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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그의 향기
2022.09.14.



“아악! 짜증 나!”

기어코 같이 가자는 허영주를 먼저 보내고, 백사라는 제 차의 핸들이 부서져라 내리쳤다.

손톱 끝에서 번쩍이던 네일 파츠가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조금 전 채하의 집에서 본 두 사람이 눈 안의 모래알처럼 거슬리고 거슬렸다.

민설원, 그 여자와 아마도 권채하의 아이.

그토록 그 꼴을 보지 않으려 애썼건만, 결국은 이런 날이 오고야 말았다.


“뭐? 기억이 안 난다고?”

아까 설원이 한 말을 떠올리며 백사라는 코웃음을 쳤다.

권채하는 몰라도 자신은 진실을 알고 있지 않은가.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민설원은 진짜로 바다에 빠진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몸이 안 좋을 까닭도, 기억을 못 할 까닭도 없었다.

한데 설마 이런 식으로 기억을 잃은 척하고 돌아올 줄이야.


“하…….”

아까 설원을 바라보던 권채하의 눈빛을 떠올리니 미칠 듯한 짜증이 치밀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거의 다 왔는데!

백영 그룹을 앞세워 채운을 압박함과 동시에 허영주를 살살 구워삶아, 채하와의 혼담을 기껏 성사 직전까지 끌고 온 백사라였다.

한데 저 지긋지긋한 여자가 다시 나타나다니, 이래서야 5년 전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그때도 거의 다 이뤄진 혼사에 민설원이라는 잡종이 나타나 제 인생을 훼방 놓지 않았던가.


“민설원…… 두고 봐. 감히 또 내 앞길을 방해해?”

분노로 콱 깨문 입술에선 희미한 피비린내가 풍겼다.

나름대로 인정을 베풀어 도망칠 기회를 주었건만, 먼저 약속을 어긴 건 민설원 쪽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이번에는 확실하게 치워줄 작정이었다.


 


“괜찮아? 많이 놀란 것 같은데.”

“……전 괜찮아요. 그보다 우주한테 가 봐야겠어요.”

다가오는 채하에게서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치며 설원이 빠르게 거리를 두었다.

어차피 모른 척 잡아뗐으니 방금의 불청객들에 대해 따로 나눌 말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설원은 그들에게 ‘기억을 잃은 상태’로 일관할 작정이었으니까.

설령 있다고 해도 그에게 할 만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게다가 채하가 불쾌해한 것 이상으로, 설원 역시 그 둘과 마주친 게 몹시 거북했다.

이곳에 돌아올 결심을 한 이상 언젠가 마주치리라 예상은 했지만, 그게 바로 오늘일 줄은 몰랐다.

제게 그랬듯 허영주가 제 피가 흐르는 우주 또한 눈엣가시로 여길 것은 자명했다.

그런 만큼 가능하면 우주를 눈에 띄게 하지 않고 싶었는데…….

채하가 그녀의 표정을 살피더니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럼 같이 저녁이나 먹지. 내가…….”

“아니요.”

단호하게 설원이 채하의 말을 끊었다.

어떤 권유를 하든 지금은 도란도란 셋이서 밥을 먹을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오기 전에 우주랑 요기를 해서 괜찮아요. 우주 먹을 간식은 제가 따로 갖고 오기도 했고요.”

“그래. 그럼 방에 들어가서 일찍 쉬도록 하지.”

조금 머쓱한 듯 채하가 다시 방으로 돌아가자는 손짓을 했다.

그러나 이번엔 더욱 단호하게 설원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저는 우주랑 같은 방을 쓸게요.”

“거긴 좁아.”

“좁긴요. 원래 지내던 방에 비하면 세 배는 커요. 아까 보니까 침대도 이층침대던데요.”

“하…….”

명백히 그녀가 저와 같은 방을 쓰는 것을 거절하고 있음을 깨달은 그가 거칠게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러고는 또박또박 반박을 해왔다.


“그 나이쯤 되면 혼자 잘 줄도 알아야 하는 거야.”

“우주는 아직 혼자 자 본 적이 없어요.”

“그럼 잘됐네. 이참에 혼자 자면 되겠군.”

“안 돼요. 우주는 겁이 많아요.”

“그래 보이지 않던데.”

“어쨌든 안 돼요.”

완강한 설원의 태도에 채하가 또다시 나직한 숨을 내뱉었다.

어떤 말로 유혹해도 그녀는 오늘 제 침대에 함께 눕지 않을 터였다.

할 수 없이 채하는 특별히 한발 양보하기로 했다.

방금 휩쓸고 간 폭풍 탓에 설원도 조금은 안정이 필요할 테니까.


“알겠어. 그럼 그 건은 내가 나중에 우주랑 따로 협상하지.”

“…….”

“푹 쉬어. 비좁은 이층침대에서.”

어딘가 뒤끝이 느껴지는 묘한 말을 내뱉고는 채하가 무심히 제 방으로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설원도 들리지 않을 한숨을 작게 내쉬곤 걸음을 옮겼다.

그날 밤, 방에 있는 모든 장난감을 하나하나 다 가지고 논 우주는 단잠에 빠져들었다.

반면 설원은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침대 위편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새근새근 숨소리에도 도무지 잠이 찾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다시는 돌아올 일 없을 거라 여겼던 채운 가에, 채하의 곁에 와 있지 않은가.

생각해보면 애초부터 목적이 뚜렷했던 결혼이었다.

그와의 결혼 생활은 처음부터도 아무런 기대가 없었고, 그렇기에 서로가 약속한 역할에만 충실하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3년이라는 시간은 설원의 마음에 서서히 균열을 만들어냈고, 결국 그 틈 사이를 권채하라는 존재가 깊숙이도 파고들어 버렸다.

처음의 그 다짐이 변하지만 않았더라면, 이런 상황에 이르지 않을 수 있었을까.

권채하. 그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눈을 질끈 감고서 설원은 8년 전, 처음 채운 가에 들어왔던 무렵을 떠올렸다.

*

시야를 반은 가리고 있는 높다란 담장, 대문이라고 부르기에도 멋쩍은 커다란 입구.

그 안으로 자리한 웅장한 독채 건물은 거의 ‘성’이라 봐도 무방했다.

약속대로 혼인 신고를 마친 설원은 얼마 없는 짐을 가지고서 채운 가에 입성했다.


‘나는 회사 가야 하니까 집에는 먼저 들어가 있어. 기사가 데리러 갈 거야.’

아침에 채하에게서 도착한 메시지를 설원은 다시 한번 들여다보았다.

약속대로 채하는 그녀의 어머니를 채운 가의 전담 병원 특실에 모셨다.

병원비를 걱정하면서 신약 투약을 망설일 필요도, 일하는 동안 어머니가 혼자 쓰러질까 전전긍긍할 필요도 이젠 없어진 것이었다.


“결혼…….”

설원은 새삼 그 단어를 읊조려 보았다.

연애 같은 것에 환상을 가져본 적은 없었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결혼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그녀였다.

두 번 만난 남자와 거래를 조건으로, 사랑 없는 결혼을.

하나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좋든 싫든 앞으로 3년 동안 자신은 권채하의 아내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때였다. 황무지 같던 마음에 작은 볕이 드는 듯한 풍경이 눈에 띄었다.

짐가방을 얼른 바닥에 내려두고, 설원은 드넓은 집의 가장 안쪽에 있는 풀밭으로 걸어갔다.

그곳엔 저마다의 아름다움과 생명력을 뽐내는 꽃들이 소담하게도 피어 있었다.

봄의 끄트머리에서도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노란 수선화가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반가움에 설원은 무릎을 굽히고 자리에 꿇어앉았다.


 


“수선화가 아직 피어 있네.”

엄마의 이름과 똑같아서 설원이 가장 좋아하는 꽃이었다.

눈을 감고 이 노란 꽃의 향기를 맡으며, 설원은 며칠 전 채하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혼수 같은 건 해올 필요 없어. 집에 이미 전부 있으니까. 아, 혹시 따로 원하는 게 있나?’

 
머뭇거리던 설원은 그에게 딱 하나 부탁을 건넸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 낯선 집에서 마음 둘 만한 공간을.


‘마당에 작은 정원을 갖고 싶어요. 넓지 않아도 좋아요. 그저 좋아하는 꽃 몇 송이 심을 수 있을 정도만…….’


‘바로 준비하라고 하지.’

 
꽃잎과 줄기에서 나는 싱그러운 향은 언제나 그랬듯 설원을 위로해주었다.

이 집에 처음 들어와 맞이한 장면이 이토록 생생한 생명력을 지닌 수선화라서 다행이었다.

작은 기쁨에 빠져 있던 그 찰나, 등 뒤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사모님 되십니까?”

“……!”

소스라치게 놀란 설원이 벌떡 몸을 일으키자, 기척을 낸 당사자가 주춤거리며 다가왔다.

푸근한 인상을 한 아주머니의 손에는 어느새 설원의 짐이 들려 있었다.


“놀라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저는 채운 가의 일을 돌보고 있는 입주 가사 도우미예요. 작은 사모님께서는 편하게 안산댁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아……. 안녕하세요.”

“따라오세요. 사모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밖에서 오래 계시면 한소리 들으실지 몰라요. 집안사람들한테는 유독 엄하신 분이셔서요.”

“……네. 알겠습니다.”

설원은 안산댁을 따라 천천히 집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나 그녀의 말대로 한소리를 듣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허영주, 채운 그룹의 안주인이자 채하의 어머니는 설원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마자 휙 등을 돌려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덕분에 제대로 된 인사조차 건네지 못한 채 설원은 3층으로 올라가야만 했다.

앞으로도 이런 가시방석 같은 생활이 이어질 테니 그의 방이 3층에 있다는 점은 다행인지도 몰랐다.


“이쪽입니다.”

복도를 걷던 안산댁이 한 방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그녀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오늘부터 이 방을 쓰라고 하셨습니다. 불편한 거나 필요한 게 있으면 저한테 바로 말씀하시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열린 문 사이로 설원은 방을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조금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저…… 여기는 채하 씨의 방 아닌가요?”

그랬다. 설원은 당연히 각방을 쓸 것이고, 제게 새로운 방을 줄 것이라 짐작했다.

한데 안산댁이 그녀를 안내한 곳은 누가 봐도 그의 방이었다.

연한 회색 벽지에 무채색의 인테리어. 군더더기라고는 조금도 없는 주인 그 자체인 방.

서재가 딸린 데다 족히 열 명이 함께 써도 될 만큼 넓었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두 사람은 어디까지나 계약에 의한 결혼일 뿐 진짜 부부는 아니지 않은가.


“상무님 방이 맞습니다. 뭐 문제라도?”

“아……. 아닙니다. 안내해주셔서 감사해요. 이만 가보셔도 괜찮아요.”

“예. 언제고 필요한 게 있으시면 옆에 벨을 누르시면 됩니다.”

문이 닫히자 설원은 작게 숨을 토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당황한 나머지 하마터면 실수를 할 뻔했다.

권채하가 제게 요구한 것, 그것은 비록 이름뿐인 아내라 할지라도 겉으로는 완벽하게 아내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던가.

갓 결혼한 부부가 시작부터 각방을 쓴다면, 어머니 허영주의 눈을 절대 속일 수 없을 터였다.

짐가방을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밀어놓고 설원은 찬찬히 방 안을 살펴보았다.

옷이나 소지품 등은 대부분 빌트인 수납장에 들어가 있는지, 밖에 내놓은 것은 거의 없었다.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한 침대엔 베개가 하나밖에 놓여 있지 않았지만, 설원은 애써 시선을 두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러다가 문득 어떤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이 방에서는 권채하의 향기가 났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방이니까.

하지만 이 방에서 나는 그윽한 우드 향이 그의 머리카락에, 손에 희석되어 묻어난다는 사실을 설원은 이 순간 새삼 알게 되었다.


“……나한테도 이 향이 나게 될까.”

제가 말해놓고도 우스워져 설원은 픽 하고 웃음을 흘렸다.

그게 무슨 중요한 문제라고.

그가 저를 위해 비워둔 듯한 수납장에 대충 정리를 끝낸 설원은 마지막으로 남은 조그만 상자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딱 봐도 고가의 결혼반지가 담긴 상자.

조심스러운 손길로 설원이 리본의 매듭을 풀자, 전과 변함없이 눈부시게 빛나는 다이아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끼워줄 사람도 없는 결혼반지를, 설원은 천천히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웠다.

마치 두 사람의 거래처럼 반지는 딱 들어맞았다.

허공에 손을 들어 올린 채 설원은 한참이나 물끄러미 그 반지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계약 결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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