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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기억 안 나면 날 때까지 해줄 테니까 (11/111)


11. 기억 안 나면 날 때까지 해줄 테니까
2022.09.07.



“대왕 고양이가 아니고 대장 고양이야. 우주야.”

“응? 대장? 대왕 아니에요?”

“이리 와. 얼른 들어가자. 우리 우주 세수부터 해야겠네.”

채하의 앞에서 무방비하게 웃어버렸음을 깨달은 설원이 아이를 앞세워 현관으로 향했다.

그러나 막상 제 손으로 비밀번호를 누르기 멋쩍어, 설원은 살짝 걸음을 늦췄다.

0524. 5월 24일. 두 사람의 결혼기념일.

그런 것은 이제 그녀에게 어떤 의미도 되어선 안 되었다.

아니, 처음부터 아무런 의미도 두지 않았어야 했다. 그러지만 않았다면…….


“어……?”

밀려오던 과거를 멈춰 세우듯 의아한 풍경이 설원의 시야에 들어왔다.

현관에서 바로 보이는 마당의 가장 안쪽에 처음 보는 건물이 하나 생겨나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그마한 별채에 가까운 조립식 건물이었다.

창문 하나 나 있지 않은 데다 문이 단단히 닫혀 있어, 어쩐지 살풍경한 분위기를 풍겼다.

자세히 보니 문에 자물쇠도 채워져 있는 것 같았다.


“저긴 신경 쓸 거 없어.”

“아…….”

설원의 시선이 향한 방향을 눈치챈 채하가 대뜸 다가와 시야를 가렸다.

그의 커다란 체격에 가려 그 묘한 건물은 더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들어가지도 말고.”

“……그럴게요.”

어차피 잠겨 있는 것 같은데 굳이 들어가지 말라 신신당부까지 하다니 의아했지만, 설원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도 그랬듯 지금도 여전히 권채하의 영역을 침범할 생각 따위, 그녀에겐 추호도 없었기에.


‘딱 3개월만…… 3개월만 기억 못 하는 척하면서 엄마의 유서만 받아서 돌아가는 거야.’

이미 한 바 있는 결심을 5년 만에 돌아온 집 앞에서 다시 굳건하게 다짐하며, 설원은 우주와 함께 안으로 발을 디뎠다.


 


“와~ 집이 엄청 엄청 넓어요!”

이번에도 순수한 감탄과 함께 우주가 쪼르르 드넓은 거실을 향해 달려 나갔다.

한쪽이 완전히 통창으로 되어 있어, 정원이 한눈에 들여다보이는 공간이었다.


“우주 이렇게 큰 창문은 처음 봐요! 엄청 엄청 커요.”

유리창에 두 손과 코를 꾹 붙이고서 우주가 바깥을 신비한 광경이라도 되듯 내다 보았다.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채하의 눈치를 설원이 슬쩍 살폈다.

혹여나 아이가 깨끗한 창에 손자국을 낸다고 싫어하는 건 아닐까.

제가 알던 권채하는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를 애초에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니 아이를 좋아할 리는 더욱이 만무했다.

그에 생각이 미친 설원은 얼른 창가로 다가가 우주를 떼어내려 했다.

그때였다.

약간의 웃음기가 묻어나는 말투로 채하가 무심히 중얼거렸다.


“엄청이라는 말을 좋아하는 모양이군.”

“……원래 이맘때엔 그래요. 애들은 과장된 표현을 많이 쓰니까요.”

“그런가.”

왜인지 그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린 듯 보였다.

채하는 우주를 창가에서 떼어내는 대신 아이에게 다가가 무어라 속삭였다.

곧 우주의 눈에 반짝임이 스쳤다.

무슨 마법을 부렸는지, 우주가 채하를 따라 어디론가 총총 가기 시작했다.

꼭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르듯 설원도 함께 그 뒤를 따라갔다.

세 사람이 도착한 곳은 2층에 있는 파스텔 톤의 문이 달린 방이었다.

2층에 이런 색깔 문도 있었던가, 설원이 갸웃하는 사이 채하가 방문을 활짝 열었다.


“꼬마, 여기는 어때?”

“우와아아!”

우주가 안으로 잽싸게 들어가더니 방 안에 놓인 것들을 하나하나 반짝이는 눈으로 살피기 시작했다.

입에서는 연신 ‘엄청나! 엄청나!’ 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운동장처럼 넓은 방에는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어린이 방이 구현되어 있었다.

침대부터 책상, 수납장, 탁자 등 완벽하게 구색을 갖춘 유아용 가구들은 한눈에 봐도 엄청난 고가임이 틀림없었다.

거기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동화책과 온갖 처음 보는 장난감들까지.

우주뿐만이 아니라 어른인 설원마저도 홀려버릴 것 같은, 동화 속의 방이었다.

도토리를 숨겨놓은 다람쥐처럼 방 이곳저곳을 파헤치고 있는 우주를, 채하가 뒤에서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우주가 엄청나다는 감탄사를 한 번 내뱉을 때마다 그의 입가가 씰룩이는 것 같았다.


“여기가 이제부터 꼬마, 네 방이다.”

“정말요? 우와! 신난다~ 엄마! 우주 방이 생겼어요!”

방방 뛰며 좋아하는 아이를 보니 설원은 기쁘면서도 안쓰럽고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였다. 우주가 활짝 웃으며 밝게 외쳤다.


“아저씨는 좋은 아저씨예요!”

그 단어에 채하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하지만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아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화제를 전환했다.


“집에는 내일부터 도우미가 오기로 했어. 집안일 같은 건 하나도 안 해도 되니까 당신은 편하게 지내면 돼.”

“……고마워요.”

“그리고 우주 어린이집은 이 근방에서 최고로 좋은 곳을 알아놨어. 다음 주부터 등원할 수 있을 거야. 운전기사도 따로 붙일 거고.”

“네…….”

그가 채운 그룹의 후계자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갑작스레 호화로워진 생활에 설원은 조금 당혹스러웠다.

다행히 우주는 아직 그런 것을 판단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다.

엄마의 친한 친구라는 말을 의심 없이 믿을 정도였으니.

설원은 장난감 삼매경에 빠져 있는 우주의 작은 등을 새삼스레 쳐다보았다.

섬에서 근근이 살아가느라 장난감도 별로 사주지 못했었는데.

호기심 넘치는 아이가 이토록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복잡미묘한 기분이 밀려왔다.


‘……이 아이에게 아빠의 존재를 숨긴 채 사는 게 옳은 일일까?’

우주는 채하를 많이 닮은 아이였다.

유난히 흰 피부는 저를 빼닮았지만, 새카맣게 윤기 나는 생머리에 또렷한 콧대와 눈망울은 채하의 것이었다.

제가 보면서도 연상되는 얼굴에 마음이 콕콕 쑤셔왔을 정도인데, 과연 예리한 그의 눈을 속일 수 있을까.

그렇다 해도 이제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일단 최대한 노력해보는 수밖에는.

생각에 잠겨 있는 그녀에게 옆에서 채하가 조용히 속삭였다.


“자, 그럼 꼬마는 여기서 잠깐 놀고 있으라고 하고 우린 다른 곳으로 가지.”

“다른 곳이요?”

“그래. 당신이 쓸 곳들을 안내해줘야지.”

맞는 말이었기에 설원은 우주에게 놀고 있으라 당부한 뒤 채하를 따라 방을 나섰다.

어차피 이 넓은 집에서 그녀가 쓰던 공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 점에 안심하며 걸음을 옮기던 설원의 앞에서, 뚝 하고 채하가 먼저 멈춰 섰다.


“우선 여기, 당신 드레스룸.”

“드레스룸이요……?”

제게 따로 드레스룸이 있었던가? 설원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자 채하가 조금 전 우주에게 했던 것처럼 방문 하나를 활짝 열어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안을 본 설원은 놀란 나머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아까 우주의 방이 쇼룸을 옮겨왔다면, 이 드레스룸은 백화점을 고스란히 옮겨다 놓은 것 같았다.

온갖 화려한 드레스부터 일상복까지 셀 수도 없을 정도의 옷이 양쪽으로 빼곡히 걸려 있었고, 가장 안쪽 벽에는 칸칸이 가방과 신발들이 놓여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가운데 길게 늘어선 유리 장식장 안에는 온갖 액세서리와 보석들이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얼빠진 목소리를 겨우 쥐어 짜내며 설원이 채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친절히 설명을 곁들였다.


“기억 안 나? 전부 당신이 쓰던 건데.”

“내가 언제…….”

“당신은 기억 안 날지 몰라도.”

불쑥 채하가 걸려 있는 드레스 한 벌을 꺼내 설원의 몸에 대주었다.

선명한 붉은빛이 무척이나 유혹적인 드레스였다.


“다 당신이 좋아했던 것들이야.”

“…….”

왜인지 저를 보는 채하의 시선이 드레스만큼이나 붉게 물들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지만, 설원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렇게 비싼 물건들을 산 적도 없거니와, 눈앞에 있는 이것들은 전부 새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 점을 지적했다간 제가 옛일을 기억한다는 걸 털어놓는 셈이나 마찬가지일 터였다.

할 수 없이 설원은 조금 에둘러서 사양의 말을 꺼냈다.


“전 딱히 갈 곳도 없는데, 이런 것들은 필요 없을 거 같아요.”

“필요가 왜 없지. 당신은 내 아내이자 채운의 작은 안주인이야. 그리고.”

채하가 대뜸 자신의 목덜미를 더듬더니 셔츠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자, 당신 반지. 잊고 간 것 같더군.”

“……반지? 이걸 왜…….”

설원이 슬쩍 채하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제야 그가 네 번째 손가락에 끼고 있는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단 한 번도 권채하가 낀 적 없는 그들의 결혼반지였다.


“왜라니. 우린 서로 한순간도 반지를 뺀 적 없는 부부였어. 주인이 돌아왔으니 당연히 돌려줘야지. 베젤이 조금 휘어 있길래 다시 돌려놓았어. 겉으로 보기엔 별로 티 나지 않을 테지만 혹여나 불편하면 말하고.”

“…….”

“끼워줄게.”

멍하니 있는 설원에게 받으라 재차 권유하는 대신, 채하는 그녀의 손을 낚아채 조심스레 반지를 끼웠다.

당연한 말이지만, 반지는 설원의 가느다란 손가락에 꼭 맞았다.

그걸 본 채하의 입매가 만족스러운 듯 호선을 그렸다.


 


“봐. 민설원, 당신은 틀림없이 내 아내야.”

“……그만 나가요.”

“그래. 마침 좋은 타이밍이군.”

빨리 이 자리를 피하지 않으면, 지금의 혼란스러운 기분을 고스란히 들킬 것만 같았다.

방금 그의 행동은 꼭 프러포즈 같지 않은가.

게다가 새삼 이제 와 결혼반지를 나눠 끼는 것도 이상했다.

생각에 빠진 사이 채하는 설원을 그녀의 기대와는 다른 장소로 데려다 놓았다.


“여기는……?”

“우리 방이야. 오늘부터 당신은 여길 쓰면 돼.”

“우리 방…….”

떨떠름한 목소리가 차마 숨겨지지 않았다.

채하가 데려온 곳은 다름 아닌 그들이 쓰던 방이었다.

당연히 다른 방을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예상이 빗나갔다.

거기다 한가운데 떡하니 놓인 침대 위엔 보란 듯 베개가 두 개 놓여 있었다.

설원의 시선이 베개에 닿자, 채하가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렸다.


“당황할 거 없어. 우린 매일 밤 한 침대에서 잤으니까. 그것도 저 베개처럼 딱 붙어서.”

“…….”

부정해야 하는데, 부정할 수가 없었다.

물론 한 침대에서 잔 건 사실이지만, 둘은 언제나 적정한 거리를 유지했었다.

한데 눈도 한 번 깜박하지 않고 태연하게 저를 속이다니.

그의 말도 안 되는 거짓말에 괜스레 뺨만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당혹스러운 그 찰나, 별안간 볼 위로 따스하고 커다란 손의 감각이 느껴졌다.


“……!”

어느새 제 앞에 와 성큼 선 채하가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한없이 다정한 손길에 설원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려왔다.

이 남자가 저를 이런 눈으로 봤었던가? 이렇게 애틋하고 사랑스럽다는 눈빛을 할 줄 아는 남자였던가?

문득 혼란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 혼란의 틈새를 비집고 채하의 낮게 잠긴 목소리가 귓가에 야릇하게 내려앉았다.


“괜찮아. 당신이 기억 안 나면.”

“…….”

그의 입술이 서서히 귓가를 지나쳐 설원의 입술 바로 지척까지 다가왔다.

숨을 쉴 수조차 없어 설원은 애꿎은 눈만 끔벅였다.

이윽고 금방이라도 닿을 듯한 붉은 입술을 열곤, 채하가 그녀의 입술에 대고 속삭였다.


“날 때까지 해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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