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3년 만의 첫날밤
(14/111)
14. 3년 만의 첫날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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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3년 만의 첫날밤
2022.09.18.
그날 저녁, 채운 그룹의 수장인 권강호 회장이 귀가하자 허영주는 마지못한 듯 설원을 불러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우려와는 달리 권 회장은 몇 가지 기본적인 질문만 던지고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
저를 탐탁지 않게 여기긴 해도 그가 아들의 의사를 존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반면 허영주는 대놓고 싫은 기색을 표출했다.
그녀는 아예 설원에게는 한마디도 건네지 않고 철저히 없는 취급을 하고 있었다.
이런 취급을 받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지만, 상대가 시어머니일 때는 퍽 체감이 달랐다.
덕분에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식사 시간이 흘러갔다.
다시 방으로 돌아왔을 땐 암막 커튼 탓에 내부가 시간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컴컴했다.
설원은 방에 화분을 두는 것을 좋아해 늘 볕이 드는 것을 선호했지만, 채하는 정반대인 모양이었다.
“휴…….”
탁, 하고 불을 켠 뒤 설원은 꾹 참고 있던 숨을 한꺼번에 토해냈다.
혹여 있을지 모를 구설수에 대비해 웬만하면 일은 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채하가 넌지시 이야기한 바 있었다.
돈 때문이라면 당연한 얘기지만 걱정할 것 없다면서.
하지만 이렇게 집에서만 있는 생활은 안 봐도 감옥이나 다를 바 없을 것 같았다.
정식으로 하는 일이 아니더라도 조금 적응이 되면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설원은 구석에 놓아둔 쇼핑백을 집어 들었다.
축하해 줄만 한 결혼이 아니라고 에둘러 말했건만, 로라와 제임스는 끝끝내 결혼선물을 그녀의 손에 들려주었다.
학력이나 인맥 따위를 따지지 않고 온전히 제 실력으로만 인정해주었던 둘이었다.
지독한 텃세 속에서도 두 사람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그런 일만 아니었다면, 오랫동안 함께 일하고 싶은 좋은 사람들이었는데…….
찡해오는 마음을 애써 가다듬으며 설원은 천천히 포장을 풀었다.
“엇…….”
포장지를 뜯어내던 설원의 손이 당혹스러움으로 멈췄다.
예쁜 봉투 안에 들어 있는 물건의 정체를 확인하자마자 그녀의 뺨이 활활 달아올랐다.
누가 봐도 신혼 느낌이 폴폴 풍기는 그것.
중요한 곳이 상당히 휑하게 뚫려 있는, 대놓고 섹시한 레이스 슬립이었다.
“사, 사장님도 하여간……!”
제가 산 것도 아닌데, 민망함에 설원은 슬립을 얼른 다시 구겨 넣었다.
그때였다.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
채하가 벌써 돌아온 건가.
질겁한 설원은 슬립을 포장째로 수납장 안에 다급히 쑤셔 넣었다.
두 사람에게 오늘이 첫날밤인 것은 맞지만, 둘 사이에는 그런 ‘부부로서의 일’ 따윈 있을 수 없었기에.
이런 걸 들켰다가는 그의 얼음 같은 얼굴을 차마 똑바로 마주하기 어려울 터였다.
거의 던지다시피 그 물건을 처리한 뒤, 설원은 담담한 척 대답했다.
“드, 들어오세요.”
“대답도 참 굼뜨구나.”
뜻밖에도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남편 권채하가 아니라 허영주 여사였다.
불시에 시어머니를 단독으로 마주하게 된 상황에 설원은 바짝 긴장했다.
“흐음…….”
그녀가 실눈을 뜨고서 방 안을 둘러보더니 설원을 향해 대놓고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침입자라도 보는 듯한 시선에 설원은 어색하게 주춤거렸다.
그러자 그녀가 대뜸 구시렁대기 시작했다.
“안하무인으로 밀어붙인 거치곤 신혼 느낌이 하나도 안 나네. 따로 신혼 방도 안 꾸미고, 네가 그러자고 했니?”
“아. 네. 전 그냥 이 방을 같이 쓰는 걸로 충분해요.”
나름대로 겸손하게 뱉은 말이었건만, 그 말이 허영주를 더욱 자극했다.
“이 방? 채하 방? 네가 정말로 이 방에 있는 게 가당키나 하다 생각하니?”
“……네?”
“잘 들어. 채하가 뭐에 홀려서 너 같은 애랑 결혼까지 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이 결혼. 승낙한 적 없다.”
“…….”
“내가 봐둔 며느릿감은 따로 있어. 네가 아무리 이 방을 차지하고 있다 해도, 내가 너를 인정할 일은 죽을 때까지 없을 거다.”
딱히 대꾸할 말이 없는지라 설원은 그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어차피 이런 대우를 받을 거라곤 예상했었다.
하지만 봐둔 며느릿감이 따로 있다는 말은 조금 따갑게 그녀의 심장을 찔렀다.
권채하도 원래대로라면 그 여자와 결혼할 예정이었을까.
묵묵한 설원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허영주가 가까이 다가와선 눈을 치켜떴다.
그러고는 첫날밤을 맞이하는 신부를 향해 저주와도 같은 말을 퍼부었다.
“잘 들어라. 너, 최대한 눈에 띄지 말고 죽은 듯이 살아.”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무조건 피임해라. 임신은 절대 안 돼!”
“네?”
제가 잘못 들은 줄 알고 설원은 무심코 되묻고 말았다.
그러자 더욱더 날 선 독기를 뿜으며 허영주가 날카롭게 내뱉었다.
“만일 네가 우리 채하 아이라도 가졌다간, 그땐 정말 못 볼 꼴을 보게 될 거다!”
“……예. 알겠습니다.”
임신 같은 걸 우려할 필요는 당연한 말이지만 전혀 없었다.
애초에 두 사람은 부부관계를 가질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결혼한 첫날 밤, 채하는 자정이 훌쩍 넘어서야 겨우 집에 들어왔다.
그리고 설원은 그가 제 방에 선뜻 자신을 들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말 그대로 보여주기식으로 한방을 쓰는 것일 뿐, 채하는 그녀에게 침대를 내주고 서재에서 잠을 청했다.
이어져 있다고는 하나 엄연히 중간에 문이 존재하는 별개의 공간이었다.
한 침대는커녕 같은 방을 쓰지도 않으니, 허영주의 우려는 더욱이 쓸모없어졌다.
갓 상무직을 달은 채하는 미친 듯이 바빴고, 오로지 일에만 전념했다.
그에게 있어 결혼이라는 건 일상적인 야근보다도 못한, 아무것도 아닌 비즈니스의 하나일 뿐이었다.
명색이 결혼선물로 받은 슬립은 꺼낼 일조차 없이 먼지만 쌓여갔다.
다만, 결혼반지만큼은 채하의 요구로 매일 손에 끼어야 했다.
마찬가지로 ‘보여주기’의 일환이었다.
그 요구에 설원은 딱히 불만을 표하지 않았지만, 정작 그는 반지를 한 번도 끼지 않았다.
서운함을 느끼는 일조차 사치였기에 비슷한 감정이라도 밀려올라치면 애써 외면해버렸다.
‘이 결혼은 계약이야. 나한테도 거래일 뿐이야.’
스스로 마음을 다독이는 것에, 설원은 점차 익숙해져 갔다.
그가 나름 결혼선물로 준비해 준 작은 정원에 꽃을 심으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꽃이 피고, 꽃이 지고.
한 계절, 한 계절 지나다 보면 약속한 3년도 어느덧 바람결처럼 지나버릴 테니까.
다행히도 설원의 어머니는 아무런 금전적 걱정 없이 신약 치료를 계속할 수 있었다.
상태가 좋아지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더 나빠지지는 않고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채운 가의 주치의는 제 가족처럼 설원의 어머니를 돌봐주었다.
덕분에 컨디션이 조금 좋은 날에는 지팡이 없이 팔로 부축하며 잠깐씩 산책하는 일도 가능해졌다.
그것만으로도 설원은 충분했다.
비록 이름뿐인 남편 채하는 점점 더 바빠져 며칠에 한 번 얼굴 보기조차 힘들어졌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의 방에 정작 그의 온기도 향기도 사라져갔지만, 그것도 괜찮았다.
날마다 허영주의 무시와 모멸을 홀로 받아내야 했지만, 버틸 만했다.
마음에 외로움이라는 꽃이 잡초처럼 피어나도, 설원은 그가 선택한 아내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리라 마음먹었기에.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이제 계약이 종료되기까지는 채 반년도 남지 않았다.
유난히 한파가 심한 겨울인지라, 설원은 두꺼운 이불을 겹쳐놓고 늦게까지 책을 읽고 있었다.
“눈이 오나?”
머리맡의 창문 너머로 소복소복 눈이 내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추위를 많이 타면서도 유독 눈을 좋아하는 그녀였기에, 설원은 책을 내려놓고 커튼을 걷었다.
“……어?”
때마침 현관에서 들어오고 있는 채하의 모습이 보였다.
시계를 보니 오늘은 평소보다 더 늦은 귀가였다.
딱히 특별한 일도 아니었기에, 설원은 주황빛 가로등 아래로 내리는 눈을 조용히 감상하곤 커튼을 닫았다.
채하는 아예 서재 쪽에도 문을 달아 매번 잠든 설원을 지나쳐야 하는 불편을 제거했다.
그 때문에 안 그래도 적었던 그의 얼굴을 볼 일이 더욱 줄어들어 버렸다.
지금도 며칠 만에 그를 보는 것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방금 창 아래로 본 모습에 어쩐지 싱숭생숭해진 설원은 그냥 책을 덮어버렸다.
오늘은 이만 잠드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불을 정돈하고, 조명을 끄려던 순간이었다.
문가에서 기척이 느껴지더니 곧이어 불쑥 문이 열렸다.
“……!”
그 틈새로 보인 실루엣에 설원은 저도 모르게 흡 숨을 삼켰다.
권채하가, 붉게 물든 눈을 하고서 휘청이며 서 있었다.
“……채하 씨? 왜 여기에…….”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성큼 다가오더니 침대로 풀썩 쓰러졌다.
희미한 술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아무래도 취한 모양이었다.
“권채하 씨. 일어나요. 방에 가서 자야죠.”
“……여기가 내 방이야.”
취했음에도 그의 말투는 평소처럼 고저 없이 차분했다.
맞는 말인지라 반박하지 못하는 사이, 채하가 설원이 베고 자던 베개에 고개를 파묻었다.
왜일까.
순간 설원의 눈에 그가 한없이 안쓰럽고 약해 보였다.
채운 그룹의 냉혈한이자 황태자로 불리는 권채하가, 어쩐지 지금은 기댈 곳 하나를 갈구하는 연약한 초식동물 같았다.
저도 모르게 설원은 그의 찰랑이는 새까만 머리카락에 손을 뻗었다.
뒤통수에 닿은 손길에 그가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그것도 잠시, 순식간에 채하가 파묻었던 고개를 들어 설원 쪽으로 휙 돌렸다.
“…….”
두 사람이 시선이 맹렬히 마주쳤다.
채하의 눈동자 안에 담긴 설원의 몸이 살짝 떨린 순간, 그가 몸을 반쯤 일으켰다.
언제나 사람을 압도하는 강렬한 눈빛이 그녀를 향해 새카맣게 타오르고 있었다.
아주 위험한 욕망으로.
“얼른 가서 자요. 권채하 씨. 내가 일으켜 줄…….”
설원의 말끝이 채하의 뜨거운 입술에 단번에 삼켜졌다.
분명 술을 마셨을 텐데, 그의 입술에서는 아찔할 정도로 단맛이 났다.
이내 안을 휘젓는 숨결은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이런 감각은, 이런 입맞춤은 생전 처음이었다.
입술이, 몸이, 통째로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감각에 설원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열어 그를 받아들였다.
그러자 채하의 숨이 더욱 거칠어졌다.
그의 커다란 손이 처음으로 제 몸에 닿은 순간, 설원은 머리맡의 조명을 꺼버렸다.
창밖에선 어렴풋한 주황색 가로등의 빛이 새어 들어와 두 사람의 겹쳐진 실루엣을 비춰주고 있었다.
옷자락이 침대 아래로 떨어지는 소리가 땅 위에 눈이 소복소복 쌓이는 소리처럼 듣기 좋게 귓가를 간지럽혔다.
동시에 아주 다정한 목소리가 설원의 귀에 내려앉았다.
“민설원.”
나직하게 이름을 부르는 음성이 너무도 달콤해 설원의 눈꼬리에 눈물이 고였다.
그만큼이나 다정하게 그의 손과 입술이 그녀의 몸 곳곳을 탐했다.
제가 이 손길을 원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열띤 몸짓에 달아오른 몸은 어느새 추위를 까맣게 잊어버렸다.
마침내 하나가 된 순간 꿈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었지만, 생전 처음 느끼는 강렬한 감각은 이게 현실이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버거워 바르작대는 설원의 작은 손에 단단히 깍지를 낀 채 채하는 몇 번이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마치 그동안 부르지 못해 한이라도 된 사람처럼.
깊은 새벽, 눈이 멈출 때까지 두 사람은 서로를 갈구하고 또 갈구했다.
3년 만의 첫날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