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 이래도 내가 1호가 아니야? (15/111)


15. 이래도 내가 1호가 아니야?
2022.09.21.


소복 눈이 내렸던 그 밤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미묘하게 달라졌다.

정확하게 말하면 두 사람의 생활 패턴에 조금 변화가 생겨났다.

우선 채하의 퇴근 시간이 바뀌었다.

늦는 것은 여전했지만, 처음에는 한 시간 일찍 그다음 날엔 두 시간 일찍. 귀가 시간이 차츰 빨라졌다.

서재로 들어가는 대신 채하는 두툼하게 이불이 깔린 자신의 침대에서 잠을 청했다.

추위를 많이 타는데 여기가 따뜻하다는 이유였다.

3년 동안 곁에 있으면서 그가 추위에 약하다는 사실은 금시초문이었지만, 원래 주인이 방을 쓰겠다는데 나가라고 할 수도 없었다.

다만 그 탓에 설원에게는 미묘한 긴장감이 생겨났다.

술 취한 그 밤처럼 채하가 그녀를 탐하는 일은 없었다.

당연했다. 그땐 정말 이성을 잃어 단 한 번 실수한 것뿐이니까.

하지만 가끔 몸을 뒤척거리다가 손끝이 닿기라도 하면 설원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켜야 했다.

어쩌다 잠들지 않은 채로 눈이라도 마주칠 때면, 이상하게 가슴이 울렁거렸다.

저를 바라보는 채하의 눈빛은 꼭 계약 관계가 아니라 진짜라고 착각할 정도로 강렬했다.

그래서일까. 설원은 그에게서 애정이라는 낯선 감정을 갈구하게 되었다.

하나 그저 거래로만 남았어야 했다.

애초에 권채하는 타인에게 애정 따위를 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으니.

그를 사랑하게 되어버린 후로 설원은 비로소 외로움의 뜻을 알았다.


 


“엄마! 엄마아~ 빨리 일어나요.”

“으음…….”

팔뚝을 열심히도 흔드는 손놀림에 설원은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열었다.

곧 커다랗고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시야 가득 들어왔다.


“우주야……? 언제 일어났어?”

“우주는 아까 일어났죠! 엄마가 착한 어린이는 일찍 일어나야 한다고 했잖아요.”

“그랬지……. 우리 우주 참 착하네.”

희미한 미소를 드리우며 설원은 아이를 바라보았다.


“우리 우주 잘 때 불편하지는 않았어?”

“하나도 안 불편해요. 이층침대 너무 좋아요! 하늘에 떠 있는 것 같아요.”

그 말대로 푹 잘 잤는지 복숭앗빛 뺨에는 혈색이 돌고 있었다.

설원이 천천히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옛 생각에 빠져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지만, 제 컨디션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물론 채하와 한 지붕 아래 있다는 점은 여전히 싱숭생숭했으나, 빨리 적응해야 할 터였다.

어차피 3개월 동안은 여기서 지내기로 약속했으니.


“엄마. 우주 재윤 아빠한테 전화하고 싶어요!”

“재윤…… 아빠?”

“응! 전화 걸어주세요. 얼굴 보이는 거.”

해맑게 요청하는 우주를 보니 설원은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사실 섬에서 나와 이곳으로 올 때 재윤은 무척이나 반대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권채하라는 존재가 미덥지 못할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빨리~ 빨리요. 재윤 아빠가 할머니 할아버지랑 배 타러 가면 전화 안 된다고 했어요. 바다 멀리까지는 우주 목소리가 안 닿는대요!”

“……으응. 알겠어. 엄마가 얼른 걸어줄게.”

“와아! 신난다!”

핸드폰에서 재윤의 이름을 찾아 꾹 눌러준 뒤, 설원은 우주의 손에다 들려주었다.

곧 무척이나 반가운 기색이 넘치는 재윤의 얼굴과 목소리가 화면에서 흘러나왔다.


[이야~ 이게 누구야! 우리 우주 왕자님 아니야?]

“재윤 아빠!”

[우주 서울은 잘 도착했어?]

“네! 여기는 다 엄청 엄청 커요! 길도 크고, 집도 크고, 다 커요.”

[우리 우주 신나 보이네. 이 아저씨는 안 보고 싶어?]

“보고 싶어요!”

[얼마큼?]

“엄청, 엄청이요!”

계속되는 ‘엄청 엄청’의 향연에 뒤에 있던 설원도 피식 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러자 우주가 냉큼 화면에 그녀를 함께 비춰주었다.


“엄마! 엄마도 얼른 인사해요.”

“그래. 알았어.”

영상 통화는 오 분 가까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 짧은 사이 까르르 웃음소리가 바깥에 퍼지고 있다는 것을, 두 사람은 알지 못했다.

덕분에 통화가 끝났을 때 설원은 문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살기를 뒤늦게 눈치챘다.


“……권채하 씨.”

“일어났으면 아는 척 좀 해주지 그래.”

“어? 안녕하세요. 아저씨!”

“미안해요. 아이가 전화를 걸겠다고 해서. 그…… 아빠한테요.”

설원의 입에서 무심코 튀어나온 그 단어에 머리 위로 문을 짚고 있던 채하의 손마디에 뼈가 희게 불거졌다.

그녀가 움찔하기도 전에, 채하가 스르륵 팔을 내리곤 양 팔짱을 꼈다.


“누가 아빠라는 거야?”

“…….”

대답을 하지 못하는 설원을 뚫어져라 보던 채하가 이번에는 우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치 대신 대답해보라는 듯이.

이윽고 그 기색을 눈치챈 우주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기대에 부응해주었다.


“재윤 아빠예요!”

“흐음. 그 남자가 꼬마, 네 아빠야?”

“네! 저는 아빠가 엄청 엄청 많거든요! 재윤 아빠는 우주 아빠 1호예요.”

“…….”

“…….”

숨 막히는 침묵이 세 사람 사이에 내려앉았다.

말문이 턱 막힌 설원이 우주에게 무어라 하려는 찰나, 채하가 다시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명백히 해명을 요구하고 있는 두 눈은, 미묘한 감정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결국 설원은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그게…… 사실 우주는 섬에 있는 젊은 남자들을 다 아빠라고 불러요.”

“……뭐?”

채하의 기다란 눈매가 드물게 커진 눈동자 탓에 둥그레졌다.

변명하듯이 설원이 얼른 말을 덧붙였다.


“어린이집에서 한번 참관 행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젊은 섬 청년들이 우주가 안쓰러웠는지 다 같이 몰려와서 아빠 역할을 해줬거든요. 그때부터 다 아빠라고 불러요.”

“하.”

무미건조한 탄식이 채하의 입가에서 서늘하게 흘러나왔다.


“아무리 어린아이라고 해도 그렇지, 그걸 그대로 놔둬? 주변에서 얼마나 위험한 착각을 할지도 모르는데.”

“……워낙 작은 섬이라 우주를 다 알아요. 착각할 일은 없어요.”

“아니, 있지. 나만 해도 깜박 속아 넘어갈 뻔했잖아.”

둘 사이에 흐르는 불온한 기류를 감지했는지, 불쑥 우주가 쪼르르 채하가 서 있는 문 쪽으로 달려왔다.

그러더니 대뜸 채하의 커다란 한 손을 붙들었다.


“……!”

놀란 눈을 한 채하를 향해, 이어 아이가 순수하기 그지없는 말투로 권유했다.


“아저씨도 우주 아빠 할래요? 음……. 아저씨가 6호예요!”

우주의 순수한 제안에 채하는 한없이 실망스럽다는 듯 대꾸했다.


“황당하군. 왜 내가 1호가 아니지?”

“그건~ 1호랑 2호랑 3호랑 4호랑 5호는 섬에 벌써 있어요.”

“아니. 내가 1호를 해야겠어.”

“어어…….”

곤란해하는 아이가 고사리 같은 손가락을 접었다 펴며 작은 미간에 주름이 잡히도록 고심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설원이 둘 사이를 파고들어 만류했다.


“됐어요. 뭘 유치하게 그런 거 갖고 그래요. 그냥 6호 하면 되죠.”

“1호랑 6호가 같아? 그리고 애초에 왜 아빠가 6호까지 있어야 해? 하나만 있으면 되지.”

“설명했잖아요. 그건…….”

“어이. 꼬마.”

설원의 말을 냉큼 잘라낸 채하가 무릎을 숙여 우주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러고는 커다란 가르침이라도 주듯 또박또박 말했다.


“잘 들어. 아빠라는 건 집을 주고, 밥을 주고, 장난감을 주는 사람이야. 그리고 엄마와 엄청 엄청 가까이 있는 사람이고.”

그렇게 말하더니 채하가 쪼그려 앉은 자세 그대로 슬그머니 설원에게 몸을 붙였다.


“자, 그럼 지금 누가 아빠야?”

“어…… 음……. 그러니까.”

“정말, 그만 해요.”

보다 못한 설원이 채하를 톡 쳐서 밀어냈다.

우주의 눈동자에는 ‘이 아저씨가 내 아빠인가?’ 하는 의문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자, 우리 우주 착하지. 혼자 치카치카 할 수 있지?”

“네!”

설원이 능숙하게 아이를 구슬려 이 묘한 추궁 현장에서 내보냈다.

쪼르르 나가는 우주의 작은 등을 잠시 지켜보던 채하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그에게 한마디 하려는 듯한 설원을 막아서며 먼저 운을 뗐다.


“마침 좋은 타이밍이군. 당신한테 보여줄 게 있었거든.”

“……?”

길게 설명하는 대신 곧바로 채하가 품 안에서 서류를 하나 꺼내 건넸다.

그것을 받아든 설원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게 대체…….”

“뭘 그리 놀라. 놀랄 사람은 당신이 아니고 나 아닌가?”

“어떻게, 대체 어떻게 안 거예요?”

“모르는 게 바보 아닌가? 보자마자 내 어릴 때 얼굴이 보였는데.”

“…….”

“기억 안 난다는 사람치곤, 내가 어릴 때 저렇게 귀여울 리 없었다는 의심으로 가득한 표정이군.”

한쪽 입꼬리를 씰룩 올리며, 채하가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친자 확인 결과지를 유유히 다시 낚아챘다.

그러고는 선전포고하듯 나직하게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어때? 내가 아빠라는 사실은 이걸로 충분히 증명된 것 같은데.”

그의 뜨거운 숨결이 설원의 부드러운 귓불을 닿을 듯 야릇하게 스쳤다.

동시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더욱 나지막이 잠겨 들었다.


“이래도 내가 1호가 아니야?”

솜털을 스치는 숨결에 설원은 불에 덴 것처럼 황급히 얼굴을 떼어냈다.

의기양양한 채하의 표정을 보니, 이미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다 알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하긴 어차피 오래 속이지 못할 거란 건 알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들통날 줄은 몰랐지만.


“……우주한테는 말하지 말아요.”

“왜지? 아까 못 들었어? 아저씨도 우주 아빠 할 거냐고 물어보던데.”

“……아이가 혼란스러워할 거예요.”

“진짜 아빠를 만났는데 다른 아빠들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편이 덜 혼란스럽지 않겠어?”

수심 어린 설원을 반 바퀴 돌며 채하가 이번엔 반대쪽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귓불부터 목덜미까지 붉어지고 있는 게, 거울을 보지 않아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제 그런 반응을 그가 아주 유심히 살피듯 보고 있다는 것도.

그가 우주를 원할 거라고는 추호도 생각지 못했기에, 이런 태도는 실로 뜻밖이었다.

오히려 원치 않는 아이가 생겼다고 할까 봐 끝까지 모른척하려 했던 설원이었다.


“특히 그 남자.”

“……?”

“최재윤. 그 남자한테는 절대로 아빠라고 못 부르게 해.”

“그건 우주 마음이에요.”

“뭐?”

채하의 미간이 구겨졌지만, 설원은 굳건하게 말을 이었다.


“재윤 씨는 저랑 우주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사람이에요. 우주가 태어나서 가장 오랫동안, 가까이에서 본 남자고요. 재윤 씨가 없었으면…….”

으드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설원의 머리 위로 흘러나왔다.

곧 채하의 분노 어린 음성이 살벌하게 그녀를 향해 날아왔다.


“몇 년을 수절한 남편 앞에서 다른 남자 얘기를 너무 길게 하는 거 아닌가? 그리고.”

“…….”

“그렇게 다정하게 다른 남자 이름을 부르는 거, 아주 거슬려.”

그가 빙글 몸을 돌려 설원을 정면으로 마주 보고 섰다.

그러곤 설원의 자그마한 턱을 손으로 들어 올려 시선을 맞췄다.


“민설원. 당신은 내 이름만 다정하게 부를 줄 아는 아내였거든.”

아니라고. 그런 적 없다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채하의 강렬한 눈빛은 도망칠 틈을 주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내려올 듯한 고개의 각도에 무섭게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채하는 설원이 예상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가볍게 쥐고 있던 턱을 놓아주며 처음 보는 미소를 피식 지었을 뿐.


“걱정하지 마. 말 안 해. 저절로 알게 할 거거든.”

어떻게, 라고 묻기도 전에 채하가 우주가 갖고 놀던 장난감을 하나 집어 들곤 중얼거렸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잖아. 본능적으로 깨닫게 해줄 거야. 내가 아빠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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