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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불청객 (12/111)


12. 불청객
2022.09.11.



 
무엇을, 이라고 물을 새도 없었다.

채하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선 냉큼 침대로 이끌었다.

설원의 가녀린 몸이 순식간에 그가 떠미는 대로 아래를 향해 무너졌다.

등이 침대에 닿는 것이 느껴짐과 동시에 설원의 두 눈이 놀라움으로 커다래졌다.

무방비한 제 위로 채하의 욕망 어린 눈빛이 마치 햇살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말했잖아. 기억 안 나면 나게 해주겠다고.”

그러니까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물어야 하는데,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입술을 열면 당장이라도 그가 입을 맞춰올 것만 같았기에.

머릿속으로는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건만, 저를 보는 채하의 눈빛은 꼭 그녀를 삼켜버리기라도 할 듯 느껴졌다.


“……이러지 말아요.”

애써 당혹스러움을 감추며 설원이 그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그러나 채하는 맹렬한 시선을 조금도 거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되레 의아하다는 듯 그가 설원에게 되물었다.


“뭘 말이지.”

“우린 이럴 만한 사이가 아니에요.”

그 말에 채하의 입매가 비틀리듯 묘한 웃음을 띠었다.

여전히 몸 아래 그녀를 가둔 채 그가 낮게 속삭였다.


“부부 사이가 이럴 만한 사이가 아니면, 또 뭐란 말이지?”

“말했잖아요. 전 당신과 부부였던 거, 기억 안 나요.”

“그러니까 나도 말했잖아. 기억하게 해주겠다고.”

도무지 물러날 의지라곤 없어 보이는 채하를 보며 설원은 진심으로 곤란해졌다.

그의 강건한 눈빛은 마치 제 속내를 훤히 꿰뚫고 있는 듯했다.

어설프게 시선을 피해 눈알을 굴리던 설원은 마침 딱 좋은 핑곗거리를 찾아냈다.


“옆방에 우주가 있잖아요.”

“말은 바로 해야지. 옆옆 방이야. 아주 아득한 거리지.”

“…….”

“그리고.”

채하가 저를 피하는 데 안간힘을 쓰고 있는 설원의 뺨을 감싸선 정면으로 다시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위아래로 완벽히 마주쳤다.

마치 섬 안, 꽃집에서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샅샅이 훑었던 것처럼 그가 이번엔 눈으로 그녀를 훑어내렸다.

이윽고 이를 악문 듯 목을 긁는 목소리가 채하에게서 흘러나왔다.


“5년 동안 안고 싶어 미칠 뻔했던 여자가, 꿈도 신기루도 아닌 실체로 눈앞에 있는데 참으라는 건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

“그러지 마.”

“……권채하 씨.”

“참으라고 하지 마.”

왜일까. 울컥 눈물이 치밀어 오를 것 같아, 설원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려 했다.

그러나 그녀가 깨물기도 전에 채하가 먼저 입술에 손가락을 올려 저지했다.


“당신 몸에 상처 내지 마. 아주 작은 것도 절대 안 돼.”

“…….”

이 남자가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왜 이런 비통한 표정을 짓는 걸까.

거듭 혼란스러운 나머지 설원은 그를 밀어내는 것도 잊고 말았다.

그때였다. 1층에서 요란한 기척이 느껴졌다.

화들짝 놀란 설원이 잽싸게 몸을 일으켰다.


“누가 왔나 봐요.”

“……하.”

거칠게 이마를 쓸곤, 채하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누가 온 건지 이미 알고 있는 기색이었다.

순간 설원의 뇌리에 불길함이 스쳤다. 설마…….


“당신은 내려오지 말고 여기에 있어.”

“……네.”

마치 꼭꼭 숨기기라도 하듯 채하가 문을 단단히 닫고는 방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설원은 가슴을 쓸어내리곤 몸을 일으켰다.

우주가 혼자 잘 있는지도 확인해야 했거니와, 이 침대 위에 홀로 남는 건 더욱이 싫었기에.

*



“함부로 문 열고 들어오지 말라고 분명히 경고했을 텐데요.”

“경고? 얘 좀 봐라. 엄마한테 경고가 뭐니? 싫으면 그놈의 비밀번호를 바꾸면 될 거 아냐! 청승맞게 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안 그러니, 사라야?”

“어머님. 채하 씨한테 너무 뭐라고 하지 마세요. 연락 없이 왔으니 놀랄 만도 하죠.”

“……백사라.”

허영주의 뒤에서 웃음기를 띤 채 집을 둘러보고 있는 여자를 향해 채하가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렸다.


“놀란 게 아니라 화난 거다. 네가 우리 집엔 무슨 일이지? 어른이 무단침입을 하면 말리지 못할망정 동조나 하다니 어이가 없군.”

“채하 씨도 참. 무단침입이라뇨. 어머님은 채하 씨가 걱정되어서 온 거예요.”

“걱정?”

기가 찬다는 듯 되묻는 채하를 향해 백사라가 한껏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 허영주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값비싼 명품을 두른 차림새.

거기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풀 세팅한 모습은 그녀의 위선적인 미소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나름 세련된 미인이라고 봐줄 수도 있었으나, 그녀에게 몇 년을 시달린 채하의 눈에는 가히 마귀나 다름없이 보였다.

곧 그 마귀가 새빨갛게 칠한 입술을 열었다.


“네. 요 며칠 채하 씨 회사에서도 집중을 못 하고 유난히 피곤해 보인다고요. 그래서 특별히 제가 보약을 지었어요. 오늘은 이걸 가져다주려고 온 거예요.”

“내가 피곤한 거랑 백사라 네가 보약을 짓는 건 인과관계가 좀 이상하다 생각지 않나?”

“어머. 채하 씨도 참! 채하 씨 몸을 제가 안 챙기면 누가 챙겨요?”

“그래. 채하야. 우리 사라가 얼마나 너를 끔찍하게 생각하는지 아니?”

아양 섞인 백사라의 말투를 채하와는 달리 무척이나 흡족해하며, 허영주가 말을 보탰다.

채하의 머리가 또다시 지끈거려왔다.

백영 그룹과의 혼담이 오가면서부터, 어머니 허영주는 제집에 불쑥불쑥 쳐들어오기 시작했다.

채하의 생일부터 시작해 가족의 것을 다 넣어보다 안 되자, 할 수 없이 설원의 생일과 결혼기념일까지 죄다 입력하다 얻어걸린 것이었다.

그렇게 찾아온 그녀는 한참이나 집 안을 휘젓고 다니며 혼자 사는 남자 집이라 적적해 죽겠다는 둥 재혼할 것을 종용해댔다.

상대는 당연히 눈앞의 이 여자, 백사라였고.

한동안 강하게 경고한 덕에 잠잠해진 줄 알았더니, 제 어머니를 너무 만만히 본 모양이었다.

눈앞의 침입자들을 서늘하게 보며 채하가 시선만큼이나 서늘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저도 끔찍하게 생각합니다. 네. 정말로 끔찍하네요. 두 사람 이러는 거.”

“권채하!”

허영주가 들고 있던 핸드백을 차마 아까워 던지진 못하고 마구 흔들어댔다.

이제 이다음 차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과장되게 호들갑을 떨며 새 며느릿감으로 백사라를 주입하는 일.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지금 이 집엔 제 진짜 아내 민설원이 버젓이 있지 않은가.

친자 확인 검사로 분명하게 그의 아들로 밝혀진 우주와 함께.

그러니 오늘은 다소 거친 방식을 쓰더라도 두 사람을 빠르게 내쫓을 작정이었다.

이곳으로 돌아오는 대신 곤란한 일은 생기지 않게 하겠다고, 그녀와 약속한 바였다.

그런 만큼 절대 이 둘과 설원을 마주치게 해서는 안 되었다.


“어머니. 백사라. 두 사람…….”

“……?”

채하의 말은 채 끝맺음을 하지 못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쪽으로 일제히 향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똘망똘망한 눈을 한 우주가 이쪽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우주야! 내려가면 안 된다고 엄마가…….”

“……!”

시간이 멈춘 듯한 정적이 그들의 사이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가장 먼저 말문을 튼 것은 놀란 토끼 눈을 뜬 채 입을 벌리고 있던 허영주였다.


“너, 너, 너…….”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손을 덜덜 떨며 허영주가 설원을 가리켰다.

그러다가 설원이 어깨를 붙잡고 있는 자그마한 아이로 시선이 향하곤, 손을 더욱 세게 떨었다.

반면 백사라 쪽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설원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그 둘의 시선을 따라 채하가 덤덤하게 설원과 우주를 쳐다보더니, 곧 모자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왜 내려왔어. 편하게 쉬고 있으라니까.”

평소의 채하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다정한 말투에 백사라의 입매가 기묘하게 뒤틀렸다.

동시에 허영주가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거야!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네가 왜!”

“……어머니.”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네가!”

“어머니!”

분노어린 채하의 음성이 위세 등등하던 허영주를 움찔하게 했다.

여전히 백사라는 설원을 향한 적대의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싸늘한 눈빛이 설원과, 누가 봐도 채하를 똑 닮은 아이를 훑어내렸다.


“……어머님. 오늘은 이만 돌아가죠.”

“뭐? 가자고?”

“오늘은 손님이 와 계신 모양이니까요.”

애써 웃음을 지으려 노력하고 있지만, 그녀의 낯빛에 분노가 가득 차 있다는 것쯤은 계단에 목석처럼 서 있는 설원도 알 수 있었다.

그때 채하가 백사라를 향해 따끔한 일침을 가했다.


“손님? 손님은 그쪽이겠지. 그것도 불청객이고.”

“…….”

“그리고 이쪽은 손님이 아니라 내 아내, 민설원이야. 잘 알고 있을 텐데.”

“야! 권채하!”

더는 못 참겠다는 듯 허영주가 다다다 달려오더니 설원에게 마구 삿대질하며 소리를 쳤다.

몇 년 전에도 줄기차게 들었던 익숙한 대사의 향연이었다.

우주가 듣기엔 적절치 않을 거 같아 설원은 작은 등을 톡톡 쳐 올라가란 신호를 보냈다.

말을 잘 듣는 우주가 냉큼 2층으로 올라가는 기색이 느껴지자, 설원은 천천히 계단 아래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두 사람 앞에서 차분하게, 미리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이곳에 돌아올 결심을 한 순간부터 그들에 대한 대응은 정해져 있었으니까.


“죄송하지만, 누구세요?”

“……!”

설원의 말에 허영주의 눈이 한계치까지 커졌다.

곧 그녀가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냐는 듯 채하를 한 번 보고, 백사라를 한 번 보았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건 백사라도 마찬가지였기에, 백사라는 설원을 계속해서 노려보았다.

하지만 설원은 정말로 두 사람을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어색하고도 불편한 상황을, 채하가 설원의 한쪽 어깨를 감싸 안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집사람이 몸이 좀 안 좋습니다. 기억에 문제가 생겼어요.”

“뭐? 문제? 기억 상실 같은 거 말이야?”

“예. 지금은 저조차 기억을 못 합니다.”

“뭐…… 뭐야?”

기억도 못 하는 여자를 왜 집에 데려왔냐는 노골적인 표정으로, 허영주가 의심스럽다는 듯이 설원을 위아래로 훑었다.

과연 뭔가 넋이 나간 것처럼도 보이는 것이, 옛날의 똑 부러진 모습과는 좀 달라 보였다.


 


“어쨌든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하니 이만 돌아가 주세요. 아내가 놀라지 않도록, 이렇게 불쑥 찾아오는 일도 없도록 하시고요.”

“권채하, 너…….”

“백사라. 너도 마찬가지야. 아내가 멀쩡히 집에 있는데 네가 여기에 올 이유는 어머니보다 더더욱 없겠지.”

어깨를 부들거리며 백사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고는 가져왔던 보약을 그대로 들고는 현관을 부술 듯 요란하게 나가버렸다.

그 뒤를 허영주가 다급하게 이름을 부르며 뒤따라 나갔다.

명색이 채운 그룹의 안주인이 되어서 왜 저렇게 백사라에게 안달복달하는지.

아마도 백사라가 대대손손 혈통 좋은 재벌가의 금지옥엽 막내딸인 점이, 어머니의 출신에 대한 욕구를 대리만족시켜주는 것일 터였다.

형을 통해 이루지 못한 부질없는 바람 또한.

채하는 고개를 저으며 계단으로 다시 올라섰다.

뭐가 되었든, 지금의 그에게는 이 위에 있는 두 사람이 가장 중요했다.

백사라 같은 불청객 따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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