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살아 있어 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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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살아 있어 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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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살아 있어 줘서
2022.09.25.
피는 물보다 진하다…….
이런 말을 다른 사람도 아닌 권채하의 입으로 듣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어안이 벙벙한 나머지 설원은 따지는 것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채하가 마침 용건이 떠올랐다는 듯 말을 돌렸다.
“얘기한 대로 오늘부터 도우미를 불렀어. 아침은 간단하게 준비해달라고 했으니 내려가서 같이 먹지.”
“아침이요……?”
“그래. 아침밥 말이야. 설마 이번에도 간밤에 우주랑 둘이 요기하고 왔다곤 하지 않겠지.”
“그럴 리가요.”
“그럼 같이 내려와.”
말을 끝낸 채하가 먼저 1층으로 내려가는 걸 보며 설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워낙에 바쁜 사람이라 그는 집에서 식사를 하는 일이 거의 전무했다.
그나마도 시부모님과 함께였지, 둘이서 밥을 먹은 적은 제 기억으로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엄마. 우주 치카치카 다 했어요!”
양치를 끝내고 나온 우주의 밝은 목소리가 그녀의 상념을 깨트렸다.
반짝반짝 새하얀 이를 자랑스럽게 드러내는 아이를 보니, 의문은 자연스레 자취를 감췄다.
“우와!”
다이닝 룸으로 내려오자마자 우주가 눈을 빛내며 설원의 품에서 냉큼 벗어났다.
언제 인테리어를 바꾼 건지, 무미건조했던 공간은 완전히 어린이 친화형으로 변모해 있었다.
바다를 모티브 삼은 듯한 커다랗고 푸른색의 창에, 물고기들이 가득 그려진 벽지.
곳곳엔 조개며 불가사리 모양의 다양한 소품들로 가득했다.
왜일까. 섬에만 살아서 도시가 낯설 우주를 위해 일부러 만든 것 같은 인상을 풍겼다.
예상대로 우주는 다이닝 룸을 깡충깡충 뛰어다니며 감탄사를 마구 쏟아내기 시작했다.
“우와~ 부엌이 바닷속 같아요! 엄청 엄청 예뻐요!”
그야말로 ‘엄청난’ 기쁨을 표현하는 우주의 모습을 채하가 만족스레 바라보았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설원이 슬쩍 질문을 던졌다.
“설마 이것도 우주 때문에 바꾼 거예요?”
“당연하지. 아이가 생겼는데 아이 위주로 바꾸는 게 당연하잖아.”
“이렇게까진 안 해도…….”
“꼬마.”
“네! 대왕 아저씨!”
벽에 붙은 조개를 만지다 말고 우주가 해맑게 고개를 돌렸다.
작고 앙증맞은 입술에서 흘러나온 기이한 호칭에 채하의 미간이 좁아졌다.
“왜 내가 대왕 아저씨야?”
“아저씨가 우주 6호 아빠는 싫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대왕 고양이 닮았으니까 대왕 아저씨예요.”
“아빠가 싫은 게 아니라 1호가…… 아니다, 됐어.”
지끈거리는 듯 이마를 짚는 채하의 모습에 설원의 입가가 살짝 느슨해졌다.
아이라는 존재가 권채하에게 상극일 줄만 알았는데, 이상하게 둘이 있는 모습이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쨌든 꼬마. 바다 좋아하나?”
“네! 좋아해요. 엄청 엄청요! 우주도 바다에 살았어요.”
우주의 당찬 대답이 끝나자마자 채하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바람에 설원은 그림 같은 두 부자에 대한 감상을 잠시 접어야 했다.
“……왜요?”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 방금 꼬마가 말해줬잖아.”
“아…….”
한 방 먹었다. 설마 그가 이런 일에까지 이토록 치밀하고 계획적일 줄이야.
무어라 반박하지 못한 채 눈만 끔벅거리자, 채하가 피식 웃어 보이고는 두 사람에게 식탁으로 오라 손짓했다.
식탁엔 우주의 키에 꼭 맞춘 의자부터 어린이 식기까지,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 모든 것들을 다름 아닌 권채하가 직접 준비했다니.
떨떠름한 와중에도 설원은 감사 인사를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고마워요.”
“뭘, 내가 1호인데.”
우주가 알아듣기 어려울 말로 자신이 ‘아빠’라 주장하는 채하가 조금은 우스워, 설원은 얌전히 수저를 집어 들었다.
간단하면서도 먹음직스럽게 차린 아침 식사를 들며 세 사람은 나름대로 가족 느낌이 나는 대화를 나누었다.
“어린이집은 다음 주부터 등원하면 된다더군.”
“와! 우주 여기서 어린이집 다녀요?”
“그래. 엄청 엄청 크고 좋은 어린이집이야. 기사 아저씨가 매일 데려다줄 거고.”
“우와, 신난다!”
“그러고 보니 그 섬은 규모가 작던데, 그동안 어린이집은 어떻게 다녔지?”
채하가 지극히 당연한 질문을 던지자 우주가 손을 번쩍 들었다.
“우주가 대답할래요!”
“그래. 꼬마, 네가 직접 대답해 봐. 좋은 자세야.”
“응! 아침에 준비 끝나면요, 재윤 아빠가 멋진 트럭 타고 데리러 와요.”
“…….”
“그다음엔 배 타는 곳으로 나가서 재윤 아빠가 육지까지…….”
“우, 우주야. 이거 방울토마토 먹자. 우리 우주 방울토마토 좋아하잖아.”
다급하게 우주의 입에 방울토마토를 밀어 넣는 설원을, 채하가 가느다란 눈초리로 응시했다.
그러더니 대뜸 말을 바꾸었다.
“생각해보니 아이 혼자는 위험하겠어. 아예 내가 등·하원을 시키도록 하지.”
“네?”
너무 놀란 나머지 설원은 하마터면 포크를 떨어트릴 뻔했다.
반면 채하는 태연자약하게 하던 말을 이어갔다.
“그런 건 원래 아빠가…… 아니, 1호가 하는 일이니까.”
“무슨…… 당신은 바쁜 사람이잖아요. 듣자 하니 지금 부사장이라면서요.”
“세상에는 우선순위라는 게 있는 법이야.”
그렇게 말하며 채하는 맹목적인 시선으로 설원을 바라보았다.
왜일까. 그 눈빛이 꼭 그녀가 자신의 우선순위라 말하는 것 같아서, 가슴이 이상하게 콩닥거렸다.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히 무리수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채하가 더 빨랐다.
부담스러워하는 표정을 읽히자마자 그가 냉큼 절충안을 제시해 왔다.
“일단은 첫날만 한번 해보고 결정하지.”
“그럼 나도 같이…….”
“아니, 나랑 우주 둘이서만 갈게. 어때, 꼬마?”
“좋아요! 엄마, 나 대왕 아저씨랑 같이 어린이집 갈래요~.”
어때, 라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채하가 설원을 바라보자 설원으로서도 더 할 말이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녀는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 건지 도통 의도를 알 수 없었지만, 권채하는 원래도 알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어차피 우주가 그의 아들이라는 걸 들킨 이상은 못 하게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다만 너무 섣불리 결정한 건 아닌지, 왠지 모를 불안이 가슴 속에 밀려들었다.
혹여 우주가 자신의 아이인 걸 알게 되더라도 채하는 아무렇지 않을 거라고만 생각했다.
약속한 기간이 끝나면 아무 미련 없이 그녀와 우주를 보내줄 거라고.
그런데 지금 그의 태도는 설원이 예상한 것과 완전히 달랐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곰곰이 하지?”
“……아무것도 아니에요.”
설원은 채하의 옆에 바짝 붙어 방글방글 웃고 있는 우주에게로 얼른 눈길을 돌렸다.
설마하니 우주가 이렇게 냉담하고 차가운 채하에게 곁을 내주지는 않겠지…….
3개월 후면 섬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데, 어설프게 정이라도 들어버리면 곤란했다.
“우주, 아저씨 귀찮게 하지 말고 엄마 옆으로 와.”
“…….”
채하가 미묘한 눈빛으로 저를 보는 것을, 설원은 애써 외면했다.
정이 들어버리면 곤란한 건 사실 우주보다도 자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그를 사랑하면 너무도 괴로워지는 탓에, 차라리 모른 척하는 것을 선택했기에.
*
곤두선 긴장이 무색하게 주말은 비교적 평온히 흘러갔다.
낮에는 도우미가 와준 덕분에 자잘한 일은 하나도 손대지 않아도 되었다.
예전에는 집에서 놀고먹는다고 허영주가 늘 눈치를 주는 바람에, 입주 도우미가 하는 일을 반은 함께 떠맡아야 했다.
지금은 분가를 한지라 온전히 채하의 집이었기에 그런 우려는 없었다.
대신에 다른 난감한 상황이 발생했다.
주말에도 회사에서 살다시피 했던 채하가 왜인지 이번 주말은 내내 집에서 빈둥대고 있었다.
아이 방 인테리어를 찾아보거나, 어울리지 않게 육아 잡지 등을 보면서.
제가 다 어색한 나머지 설원은 우주가 낮잠을 자는 틈을 타 1층으로 내려왔다.
“따뜻하네.”
환한 햇살이 거실 통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보니 비로소 마음이 좀 편안해졌다.
정원이 한눈에 들어오는 이 통창은 옛날부터 설원이 좋아하던 공간이었다.
커다란 성에 홀로 갇혀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면, 하염없이 이 창을 바라보곤 했다.
그러면 조금쯤은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아서.
창 너머를 바라보던 설원은 문득 정원에 듬성듬성한 곳이 많다는 것을 발견했다.
예전에 그녀가 가꿨던 대로 놔둔 나머지, 시들어버린 자리는 그대로 공백이 된 모양이었다.
그걸 보자 설원은 새삼 정원을 가꾸고 싶어졌다.
섬에서도 꽃을 만졌지만, 자신의 정원을 갖는 것은 또 느낌이 달랐다.
게다가 이 집의 정원은 설원에게 있어서 아주 특별한 공간이었다.
처음 채운 가에 들어갔을 때 채하가 마련해주었던 정원은, 허영주가 반은 짓밟고 반은 자기가 좋아하는 꽃들로 도배를 해버렸다.
그래서 분가한 뒤 새로 생긴 이 정원이야말로 진정한 그녀의 공간이라 할 수 있었다.
유일한 쉼, 외로운 집에서의 유일한 위로.
“꽃을 좀 심어 볼까…….”
결심한 김에 일단 조금 다듬기라도 해볼까 싶어 설원은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혼자인지라 이번에는 천천히 정원을 살펴볼 수 있었다.
정말 놀랍도록 변한 게 없었다. 딱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설원의 시선이 문득 마당 끄트머리에 있는 작은 별채 건물로 향했다.
‘저긴 신경 쓸 거 없어.’
‘들어가지도 말고.’
익히 들어온 무심한 말투 그대로였지만, 어쩐지 그 말을 내뱉는 채하에게서는 평소와 다른 미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단단히 닫힌 문은 꼭 무언가 중요한 것을 숨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
“…….”
잠시 멈춰선 채 설원은 갈등했다.
권채하의 세계엔 발을 들이지 않겠다고 결심한 지 채 이틀도 지나지 않았는데, 조금 긴장이 풀렸다고 호기심이 몽글몽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상했다. 그동안에는 그가 한 말을 어긴 적이 없는 설원이었다.
한데 자신이 가꿔놓은 정원 안쪽에 대뜸 세워져 있는 저 건물이, 왠지 모르게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아주 살짝만 살펴볼까…….’
그렇게 결심한 설원은 바깥쪽 통창 너머로 집 안을 흘깃 들여다보았다.
거실에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확인한다면 바로 지금밖에 없을 것 같았다.
들리지도 않을 발소리를 죽인 채 설원이 살금살금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문은 역시나 자물쇠로 단단히 잠겨 있었다.
“잠겨 있네…….”
“그래서, 실망스러워?”
“헉……!”
놀란 설원이 뒷걸음을 쳤지만, 이내 머리통을 부딪치고 말았다.
얄궂게도 그녀가 부딪친 곳은 이번에도 역시 채하의 탄탄한 가슴팍이었다.
“왜 혼자 나와 있지?”
응당 화를 낼 거라 여겼는데, 그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 미안해요. 그냥 정원을 좀 가꾸려다가…….”
“당신 집인데 미안할 게 뭐 있나. 그런 것 같아서 도와주러 나온 거야.”
덤덤히 대답하곤 채하가 별채 구석에 놓인 가드닝 박스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괜히 죄를 지은 기분에 설원이 얼른 몸을 떼어내려 했다.
순간, 채하가 그녀의 몸을 휙 돌리더니 제 가슴팍에 한가득 끌어안았다.
그야말로 기습적인 포옹에 설원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권채하 씨?”
“고마워. 살아 있어 줘서…….”
“……네?”
맞닿은 가슴에서 들려오는 심장 박동이 더욱 빨라졌다.
지나치게 가까이 있다는 사실에 설원이 그에게서 벗어나려 팔을 움직이는 찰나였다.
머리 위로 채하의 떨리는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민설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