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금단 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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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금단 증상
2022.08.21.
무상한 세월은 설원의 사고 이후로 5년을 훌쩍 뛰어넘었다.
이제 서른넷이 된 채하의 시간도 더딘 듯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십 대의 풋내가 가신 그는 더욱 완벽한 남자가 되었고, 그런 큰일을 겪었음에도 외모는 제 어머니 허영주를 닮아 날로 피어났다.
또렷하게 깊고 짙어진 눈매, 예전보다 더 날렵해지고 강렬해진 얼굴선.
원래도 좋았던 몸이었지만, 습관이 된 운동 덕에 슈트 사이로도 탄탄한 잔근육이 도드라졌다. 빈틈 하나 보이지 않는 모습에 그가 한 번 결혼했던 몸임에도 불구하고, 추종자들은 날로 늘어났다.
하루걸러 하루로 혼담이 들어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작 그의 내면은 고요하게 얼어붙은 빙하 같았다.
원래도 그랬지만, 그의 세상에는 이제 일 말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훗날 이어받을 채운 그룹과, 집어삼키느냐 집어삼켜지느냐 둘 중 하나인 재계. 그게 전부였다.
애초에 사람이란 권채하의 세상에는 없는 존재였다.
그나마 가까이하는 정 비서도 과거에 형을 보필했다는 특수성 때문에 곁에 두는 것일 뿐, 채하는 이 세상 누구에게도 마음을 연 적도 준 적도 없었다.
자신이 차갑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고, 오히려 타인의 지나치게 높은 온도가 늘 불쾌했다.
부모조차 저를 생산해준 사람, 그 외의 어떤 의미도 아니었다.
운 좋게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그것을 행복이라 여겨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시달린 형을 보며 자라난 탓에 오히려 불행의 그림자만 길어졌을 뿐.
여자는 더욱이 그러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 허영주의 허영심을 질리도록 봐 온 데다, 형의 일까지 있어 그에게는 일생에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존재였다.
살면서 여자를 보고 심장이 뛰어본 적이 한 번이라도 있던가.
아무리 화려하게 치장한 여자들로 가득한 사교 모임 속에 있어도, 그의 심박수는 그토록 평온할 수가 없었다.
권채하. 그는 본디 그런 사람이었다.
언제나 눈에 보이는 형태가 있는 것만을 믿는, 사랑이니 희망이니 이런 뜬구름 잡는 감정은 믿어본 적 없는.
감사하다거나 미안하다거나 하는 말보다는 금액을 가늠해 불러주는 게 더 편한 사람.
하지만 그런 그의 인생에서도 딱 한 번, 예외가 있었다.
“…….”
하마터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이름에, 채하는 버릇처럼 입술을 강하게 짓씹었다.
민설원. 그의 사라진 아내.
지난 5년 동안 그는 그녀의 이름을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그런 그의 뒤에서 다들 무어라 숙덕거리는지, 채하도 잘 알고 있었다.
‘누가 보면 애초에 미혼이었던 줄 알겠어.’
‘집에서 키우는 햄스터가 죽었어도 권채하보다는 슬퍼할 거야. 사람 맞니?’
‘장례식도 안 치러줬다며? 멀쩡하게 회사에 매일 출근하고.’
‘아내가 죽었는데도 눈 하나 깜박 안 하고 일만 하잖아. 전례 없는 초고속 승진이라며? 5년 사이에 상무에서 부사장이 되었잖아.’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네. 권 회장님도 봐. 전처가 죽자마자 바로 지금 사모님하고 재혼했다며?’
권채하의 이름 뒤에 으레 따라다니는 것이 ‘냉혈한’이라는 수식어였기에, 이딴 소문쯤은 그의 귀를 간지럽히지도 못했다.
그를 진정으로 거슬리게 하는 건 다른 부류의 소문이었다.
‘이건 비밀인데…… 최근에 그 백영 그룹 막내딸이랑 다시 혼담이 오간대.’
‘아냐. 원래부터 그 백사라 쪽이 애인이었다는 말도 있어. 지금도 그쪽 힘을 얻어서 부사장 자리까지 올라간 거라나.’
‘세상에, 죽은 부인만 안 됐다!’
후자의 소문은 의도가 명확했다. 그리고 근원지도 명확했다.
짓씹고 있던 입술에서 희미한 피비린내가 느껴지던 그 찰나, 얼마 전 새로 온 신입 비서가 노크를 하곤 들어왔다.
“부사장님. 큰 사모님 오셨습니다.”
“돌려보내세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나가려는 비서를 채하의 낮게 잠긴 음성이 붙들어 세웠다.
혹여 실수라도 했나 눈치를 보며 신입 비서가 슬그머니 그를 돌아보았다.
채운의 황태자, 권채하. 그가 시키는 말에는 이유를 묻지도 말고, 토를 달지도 마라.
입사하기 전에 누누이 새겨온 법칙대로 했는데, 결국 무언가 거슬리게 한 모양이었다.
“앞으로는 큰, 이라는 단어는 빼세요. 채운 그룹에 달리 사모님이 또 있던가?”
“아. 아아……. 예.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소 당황한 듯 애꿎은 서류철을 만지작거리더니, 신입 비서는 달아나듯 부사장실에서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아하니 어차피 오래 못 갈 듯싶어 채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 비서가 나이가 들어 최전선에서 그를 보필하기엔 어려움이 있는지라 얼마 전부터 새 비서를 뽑고 있는 참이었다.
하나 채 한 달을 넘기지 못하는 경우가 일쑤였고, 그렇게 나간 비서들의 말이 쌓이고 쌓여 채하를 둘러싼 흉흉한 소문만 보태게 되었다.
‘아내의 존재조차 싹 지워버렸더라.’
비서들이 자꾸 그만두는 건 상사인 그로서도 골치가 아픈 일이었다.
채하가 일에서 엄격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사실 그들이 그만두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얘! 권채하! 너 엄마가 찾아왔는데 그냥 가라가 뭐니, 그냥 가라가?”
“……왜 또 오셨습니까.”
“왜긴 왜야? 사라네 집 식구들하고 주말에 식사 약속 잡아야 하는데, 네가 들은 척도 안 하니까 여기까지 찾아왔지!”
오늘도 주렁주렁 화려한 차림새를 하고서, 그의 어머니 허영주가 자연스레 부사장실에 놓인 가죽 소파에 걸터앉았다.
그녀의 차림새는 세월이 지날수록 점점 더 요란해지고 있었다.
아무리 왕년에 인기 여배우였어도 지금은 아니거늘, 그녀는 마치 과거의 영광에 빠져 사는 사람처럼 보였다.
신나게 쇼핑을 했는지, 허영주가 늘어놓은 쇼핑백들로 이내 가죽 소파가 가득 찼다.
“거긴 귀빈석입니다. 어머니.”
“어머, 얘 좀 봐? 내가 귀빈이 아니면 누가 귀빈인데?”
“저 바빠요. 일하는데 자꾸 이렇게 오시면 곤란합니다. 몇 번이나 말씀드린 걸로 아는데요.”
“그래! 너 말 잘했다. 나도 벌써 같은 얘기를 몇 번째 하고 있는지 아니?”
또 똑같은 대화의 반복, 채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최근 생긴 미세한 두통의 원인은 아무래도 어머니임이 틀림없었다.
얼음을 입에 문 듯 차디찬 대답이 자동 응답기처럼 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분명히 말씀드렸을 텐데요. 저는 그 식사 자리, 참석할 수 없다고.”
“얘 좀 봐!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고집을 피울 거야, 너!”
“어머니야말로 이렇게 끈질기게 굴지 마시고 다른 취미를 찾아보세요. 연세도 있는데 자꾸 언성 높이시다간 고혈압으로 쓰러지십니다.”
“권채하!”
결국 분에 겨운 허영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선 냉담하기 그지없는 아들을 노려보았다.
“5년이나 지났어. 설마 아직도 그 민설원인지 민둥산인지 하는 여자 하나를 못 잊은 건 아니겠지?”
“어머니.”
채하의 팔꿈치가 얹어진 대리석 책상에서 착각인지 모를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분명 경고했을 텐데요. 제 앞에서 그 이름, 꺼내지 말라고.”
“왜? 걔가 무슨 성역이라도 된다니?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너 정신 차려라! 걔는 죽었다고 몇 번을 말해야…… 꺅!”
쾅! 하고 명패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제게 집어던진 것은 아니었으나, 명백한 위협에 허 여사는 어깨를 파들거렸다.
“좋아. 언제까지 이렇게 나오나 두고 보자! 이번 주 일요일, 약속 잡을 거다. 그 자리에서 너랑 사라 혼담 의논할 거고!”
“전 안 나갑니다.”
“이번에 우리 채운에서 새로 들어갈 리조트 부지, 그 후보 중에 제일 알짜배기 땅이 백영 그룹 소유라는 거 너도 잘 알고 있을 거다. 그거, 너랑 결혼하면 백 회장이 그냥 넘겨주겠대. 이런 거저먹는 거래가 세상천지에 또 어디 있니?”
“어머니.”
채하의 목 깊숙한 곳을 긁으며 새어 나오는 음성은 가히 저승사자의 부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스산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허 여사도 물러날 수 없는지, 그녀는 계속해서 언성을 높였다.
“말은 바른 말이지, 사라 같은 애가 어디 있어? 오랫동안 짝사랑한 남자가 다른 여자랑 결혼까지 했는데도 꾹 참고 기다려줬다! 잘 들어, 권채하! 너 올해는 기필코 백사라랑 재혼하는 거야!”
삐.
대답 대신 기계음이 들려오고, 곧 거기에 채하의 통보가 이어졌다.
“여기 불청객, 모시고 나가세요. 당장!”
‘불청객’이라는 단어에 허영주의 두 눈이 모멸감으로 끔벅거렸다.
이내 그녀가 두 주먹을 말아쥔 뒤 휙 하고 제 발로 부사장실을 나가버렸다.
“하…….”
어머니인데, 제 어머니인데.
그녀가 왔다 간 자리에서는 어떤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선명한 대비에, 채하의 안에서 이미 사라진 누군가의 온기에 대한 갈망이 더해졌다.
참을 수 없는 갈증, 참을 수 없는 금단 증상이 찾아온 것이다.
“젠장!”
서랍을 뒤져 두통약을 꺼내려던 채하는 손을 거두어 제 가슴팍으로 가져갔다.
셔츠 옷깃 너머로 목 한가운데 걸린 물건이 만져지자 채하는 그것을 세게 꾹 눌렀다.
마치 가슴에 각인을 새기듯, 심장에 새겨넣듯.
이내 익숙한 통증이 존재감을 과시하며 그의 가슴에 아릿한 감각을 선사했다.
아픔, 고통, 형체가 있어서 다행인 것.
그때였다.
노크도 없이 부사장실 문이 스르륵 열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안 그래도 날이 서 있던 채하가 문틈으로 비수와도 같은 시선을 돌렸다.
“뭡니까, 내가 분명 허락 없이는 들어오지 말…….”
“이거, 그 몹쓸 버릇을 여전히 못 고치셨군요.”
“……!”
놀란 채하가 손을 떨구자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정 비서가 안으로 들어왔다.
느린 걸음으로 채하를 향해 다가온 그가 곧 주머니에서 구깃구깃한 손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너무 격하잖습니까. 셔츠에 피가 묻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
“그런 식으로 괴로움을 해소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부사장님.”
정 비서의 은근한 위로와 질책이 함께 담긴 목소리에, 채하는 방금 저를 상처 입힌 물건을 옷 밖으로 꺼냈다.
찰랑, 하고 귀에 내려앉은 얇고 가느다란 금속성의 소리.
휘어진 베젤 끝에 희미한 상흔이 묻어난 그 물건은, 결혼반지였다.
마치 사고를 예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의 아내, 민설원이 두고 간 두 사람의 결혼반지.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싶어질 때마다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일부러 베젤을 휘어버린 반지였다.
단 한 번도 반지를 끼지 않았던 자신을 벌하듯이.
붉게 얼룩진 그의 생채기를 본 정 비서의 눈살이 사납게 찌푸려졌다.
“이거야 원, 부사장님을 둘러싼 소문에 제가 다 억울해지는군요. 명색이 채운의 황태자가 5년이나 수절 중인 줄도 모르고들 말입니다.”
“……수절 같은 거 아닙니다.”
채하가 시선을 떨구자 정 비서는 천천히 그의 손등에 주름진 제 손을 얹었다.
뜻밖의 행동에 채하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다 알고 있다는 듯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정 비서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아니라면 차라리 다행일 테지요. 부사장님. 이제 그만 작은 사모님을 보내드리는 게 어떻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