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그녀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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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녀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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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녀의 얼굴
2022.08.24.
설원을 보내주라…….
채하가 말문이 막힌 틈을 타 정 비서는 스카이라인이 한눈에 보이는 통창 옆, 소박한 나무 의자에 주저앉았다.
정 비서 본인이 사직 선물로 가져다 둔 것이었다.
서류만 들여다보지 말고 바깥 하늘도 종종 보라면서.
“이쯤 했으면 됐습니다. 부사장님도 잘 알고 계시잖습니까. 살았으면, 살아 있으면 이미 나타나고도 남았겠죠.”
“…….”
“몹쓸 바다가 제 딸아이도, 작은 사모님도 삼켜버렸군요. 그래서 오늘은 천도재를 올리자고 제안 드리러 온 겁니다.”
천도재…….
너무도 낯설고 이질적으로 다가온 그 단어에, 채하는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쓸쓸한 미소가 몇 년 사이 부쩍 거칠어진 정 비서의 얼굴 위로 드리워졌다.
“그거 아십니까, 부사장님? 살아 계실 때 작은 사모님이 제 딸아이의 기일마다 손수 꽃을 손질해서 주셨습니다.”
“꽃을…… 말입니까?”
처음 듣는 이야기에 채하의 촉각이 드물게 곤두섰다.
“예. 언젠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다가 이 늙은이가 주책맞게 딸아이 얘기를 꺼냈더랬죠. 뭐가 그리 힘들어 세상을 먼저 등졌느냐고 원망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랬더니 언제가 기일이냐고 물으시더군요. 자세한 사정을 모르니 섣부른 위로 대신 드리는 작은 마음이라며, 매년 기일마다 꽃을 보내셨습니다. 딸아이와 꼭 닮은, 예쁜 꽃들로요.”
“…….”
참으로 민설원, 그 여자다운 행동이었다.
그걸 이제야 알게 된 제가 기가 차서, 채하의 입술은 작은 미동조차 할 수 없었다.
“남들은 부사장님이 아내의 이름 한 번 입에 안 올린다고 욕하지만, 저는 잘 압니다. 가슴으로 누군가의 이름을 삼킨다는 게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 말입니다.”
아득하게, 정 비서의 시선이 창 너머를 향했다.
“5년입니다. 무려 5년간 부사장님은 포기하지 않고 매일 사람을 써서 작은 사모님을 찾았죠. 어디 그뿐입니까. 직접 몇 번이나 양양 바닷가에 갔다가 하마터면…….”
“……그만 말씀하세요. 정 비서님.”
지그시 눈을 감은 채하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에게서는 5년이라는 세월이 남긴 피로감이 고스란히 비쳤다.
겉으로만 그를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절대로 보이지 않을 애달픔이었다.
“제 딸아이를 배웅했던 곳이 아주 정성을 들여 보내주시더군요. 너무 오래 붙잡고 있으면, 떠난 사람도 좋은 곳으로 갈 수 없어요. 좋은 날을 잡아서 천도재를 올리지요.”
좋은 날…… 좋은 날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아내를 보내기에, 민설원을 보내기에 좋은 날이 대체 어떤 날이란 말인가.
그러나 무의미한 분노라는 것을 채하는 잘 알고 있었다.
이 분노의 대상이 향할 곳도 오로지 권채하, 자기 자신뿐이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날짜를 골라 보도록 하죠.”
왜 그렇게 떠났냐는 원망도, 혹여나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더는 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권채하, 그는 말라붙은 이파리처럼 생명력을 잃어갈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벌써 잃고 껍데기만 남은 건지도 몰랐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제가 스님과 상의해서…… 아, 잠시만요. 손주 녀석한테 메시지가 왔네요.”
정 비서의 입가에 어렴풋한 미소가 따스하게 떠올랐다.
딸을 보내고 난 뒤에도 그가 살아갈 수 있었던 건, 남은 아들 하나가 줄줄이 낳아준 손주들 덕분인지도 모르겠다고 채하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제게는 무엇이 남았을까. 무엇이 저를 살게 하는 걸까.
“허허. 이 늙은이 적적할까 봐 기특하게도 매일 사진을 보내준답니다. 요즘 제 아빠 따라서 낚시를 한번 다녀오더니, 종일 낚시 채널만 보고 있다는군요. 어디 보자……. 이거, 사진 보려면 안경이라도 하나 맞춰야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정 비서는 서툰 손짓으로 사진을 확대했다.
리모컨을 들고 웃고 있는 아이의 모습 등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화로운 사진들이 그의 손끝에서 천천히 넘어갔다.
무심한 눈길로 채하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그때였다.
정 비서의 손가락이 뚝 하고 멈추더니, 갑자기 얼굴이 굳어졌다.
한눈에 봐도 심상치 않은 표정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그게…… 부사장님. 그게 말입니다…….”
“……?”
어리둥절해하는 채하에게 정 비서가 들고 있던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 안에는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TV 화면 사진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낚시 채널답게, 작은 섬 바닷가가 배경인 사진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이가 보다가 찍은 것 같은데요.”
“여기, 부사장님. 여길 보십시오.”
보채는 듯한 손길로 정 비서가 손가락으로 사진 구석을 가리켰다.
“이건…….”
손톱 끝이 가리키고 있는 화면 구석을 본 채하의 심장이 순간 쿵 하고 내려앉았다.
양손에 월척을 들고 호탕하게 웃고 있는 낚시꾼 너머, 부둣가를 걸어가고 있는 여자의 옆모습.
비록 옆모습뿐이었지만,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넘기고 있는 얼굴은 틀림없이 자신의 아내인 민설원이었다.
“여기가…… 여기가 대체 어딥니까?”
채하가 갈라진 목소리로 정 비서를 채근했다.
할 수만 있다면 화면 속으로 들어가기라도 하고픈 심정이었다.
“당장…… 당장 여기가 어딘지 알아봐 주세요. 지금 당장이요!”
*
“하아…….”
아까부터 거칠게 몰아쉬는 숨이 차 안의 공기 밀도를 한껏 끌어올렸다.
기사를 대동하라는 정 비서의 권유를 만류하고 채하는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
법에 저촉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의 속력을 밟으며, 그는 하릴없이 입술을 짓씹었다.
정 비서의 말대로 지난 5년 동안 강원도 해안이란 해안은 샅샅이 뒤졌다.
인근 섬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한데 설마하니 완전히 정반대 쪽이었을 줄이야.
“어떻게 된 거지.”
의문이 너무도 많았다. 어째서 강원도 방파제에서 실종된 그녀가 서해안까지 떠밀려온 건지.
어째서 멀쩡히 살아 있음에도 연락 한 번 하지 않은 건지.
사진 속의 여자가 민설원이 아닐 거라는 생각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의 옆모습을,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길 때의 그 은은하게 미소 짓는 얼굴선을, 이 세상에 저보다 똑똑히 기억하는 남자는 없을 테니까.
다행히 곧바로 달려온 덕분에 채하는 해가 지기 전에 서해안에 도착했다.
초조하게 배를 기다리고, 배를 타고 들어가는 그 몇십 분이 그토록 길 수가 없었다.
“배 정박합니다. 안전하게 부두에 닿을 때까지 손님들은 조금만 기다려 주시고…… 어? 손님! 그렇게 튀어 나가시면 위험합니다!”
차를 대고 빼는 시간조차 아까워 육지에 두고 온 그였다.
느긋하게 정박을 기다릴 여유 따위 있을 리 없었다.
마침내 발을 디딘 섬의 인상은 상상한 것보다도 훨씬 작다는 것이었다.
서해안의 수많은 섬 중에서도 이곳은 주민이 얼마 되지 않는 작고 작은 섬이라 했다.
당장 보이는 주민들만 해도 나이 지긋한 어부들이 대부분이었다.
채하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이 섬에 그녀가 있다.
그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정상 박동수를 한창 벗어나고 있었지만, 진정해야 했다.
그녀를 만나면, 찾으면, 물을 것이 너무도 많았다.
아직은 이성을 잃을 때가 아니었다.
“…….”
그때였다.
귀가하는 섬 주민들의 동선을 따라 걷던 채하의 눈에 아주 이질적인 풍경이 들어왔다.
이런 자그마한 섬에 있을 리 없는 가게, 꽃집이었다.
격동하는 심장 소리가 어느새 귓가까지 울려왔다.
문이 열려 있는 꽃집, 그 건너편으로는 바다 내음이 물씬 풍기는 부둣가가 길게 뻗어 있었다.
그리고…….
“민설원…….”
오랜 세월 꽁꽁 봉인해두었던 이름 석 자가 드디어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심장이 이젠 가히 멎어버릴 것만 같았다.
부둣가를 따라 걷고 있는 여자. 그녀는 자신의 아내, 민설원이었다.
본능처럼, 말보다도 손이 먼저 그녀를 향해 튀어 나갔다.
이어 목구멍 깊은 곳에서 삼키고 삼켰던 이름을 다시 부르려던 찰나였다.
“엄마!”
작은 꽃봉오리가 활짝 만개하는 듯한 밝은 목소리.
맑은 이슬처럼 티 없이 해맑은 목소리.
그 목소리의 주인공으로 보이는 한 남자아이가 그녀를 향해 달려오더니, 냉큼 품에 안겼다.
“…….”
허공에서 손이 멈춘 채로 채하의 시간마저 그 순간 정지했다.
무섭도록 저며오는 가슴만이, 그의 심장이 여전히 뛰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엄마! 우주 어린이집 다녀왔어요.”
……엄마.
그 두 글자에 채하의 기억은 5년 전 그날, 서랍 깊숙한 곳에서 산모 수첩을 발견했을 때로 돌아갔다.
인생에 있어 그토록 혼란스러운 적이 있었던가.
그리고 지금처럼 혼란스러운 적 또한.
그때 제 눈으로 똑똑히 보고서도, 지금 이 장면을 마주하기까지 채하는 반신반의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이를 가질 일은 없어. 그러니 혹여나 하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어차피 우리는 계약으로 이뤄진 부부니까.
분명히 그렇게 그녀에게 통보하듯 던졌던 채하였다.
‘설마 그날인가.’
채하의 뇌리에 모든 이성의 끈이 무너졌던 단 하룻밤이 스쳐 갔다.
두 사람이 약속을 어기고 기어이 함께 보내고 만 그 겨울밤의 기억이.
뭐가 어찌 되었든 지금은 중요하지 않았다.
민설원이, 제 아내가 지금 자신의 눈앞에 멀쩡히 살아 웃고 있지 않은가.
흰 피부에 동글동글한 얼굴을 한, 그녀를 꼭 닮은 귀여운 남자아이를 안고서.
떨림이 겨우 가신 손을 꾹 말아쥔 채하가 이윽고 성큼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무릎을 굽힌 채 아이와 재잘거리던 설원이 갑자기 앞에 드리워진 기다란 그림자에, 천천히 시선을 위로 올렸다.
곧 그녀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민설원.”
“…….”
“드디어 찾았네.”
부둣가를 때리는 거친 파도 소리와, 저무는 저녁의 바람 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를 채웠다.
하지만 채하는 그녀와의 사이에 조금의 침묵도 원하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이 벌써 5년이었다.
어서 붉고 작은 저 입술을 열어 제 이름을 불러주길 원했다.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는 줄도 모르고.”
“…….”
“왜 이런 섬에 살고 있는 거지. 그리고…….”
채하의 시선이 한참이나 시야 아래에 있는 꼬마 아이로 향했다.
그 찰나, 마치 그 시선을 막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설원이 아이를 감싸며 일어섰다.
그러고는 언제 눈빛이 흔들렸냐는 듯 단단해진 눈동자로 채하를 마주 보았다.
마침내 그녀가 한 떨기 꽃 같은 입술을 열었다.
“누구세요?”
“…….”
단언컨대, 이런 반응은 채하로서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하마터면 그는 몸을 휘청일 뻔했다.
그러나 그의 존재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녀가 툭 한마디를 던졌다.
“죄송하지만, 전 그쪽을 모릅니다.”
하지만 권채하는 알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는 와중에도 민설원, 그녀의 얼굴은 처음 만난 그때와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