틋함에 설원은 얼른 그를 밀어냈다.
이대로 있다간 순식간에 이 남자에게 잠식되고 말 것이었다.
거센 파도에 삼켜지는 작은 물고기처럼.
“……여기 정리하는 거나 도와줘요. 그럼.”
“그래. 꽃도 내가 다 심어줄게. 당신은 구경만 해.”
“됐어요. 꽃은 내가 직접…….”
설원이 가드닝 박스에 있는 도구를 집으려 하자 채하가 빠르게 앞을 막아섰다.
언제 그렇게 번진 눈빛을 했느냐는 듯 그의 눈은 이글거리고 있었다.
“아니. 당신 손에 닿는 꽃들한테 질투가 나서 안 돼.”
“……네?”
제 청력에 이상이 생겼나 싶어 설원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 태도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태연하게 채하가 말을 이어갔다.
“말 그대로야. 민설원의 손은 오직 권채하만 정성스럽게 만져줬으면 하거든.”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대낮부터 낯 뜨거운 소릴 태평하게도 한다 싶어 설원은 손을 애꿎게 퍼덕였다.
그러자 채하가 마침 잘되었다는 듯 그 작은 손을 낚아채, 제 입술 위로 가지고 갔다.
그 아찔한 행동에 설원은 입을 닫고 그저 홀린 듯 채하를 바라보았다.
손가락에 닿아 있는 그의 입술이 매끄럽게 움직이며 다시금 또박또박 제 의사를 전했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내가 미친놈이라서.”
“……권채하 씨.”
“그러니까, 저 안은 궁금해하지 않는 게 좋아.”
“…….”
이토록 오싹하면서도 야릇한 충고가 또 있을까.
그의 눈빛에 완전히 압도당한 설원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되었든 아주 위험한 것임엔 틀림없어 보였다.
“우리 우주 새 어린이집은 마음에 들었어?”
“엄청, 엄청요!”
드디어 찾아온 월요일.
저녁 식사를 하며 세 사람은 우주의 첫 등원 이야기보따리를 풀고 있었다.
섬에서 살았을 때도 워낙 붙임성이 좋았던 아이라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던 설원이었다.
예상보다 훨씬 더 우주는 새로운 집과 새로운 어린이집에 만족한 듯했다.
오물오물 양 볼에 음식을 가득 넣고 씹으며 우주가 오늘 있었던 일을 자랑스럽게 늘어놓았다.
“있잖아요. 엄마. 오늘 간 데는 친구들이 엄청 많아요!”
“그렇지? 여기는 도시라 사람이 많은 거야. 친구들한테 인사는 잘했어?”
“네! 대왕 아저씨가 시킨 대로 했어요. 그랬더니 친구들이 막 웃으면서 좋아했어요!”
“대왕…… 아, 아니. 아저씨가? 뭐라고 했는데?”
설원이 밤톨처럼 동글동글한 아이의 뒤통수에서 맞은편의 채하로 슬그머니 시선을 옮겼다.
그 의심스러운 시선을 곧바로 받아치며 채하가 여유로운 웃음을 지었다.
“왜? 내가 이상한 말이라도 시켰을까 봐?”
“아뇨. 그냥 궁금해서 그런 거예요.”
“표정만 보면 꼭 내가 3개월만 나랑 놀아주면 돈 많이 줄게, 라고 시키기라도 한 것 같군.”
움찔하며 설원이 애먼 입술을 달싹거렸다.
비슷한 계열의 상상을 하긴 했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우리 아빠가 큰 회사 부사장님’이라든가, ‘우리 아빠가 돈이 많다’든가.
그것도 아니면, 아예 값비싼 장난감 같은 것을 직접 뿌렸다거나…….
그런 그녀를 즐겁다는 듯 지켜보고 있던 채하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 당신이 상상하는 세속적인 말 따윈 안 시켰어. 다만…….”
“다만……?”
“아저씨가 우주는 신비한 섬에서 온 친구라고 말하랬어요!”
둘 사이의 미묘한 긴장을 뚫고 우주가 명랑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방글방글 웃으며 우주가 진실 규명을 이어갔다.
“그리고 아저씨가 친구들하고 나눠 먹으라고 돌고래 모양 과자도 사줬어요!”
“그…… 그랬어?”
“응! 처음 보는 과잔데~ 우주가 섬에서 낚아온 거라고 했더니 친구들이 엄청 좋아했어요!”
“…….”
그것 봐, 하는 표정으로 채하가 입꼬리를 씰룩 올렸다.
권채하라는 남자가 그런 동심 가득한 인사를 시켰다는 게 여전히 믿기지 않아, 설원은 그저 어안이 벙벙했다.
“꼬마가 아주 사교성이 좋더군. 인사도 잘하고 말이야.”
“섬에 있을 때도 인사를 잘해서 칭찬 많이 받았어요.”
“며칠 안 봤지만, 아주 영특한 것 같아. 원래 이 나이 때에 이렇게 말도 잘하나? 한글도 척척 잘 읽고 쓰던데.”
“우주가 뭐든 좀 빨랐어요. 당신을 닮…….”
아차 싶어 설원이 재빠르게 입을 닫았다.
여전히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채하가 느른한 미소를 흘리며 조용히 읊조렸다.
“끝까지 다 말해도 되는데 말이지.”
“…….”
“언제든, 난 당신이 나를 기억해낼 때만을 기다리고 있으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는 이미 제 손위에 설원을 올려둔 것처럼 굴고 있었다.
다만 채근하지 않고, 서두르지도 않으며 묵묵히 지켜보는 것뿐.
“엄마! 우주가 살던 섬이 진짜 신비의 섬이에요?”
“응? 응. 맞아. 아주 신비로운 섬이지.”
다행히도 두 사람의 긴장을 풀어줄 소중하고 귀한 존재가 있었다.
설원의 닫혔던 입에서 이내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 모습을 채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언제 말을 꺼내면 좋을까 고심하고 있었는데, 지금이 마침 적절한 타이밍인 듯했다.
“민설원. 당신, 어머니한테 가보지 않겠어?”
“……어머니요?”
“그래. 이제 돌아온 지 3일째니 슬슬 여긴 적응도 됐을 거고.”
설원의 안색이 미세하게 어두워졌다.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망설임이, 채하의 의심을 더욱 확고하게 하고 있었다.
어머니라면 세상만사 모든 일을 제치고 달려가던 민설원이 왜인지 조심스럽다는 것.
사실 채하는 내내 마음에 걸렸다.
왜 그녀가 뻔히 드러나는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제게서 도망치려 하는지.
허영주와 백사라가 집에 쳐들어왔을 때도, 두 사람은 죽은 사람을 다시 본 것 치곤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특히 제 어머니 허영주는 원체 겁이 많아 귀신이랍시고 그 자리에서 기절할 법도 한데, 기억 상실이란 것에만 반응했을 뿐 그녀가 살아 있는 사실 자체엔 무던했다.
그들 사이에 제가 모르는 무언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거기다 민설원의 어머니는 설원이 사라진 바로 다음 날 새벽 사망했다.
우연의 일치치고는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서 채하는 더욱 강건하게 제안을 밀어붙였다.
“5년이나 뵙지 못했잖아. 내일 오전에 시간 내서 같이 가도록 하지.”
“네? 같이요?”
“사위가 같이 가는 건 당연한 도리 아닌가?”
“아. 아니에요. 저 혼자 가볼게요. 어딘지만 알려줘요.”
“그럴 수야 없지.”
단호한 거절에 설원의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채하는 결코 그녀를 혼자 어머니에게 보낼 생각이 없었다.
민설원이 세상에서 사라졌을 때, 그리고 다시 제 눈앞에 돌아왔을 때.
앞으로는 단 한 순간도 그녀가 자신이 없는 곳에서 눈물 흘리지 않게 하겠다 결심했기에.
“같이 가. 나도 당신 어머님께 하고 싶은 말이 있으니까.”
커다란 눈망울이 말없이 끔벅이는 것을 보며, 채하는 그 결심을 더욱이 굳혔다.
이제 저 맑은 눈이 혼자서 아픔을 삼키는 일 따윈 절대 없게 하리라는.
*
길쭉길쭉 곧게 뻗은 나무들이 즐비한 숲 입구에서, 설원은 심호흡을 했다.
엄마. 어머니.
지난 5년간 수없이 부르고 불렀던 이름이었건만, 이곳에 오기까지는 너무도 힘들었다.
무너져내릴 것이 뻔했기에 혼자 오고 싶었다.
하지만 몇 번을 더 만류했음에도 채하는 끝끝내 자신을 혼자 오도록 두지 않았다.
우주가 어린이집에 간 사이, 그는 반차를 내곤 제 차로 직접 설원을 여기까지 데리고 왔다.
“일부러 큰 산을 고르지 않았어. 당신은 정원도 그렇고 늘 작은 곳을 좋아했는데, 어머님께서도 작은 산에 묻히시길 원하시더군.”
“아…….”
어머니의 유지라고 했었지, 새삼 설원은 섬에 찾아왔을 때 채하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생전의 모녀는 한 번도 그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언제나 죽음을 대비하고, 죽음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건 불길 속에서 순직한 아버지 하나로도 족했다.
아프더라도 엄마만큼은 살아 있는 이 순간을 온전히 누리기를 원했다.
마지막에는 어차피 자신이 곁에 있을 거라 확신했으니까.
그런 비극적인 끝이 될 줄도 모르고.
“……어머니는 어디 계시죠?”
“저 위에 가장 높은 곳에 계셔. 언제나 당신을 내려다보고 싶다고 하셨거든. 자, 가지.”
설원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곤 채하의 뒤를 따랐다.
가파르지 않게 잘 정돈된 언덕길을 따라 십 분쯤 걸으니 이윽고 시야가 탁 트인 숲이 나타났다.
딱 봐도 좋은 위치에, 좋은 환경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곧 채하가 커다랗고 높게 뻗은 나무 한 그루를 가리켰다.
“여기, 당신 어머님이 계신 곳이야.”
그의 말에 설원은 고개를 들어 나무를 아래부터 위로 천천히 올려다보았다.
하늘에 닿아 있는 가지가 햇살을 받아 무척이나 눈이 부셨다.
너무도 눈부신 나머지, 참지 못하고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엄마…….”
이제는 아프지 않겠지.
이제는 하루에 수십 알이나 되는 약을 먹지 않아도 되고, 지팡이 없이도 자유롭게 스스로 걸을 수 있겠지.
이제는 그토록 그리워했던 아빠를 만나 함께 웃고 계시겠지. 이제는…….
“흑…… 흐흑…….”
이제는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설원은 결국 무너져 내렸다.
어깨가 떨려옴과 동시에 설원이 두 손을 얼굴 깊이 파묻었다.
“엄마…… 엄마……. 미안해요. 엄마. 정말 미안해…….”
한 번 터져 나온 눈물은 제어가 되지 않은 채 숲을 적셨다.
나무의 거친 표면을 엄마의 얼굴이라도 되는 양 어루만지며, 설원은 계속해서 울음을 토해냈다.
그런 그녀의 어깨를, 어느새 채하가 다가와 감쌌다.
그러곤 아주 듬직한 손길로 끌어안으며 다독거렸다.
낯선 그 온기에 설원은 결국 그의 품 안에 몸을 던진 채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한참을 울었을까.
닿아 있는 셔츠 자락이 눈물범벅이 된 것을 겨우 깨달은 설원이 얼굴을 떼어내려 할 때였다.
머리 위에서 낮게 잠긴 진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자리에서 어머님께 약속드리겠습니다. 앞으로 저 권채하는 아내와 아들을 위해서 살 겁니다.”
“…….”
“앞으로의 제 인생은.”
채하가 천천히 고개를 드는 설원의 젖은 눈망울을 애틋한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마치 맹세라도 하는 듯 말을 매듭지었다.
“민설원의 행복을 위해 존재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