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 한 번 더, 아내가 되어줘야겠어 (9/111)


9. 한 번 더, 아내가 되어줘야겠어
2022.08.31.



 


“5년 전 5월 24일.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처음부터 다시 조사하세요. 집에서 나간 순간부터 강원도 양양까지 가는 그 순간까지, 하나도 빼놓지 말고 전부.”

“알겠습니다. 부사장님.”

“여기 이 섬도 마찬가지로 당시 오고 간 배편이랑 사람. 빠짐없이 다 찾아내도록 하고.”

“예.”

“그리고 또…….”

끊임없이 지시를 내리던 채하의 시선이 문득 대리석 책상 귀퉁이에 놓아둔 명함으로 향했다.

최재윤.

뒷면을 보니 배 이름과 함께 상호명 하나가 적혀 있었다.


“아닙니다. 이건 내가 직접 알아보도록 하죠. 나가보세요.”

어제 섬에서의 불쾌한 장면이 뇌리를 스치자 채하의 손이 저절로 그 명함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마치 제 여자라도 되는 것처럼 설원을 부르던 남자.

설원을 꼭 닮은 아이가 ‘아빠’라고 불렀던 남자.

망설일 것도 없었다. 채하는 곧바로 명함에 적힌 전화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세 번쯤 울리자 상대의 목소리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 흘러나왔다.


[최재윤입니다.]

“권채하입니다. 민설원 씨 남편.”

[…….]

남편, 이라는 단어에 상대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수화기 너머로 나직이 숨을 내쉬었다.


[민설원 씨가 왜 섬에 있는지 궁금하신 거겠죠.]

“거기에, 왜 당신과 있는지도.”

[좋습니다. 말씀드리죠. 어차피 제가 말하지 않아도 당신에겐 알아내는 일 따위 별거 아닐 테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재윤은 짧고도 간략하게 자초지종을 늘어놓았다.

너무 군더더기가 없어서 자칫 미리 짜놓았다고 의심할 법한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민설원이 5년 전에 정신을 잃은 채로 해안가에 쓰러져 있었다는 겁니까? 섬에 떠밀려 온 그녀를 당신 부모님과 당신이 발견했고?”

[그렇습니다.]

“지금 그 말을 나더러 믿으라는 겁니까? 강원도에서 사고가 난 사람이 서해안에서 발견됐다는 말을?”

[믿거나 말거나 그건 권채하 씨 자유겠죠. 전 있는 사실을 그대로 이야기할 뿐입니다.]

“……좋습니다. 그렇다고 치죠. 그럼 왜 당장 신고하지 않았습니까?”

[신고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상태였습니다. 기억도 드문드문했고요. 게다가 어떤 사정인지는 몰라도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말만 반복했죠. 할 수 없이 저희 부모님께서 한동안 보살펴주셨고요.]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 말에 채하의 심장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한 가지 더 확인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아이가 있던데. 그리고 당신을 아빠라고 부르던데, 그건 어떻게 된 겁니까?”

[…….]

툭툭 나오던 대답이 전원이 꺼지기라도 한 듯 멈췄다.

미약한 숨소리만이 들려오는데도 요동치는 감정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애써 정적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채하 역시 마찬가지였다.

영겁과도 같이 느껴진 찰나가 지난 뒤에야 재윤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건 설원 씨 입으로 직접 듣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그쪽에게는 다소 충격일 수 있는 이야기라서.]

한없이 정중하면서도 한없이 도발적인 그 대답에, 채하의 미간에 가로로 주름이 파였다.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지금은 털어놓지 않겠다는 건가.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여기까집니다. 다만 한 가지, 개인적으로 부탁하고 싶습니다.]

“부탁?”

[어제 보셨겠지만, 설원 씨는 권채하 씨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당신에 대해서는 제가 개인적으로 알아낸 거고요. 알아보니 결혼 생활이 행복하진 않았던 모양이더군요. 최근에는 백영 그룹 딸과 재혼 이야기도 오가고 있고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채하는 으득 이를 깨물며 수화기를 향해 살기에 가까운 적의를 내뿜었다.

곧 재윤이 본론을 꺼냈다.


[기억도 안 나는 사람, 혼란스럽게 하지 말고 각자 삶을 사는 게 좋지 않을까요? 어차피 당신은 설원 씨와 어울리는 사람도 아니고…….]

“최재윤 씨.”

한계였다. 그의 부탁인지 경고인지 하는 말을 더 들어줄 요량이 없던 채하는 내내 유지하던 정중함을 집어던져 버렸다.


“내 아내가 나와 어울리는지 아닌지는 그쪽이 상관할 일이 아니지. 기억이 안 난다고 민설원이 내 아내라는 사실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그럼 이만 끊지.”

거칠게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채하는 그보다 거친 손길로 이마를 쓸어올렸다.


“기억을 못 한다? 그런 말을 나한테 믿으라고?”

피식, 자조 섞인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떤 것에 화가 나는지 알 수 없었다.

민설원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그녀를 닮은 아이가 다른 남자를 아빠라고 부르는 것?

아니. 그가 가장 화나는 것은 딱 한 가지였다.

그녀가 살아 있음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는데도, 지금 이 순간 그녀가 곁에 없다는 것.


“젠장…….”

조바심을 견디지 못한 채하가 이번에는 다른 곳으로 전화를 연결했다.


“아침에 찾아뵌 사람입니다. 검사 결과는 언제쯤 나옵니까?”

“아. 친자 확인 검사 말씀이시죠. 부탁하신 대로 최대한 신속하게 진행해서 빠르면 내일 오전, 늦어도 내일 저녁까지는 받아볼 수 있으실 것 같습니다.”

내일 오전…….

아무 망설임 없이 채하는 걸어둔 재킷을 집어 무심히 걸쳤다.

어제 그녀를 만난 뒤 곧바로 사람을 시켜 아이가 쓰던 칫솔을 가져온 그였다.

섬에서 다닐 만한 어린이집이 어딘지 알아내는 것은 그에겐 일도 아니었으니.

하루면 결과를 알 수 있었지만, 지금의 채하로서는 하루도 더 버틸 인내심이 없었다.

기다림은, 5년으로 족했다.

*

섬 특유의 비릿한 향기엔 제법 익숙해졌음에도 섬의 세찬 바람만큼은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았다.

어느새 5월 말로 접어드는, 초여름이라고도 볼 수 있는 날씨에도 추위를 많이 타는 설원은 늘 카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보송보송한 카디건에 꼭 강아지 털처럼 붙어 있는 우주의 머리카락을 떼어내며 설원은 작은 웃음을 지었다.

이제 다섯 살이 된 아이는 항상 강아지처럼 제게 비벼대는 것을 좋아했다.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재윤의 부모님이 아낌없는 도움을 주었다.

게다가 고맙게도 우주는 무척이나 밝고 똑똑한 아이였다.

영아 시기에 흔한 잔병치레 하나 없었고, 아빠를 닮아 어찌나 명석한지 말도 글도 빨랐다.

또 누가 봐도 사랑스러운 외모에 애교가 넘쳐, 어린아이가 거의 없는 이 섬의 재간둥이가 되었다.

우주는, 힘겨운 시간을 살아내게 한 그녀의 보물이었다.


“어디 보자. 점심 먹고 있을 시간이네.”

한창 꽃을 늘어놓고 손질하고 있던 그녀는 어느새 지나간 시간을 퍼뜩 깨닫고, 허리를 폈다.


‘엄마, 허리가 꼭 거북이 같아요. 우주처럼 멋지게 쫙~ 펴요!’

 
일할 때마다 입버릇처럼 우주가 하는 말이 떠올라, 허리를 펴는 설원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그때였다. 꽃집 문 위에 달아둔 풍경에서 또로롱 맑은소리가 울렸다.


“어서 오…….”

문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가위를 든 손이 허공에서 뚝 멈췄다.


“남편을 보고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지 않나.”

“…….”

설원은 멍하니 방금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를 바라보았다.

나무로 만든 소박한 문이 작아 보일 정도로 떡 벌어진 어깨와 골격.

장신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뭔가 더 깊어진 분위기 탓인지 전보다도 훨씬 커 보였다.

그러다가 설원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방금 그가 ‘남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여기서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간, 제가 그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게 될지도 몰랐다.


“무슨 일로 다시 찾아오셨죠? 저는 당신 아내가 아니라고 어제 분명히…….”

“민설원.”

그가 묵직하게 이름을 부르며 그녀의 작업대 쪽으로 걸어왔다.

그러곤 설원의 두 눈을 마치 살피듯 빤히 응시했다.


“똑똑히 다시 말해 주지. 당신은 호적상으로 분명히 내 아내야. 모두가 당신이 죽었다고 말했지만, 난 한 번도 그 사실을 받아들인 적 없으니까.”

“…….”

“당신이 기억하든 못 하든 상관없어. 당신은 나와 함께 가 줘야겠어.”

그 말에 설원의 눈동자가 숨길 수 없는 불안으로 파르르 떨려왔다.

5년이란 시간 동안 필사적으로 자신을 숨겨온 그녀였다.

살아 있음을 숨기기 위해,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기 위해 지금껏 없는 것처럼 지내왔다.

최소한 아이가 클 때까지만이라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그렇게.

한데 바로 그 이유였던 남자가 그 사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민설원.”

한 발짝 더, 성큼 채하가 거리를 좁혀왔다.

가까이서 저를 내려다보는 구도에 설원의 심장이 견딜 수 없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두려움인지 설렘인지 알 수 없는, 혼란스러운 감정이 그녀의 가슴에 밀려들었다.

왜인지 모르게 그의 눈빛 또한 무척이나 낯설었다.

제가 기억하고 있던 무미건조한 눈이 아닌, 애틋하게 타오르는 눈동자였다.


“……민설원.”

읊조리듯 한 번 더 이름을 부르더니, 불쑥 채하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흠칫한 설원이 뒷걸음질을 치려 했지만, 작업대 뒤는 바로 벽이었다.


“…….”

무방비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얼굴 위로 그의 커다란 손이 내려앉았다.

이윽고 섬세한 손가락이 서서히 얼굴을 더듬기 시작했다.

마치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필사적으로 형태를 확인하려는 것처럼, 간절하기 그지없는 손길이었다.

설원의 이마부터 눈을 지나 코에 이르기까지, 그는 천천히 굴곡을 따라 훑어내렸다.

마침내 기다란 손가락이 입술 위에 닿았다.

순간 흡 하고 설원은 숨을 멈췄다.

그녀의 입술을 손끝으로 느릿하게 훑는 채하의 시선이 지독하게 맹목적이었기에.

닿은 것은 손인데, 마치 입술이 닿은 듯한 아찔한 감각에 설원의 뺨이 훅 붉어졌다.

결국 견디다 못한 설원이 입을 열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확인해보고 싶어서.”

“뭘요?”

“지금 내 눈앞의 당신이 정말로 살아 있는 게 맞는지. 꿈도 환상도 아닌, 확실히 숨을 쉬는 산 사람이 맞는지.”

그렇게 말하는 채하의 얼굴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설원의 감정마저 동요하게 만드는 그런 표정이었다.


애써 이 낯선 기분을 억누르며 설원이 힘겹게 내뱉었다.


“……어제 재윤 씨에게 당신이 누군지 들었어요. 설령 내가 당신의 아내라 해도 난 기억도 하지 못하는 상태예요. 이미 끝난 인연이고, 이렇게 된 마당에 그냥 이대로 각자 갈 길 가는 게 좋을 거 같아요.”

피식, 숨도 쉬지 않고 토해낸 말에 채하는 뜻밖에도 느른한 비웃음을 흘렸다.

그의 올라간 입꼬리는 마치 그녀의 말을 재미있어하는 것 같았다.


“끝난 인연? 기억 못 하는 사람치고는 이상할 정도로 거부하는군. 내가 누군지 들었다면 뭔가 뜯어먹을 궁리라도 하는 게 보통 사람인데 말이야.”

“……당신이 누구든 나와는 상관없으니까요.”

“글쎄, 말은 그렇게 해도 당신 입술은 나를 잊지 않은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며 그가 보란 듯 손가락으로 제 입술을 쓸었다.

은밀한 속내를 고스란히 들킨 기분에 설원의 뺨이 더욱 홧홧해졌다.

지그시 살피듯 설원을 응시하던 채하가, 마침내 오늘 찾아온 목적을 꺼냈다.


“민설원. 한 번 더, 내 아내가 되어줘야겠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