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귀가
(10/111)
10. 귀가
(10/111)
10. 귀가
2022.09.04.
“그게…… 무슨 소리예요?”
“말했잖아. 당신은 법적으로 아직 내 아내라고.”
강건한 채하의 눈빛은 부정할 틈이라곤 조금도 주지 않고 그녀를 몰아붙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대로 설원을 놓아줄 생각이라곤 추호도 없었다.
“당신 어머니의 유서, 내가 갖고 있는데 궁금하지 않아?”
“……!”
순간 설원은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판단할 수 없었다.
어머니의 유서라니…….
혼란스러워하는 설원을 뻔히 들여다보고 있으면서도, 채하는 여유롭게 몸을 빙글 돌려 꽃집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이제 와서 구경이라도 하는 것처럼.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는 설원을 뒤에 세워둔 채, 채하가 곱게 손질된 화분을 하나 들어 올렸다.
푸릇한 이파리가 생명력을 뽐내고 있는 화분이 그의 손 위에서 유독 연약하게 보였다.
“본인의 유지에 따라 수목장으로 보내드렸는데, 어디에 모셨는지 궁금하지 않나?”
“…….”
계속되는 침묵에 채하는 그녀가 대답할 의지가 없다고 판단한 듯했다.
그럼에도 그의 질문은 계속되었다.
“참 이상해. 민설원. 당신은 어머니를 위해서 억지로 나와 결혼했을 정도로 효녀인데, 어째서 장례식에도 오지 않은 거지?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으면서.”
그의 말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설원의 심장을 찔렀다.
그 말대로 설원은 5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제 손으로 보내드리지 못했으므로.
아니, 보내드릴 수 없었으므로.
“……말했잖아요. 섬에 쓰러져 있었다고. 그땐 어머니가 돌아가신 줄도 몰랐어요.”
“그래. 기억도 없었고 말이지.”
“…….”
“뭐, 말하기 싫으면 괜찮아. 어차피 내가 이제부터 하나하나 다 알아낼 생각이니까.”
선전포고 같은 말투와는 달리 어딘가 즐거운 얼굴로 채하가 손에 든 화분을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다시 설원이 서 있는 쪽으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나저나 당신의 기억 상실은 참으로 선택적이군. 어머니는 기억하는데 남편만 잊었다니.”
“……아무리 그래도 어머니를 잊을 리가 없잖아요.”
그의 시선을 힘겹게 피하며 작게 중얼거리던 설원이, 곧 단호한 눈동자로 채하를 응시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유서라는 게…….”
“임종을 얼마 앞두고 주치의에게 유서를 맡기셨다는군. 나도 아직 열어 보지 않았어. 반드시 우리 두 사람이 함께 읽어야 한다고 신신당부하셨다기에.”
“어디 있어요? 빨리 줘요!”
보채듯 높아진 설원의 목소리에 채하의 입꼬리도 함께 올라갔다.
뭐가 되었든, 그녀가 제게 원하는 게 있는 이 상황이 흡족할 따름이었다.
“집에 있어.”
“……집?”
얼떨떨한 설원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지며 채하를 응시했다.
당연히 그가 가지고 왔을 거라 생각했는데, 권채하를 너무 얕본 셈이었다.
“그래. 우리 집. 당신과 내가 항상 같이 잤던 집에 말이야.”
도발적으로 올라가는 입꼬리에 설원의 뺨이 속수무책으로 붉어졌다.
일부러 저를 당황하게 하려는 의도가 다분한, 이중적인 의미였기에.
이윽고 있지도 않은 유서를 마치 들고 있는 것처럼 채하가 허공에서 손을 움켜쥐었다.
“이걸 원하면, 3개월만 내 옆에 있어.”
“……3개월요?”
“그래. 나도 날 기억도 못 한다는 사람 오래 붙들고 있을 생각은 없어. 3개월만 내 옆에 있으면 당신에게 고이 돌려주지.”
허공에 머문 그의 손을 바라보며 설원은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어머니의 유서라니,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갑작스레 위독해진 바람에 어머니와 마지막 인사조차 나누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설원의 가슴에 늘 죄책감과 깊은 한으로 남아 있었다.
그런 만큼 설원으로서는 도무지 쉽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제게 남긴 말이 있다는 사실을 듣고도, 차마 모르는 체할 수는 없었으니까.
게다가 어머니의 유서도 유서거니와, 우주도 계속 커가는 마당에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살아 있는 것을 들킨 이상 차라리 계약을 깔끔히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5년 전에 제대로 끝맺지 못한 만큼, 유서를 받은 뒤 이혼하는 것으로.
그렇게만 되면 더는 도망치며 살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엔 배 속에 우주가 있어 몸을 사려야만 했다.
아이의 안전을 위해,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어머니의 배웅을 포기해야만 했다.
제가 돌아가면 그들이 자신과 우주를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늘 그녀를 눈엣가시로 여겼던 시어머니와, 그런 시어머니가 일찍이 며느릿감으로 찍어두었던 여자.
저를 내치기 위해서 어머니의 목숨마저 볼모로 잡았던 그들이었다.
이번엔 그 대상이 우주가 되리라는 것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지만, 설원도 그때완 달랐다.
3개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
물론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었으나, 이제 예전처럼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었다.
저를 벼랑으로 몬 두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실종의 진실에 대해 입을 열면 그들이 그토록 원하는 그 여자와 채하의 재혼은 어그러질 터였다.
설원은 결국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렇게 할게요. 대신 약속, 꼭 지켜야 해요.”
“당신이나 꼭 지켜. 방금 그 말.”
제가 뭘 원하는지도 모르고 덥석 제 덫에 들어와 준 그녀를 보며 채하는 입꼬리에 호선을 그렸다.
뭐 아무래도 좋았다.
거래는 체결되었고, 민설원은 다시 제 곁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지금의 채하로서는 그게 가장 중요했다.
기억을 못 하는 척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일단은 속아줄 생각이었다.
3개월. 그녀에게 제시한 그 시간 동안 온전히 그녀의 마음을 얻을 작정이었기에.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자신의 아내였던 민설원의 마음을.
어쩌면 기억을 못 하는 척하는 게 채하에게도 편할지 몰랐다.
민설원이 아는 권채하와, 이제부터의 권채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테니까.
“엄마, 여기는 어디예요?”
원래도 큰 눈을 왕방울만 하게 뜨며 우주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태어나 지금까지 작은 섬에서만 살아왔던 아이였다.
우주에게 육지의 세상은 배를 타고 나가는 어린이집 정도가 전부였기에, 눈앞의 풍경이 어리둥절할 만도 했다.
어딘가 짠한 기분이 들어 설원은 아이의 고사리 같은 손을 꼬옥 붙들었다.
“여기는 음…… 엄마가 옛날에 살던 집이야.”
“우와! 우리 엄마 공주님이었어요?”
“공주님?”
“우주가 동화책에서 봤는데, 예쁜 공주님들이 이렇게 크고 멋진 성에서 살아요!”
아직은 짧기만 한 두 팔을 있는 힘껏 펼치며 우주가 채하의 집을 가리켰다.
이렇게 큰 집을 본 게 처음일 테니 성이라고 여길 만도 했다.
자신 역시 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 둘이 살기엔 너무 크다고 몇 번이나 생각했었으니까.
이곳에서 우주와 함께, 셋이서 지내게 되었다는 사실에 설원은 쓴웃음을 지었다.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일이라 그럴까. 어쩐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우주야! 잔디 조심해. 여기 돌도 많아.”
원체 호기심 많은 우주는 이미 마당을 깡충거리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아이에게 주의를 건네던 설원은 문득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잔디도 많고, 둥글고 커다란 돌들도 많고…….
“…….”
그랬다.
이 집은 5년 전, 설원이 머물던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처음 결혼했을 무렵엔 시부모님과 같이 살았지만, 계약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시점에 돌연 채하가 분가를 선언했다.
시어머니인 허영주의 취향대로 꾸민 본가와는 다르게, 이 저택은 채하가 그녀에게 선택권을 준 공간이었다.
하지만 당시엔 어차피 곧 3년의 계약이 종료되는 데다, 채하가 극도로 심플한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던지라 설원은 내부엔 딱히 손을 대지 않았다.
그녀의 손이 닿은 곳은 오로지 마당, 즉 정원뿐이었다.
‘왜 그대로 놔뒀지?’
자신이 아는 권채하라면 제집 마당이 이렇게 시골 들판처럼 되어 있는 걸 그냥 놔두지 않았을 텐데…….
“왜 안 들어가고 있는 거지?”
“헉.”
“뭘 그렇게 놀라?”
머리 위에서 울려오는 묵직한 중저음에, 설원은 흠칫한 나머지 발을 삐끗했다.
그 바람에 제 뒤에 서 있는 채하의 가슴팍에 그만 등을 기대고 말았다.
“아…… 미, 미안해요.”
“남편한테 기대는 게 뭐가 미안할 일이라고. 우주는?”
“아. 저기 뒤뜰 쪽을 구경한다고…….”
천천히 그녀의 몸을 바로 세워주는 채하의 손은 설원의 뺨만큼이나 뜨거웠다.
그나저나 남편이라는 말을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하는 그라니, 어색할 따름이었다.
“왔으면 들어가지 않고 왜 이러고 있어? 애를 밖에다 두고.”
“……비밀번호를 모르잖아요.”
설원이 자그맣게 중얼거리자 채하가 피식 차가운 얼굴에 웃음을 드리웠다.
평소에는 얼음처럼 냉담하기만 한 얼굴이었지만, 가끔 그의 표정에도 진심 어린 미소가 떠오를 때가 있었다.
그 순간마다 설원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설레곤 했다. 지금처럼.
이윽고 그가 차가운 호수에 떠오른 꽃잎처럼 붉은 입술을 열었다.
“그대로야. 0524.”
“0524…….”
“그래. 당신과 나, 우리 결혼기념일이지.”
“왜…….”
“뭐가?”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을, 설원은 힘겹게 삼키며 도로 깊숙이 집어넣었다.
정원도, 비밀번호도 왜 바꾸지 않았냐는 물음.
어떤 대답이 나올지도 알 수 없었지만, 어떤 대답을 듣고 싶은 건지 지금의 자신조차 알 수 없었으니까.
“우주야. 이리 와. 집에 들어가자.”
“엄마, 엄마! 여기 재밌는 게 엄청 엄청 많아요.”
“…….”
설원의 부름에 뒤뜰에서 달려온 아이의 모습에, 두 사람의 입에서 소리 없는 웃음이 터졌다.
그 사이에 뭘 한 건지 찹쌀떡같이 희고 말랑한 볼에 검댕이 가득 묻어 있었다.
덕분에 둘 사이의 미묘한 긴장이 조금 사라졌다.
문제는 우주였다.
내내 섬에서 지내다가 대뜸 이렇게 먼 곳으로 온 데다, 우주로서는 처음 보는 아저씨와 한집에서 살게 된 셈이었다.
중요한 일 때문에 잠시 서울에서 살아야 한다고 둘러대긴 했지만, 당연히 낯설 터였다.
거기다 채하는 어른의 눈으로 봤을 때야 칭송할 만한 미남이었지만, 아이의 눈으로 볼 땐 무표정하고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아이에게는 두 사람이 부부라는 걸 밝히지 않기로 일단 합의는 보았으나, 그의 태도는 어딘가 심드렁했다.
“우주야…….”
아이가 놀랄까 싶어 설원이 손을 뻗으려는 찰나였다.
우주의 손이 먼저 이쪽을 향해 뻗어 나왔다. 정확히는 채하 쪽으로.
“아저씨! 우주한테 얼굴 좀 보여주세요!”
“……?”
“우주야?”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채하는 순순히 무릎을 굽혀 아이와 눈을 맞춰주었다.
그러자 잔뜩 신이 난 얼굴로, 우주가 검댕이 가득한 손가락을 그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
무어라 설원이 말리기도 전에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채하의 얼굴을 스케치북 삼아 작품을 완성한 우주가 진심으로 기뻐하며 시커먼 손바닥을 마주쳤다.
“역시 잘 어울려요!”
“……뭐지? 뭘 그렸는데?”
채하가 간절히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설원에게 보내왔다.
하지만 설원은 웃음을 꾹 참느라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채하가 주섬주섬 핸드폰을 꺼내 액정으로 제 모습을 비춰보았다.
“…….”
“어때요? 아저씨 처음 봤을 때부터 우리 섬에 있는 대왕 고양이 같다고 생각했어요! 수염 있으니까 더 멋있어요!”
“풋!”
더는 참지 못하고 설원이 결국은 웃음을 토해냈다.
졸지에 고양이 수염을 달게 된 채하였지만, 그는 이 순간 어울리지 않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무려 5년 만에 보게 된, 앞으로 다시는 볼 수 없을 줄만 알았던 민설원의 환한 미소.
그것을 볼 수만 있다면 고양이 수염이 아니라 고양이 꼬리라도 달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