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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제 우린 부부야 (5/111)


5. 이제 우린 부부야
2022.08.17.



“거절할게요.”

역시나 민설원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올망졸망한 붉은 입술이 곧바로 단호한 거절의 뜻을 내놓았다.

그러곤 채하가 반박할 틈조차 없이 거절에 쐐기를 박았다.


“대뜸 집에 찾아와서 봉투를 내미는 것까진 이해하겠는데요. 그 이상은 전부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안 됐지만, 제 긍지는 그러라고 있는 게 아니라서요.”

거절할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런 좋은 조건 앞에서 한 치의 고민도 하지 않다니.

하나 민설원이 이렇게 나올수록 채하의 가슴 속에선 그녀가 ‘계약 결혼’의 조건에 가장 부합한다는 확신만 커질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는 모자랐는지, 설원은 아예 다과상을 치워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그를 쫓아냈다.

소금만 뿌리지 않았다뿐이지, 그의 등 뒤에 꽝꽝 못을 박으며.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쪽도 알아서 결혼하세요. 계약을 하든, 어머니께 떠밀려서 정략결혼을 하든.”

끝까지 이름 대신 ‘그쪽’이라는 호칭을 고수한 채, 설원은 낡은 대문이 끼익 소리가 나도록 닫아버렸다.

아주 매몰찬 거절이었다. 생전 처음 느끼는 기분이 들 정도로.

하나 상황이 완전히 바뀌는 데는 일주일도 채 걸리지 않았다.


 


[권채하 씨…… 흑…… 흑. 저희 엄마 좀 살려주세요. 권채하 씨…….]

대뜸 울음을 터뜨리며 설원에게서 전화가 걸려 온 것이었다.

애처로운 목소리에 곧장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그녀는 중환자실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 통곡하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아…… 권채하 씨…….”

단단하던 눈망울에 눈물이 그득 번진 채 그녀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일까. 그 표정에,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에, 심장이 일렁이는 것만 같았다.

마치 가슴에 멀미라도 난 것처럼.

곧 설원이 힘없이 몸을 일으키더니 말간 뺨에 번진 눈물을 슥 닦아냈다.


“……엄마가 또 쓰러지셨어요. 그런데 제가 일을 그만둔 걸 알아버려서…… 더는 짐이 되기 싫다고 호스피스에 가시겠대요.”

“호스피스라…….”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여기서 치료를 포기하면 정말로 얼마 못 살 거라고 의사 선생님이 그러셨어요. 그런데도 통 뜻을 꺾지 않으세요.”

방금 닦아냈는데도 어느새 설원의 눈망울엔 투명한 눈물이 그득 고여 있었다.

그것을 닦아주는 대신, 채하는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거래를 다시 제안하기로 했다.


“민설원 씨. 사람은 살리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신 어머니는 우리 주치의가 있는 병원으로 옮겨서 특실에서 입원 치료를 받도록 하고 지금까지 치료에 든 빚, 그것도 다 갚아주죠.”

“…….”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나와의 결혼이 그렇게 손해일 것 같지는 않은데.”

이미 반쯤 결심하고 저를 불렀을 텐데도, 설원의 손가락이 불안하게 꼼지락거렸다.

세간의 일반적인 상식으론 결혼이란 것이 인류 중대사인 만큼 채하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설원을 조금 더 안심시켜 주기로 했다.


“너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말한 대로 계약이지, 일반적인 부부 생활을 바라는 게 아니니까.”

“네?”

“그저 3년 동안, 내 아내라는 이름만 붙이고 있어 주면 됩니다. 어머니께서 어느 정도 포기하실 때까지만. 그리고 이 계약을 어떻게 할지는 그때 가서 다시 의논하는 걸로 하죠. 위자료라든가 뭐 그런 거.”

“아…… 위자료 같은 건 필요 없어요. 엄마 치료비만 도와주신다면 그걸로도 충분해요. 엄마가 회복하시면 원래 살던 시골에 돌아가서 작은 꽃집을 운영할 생각이거든요.”

“그럼 이 계약, 성립한 겁니다.”

아주 잠시, 그녀의 손끝에 망설임이 머물렀다.

그러나 잠시 후 그 망설임은 어머니의 목숨이라는 선택 불가능한 거래 조건 앞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



“얘! 채하야! 너 지금 뭐라고 했니?”

“결혼하겠다고 했습니다.”

“뭐? 결혼이라니? 갑자기 누구랑?”

“내일 집에 데리고 올 겁니다. 민설원 씨라고, 플로리스트예요.”

“얘, 얘…… 얘가 미쳤나 봐! 사라가 있는데, 채하 네가 누구랑 결혼을 해? 어? 여보! 당신도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백영하고 이번 주말에 식사 예약까지 다 해놨는데!”

입에 게거품을 물며 허영주 여사는 애꿎은 두 발을 동동거렸다.

말없이 신문을 보고 있던 권 회장도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는지, 곱게 신문을 접어 내려놓았다.


“어느 집안 아가씨냐.”

“아무 집안도 아닙니다. 가난해요. 병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채하의 말투에선 은근한 반항기가 새어 나왔다.

그걸 알아챈 권 회장이 혀를 차기가 무섭게 허영주 여사가 아들을 향해 다다다 달려왔다.

당장에 옷깃이라도 붙들고 흔들 기세였다.


“뭐, 뭐, 뭐? 병든 홀어머니? 채하야! 너 뭐 잘못 먹었니? 꽃뱀한테 걸리기라도 한 거야?”

“그런 줄 알고 계세요. 식장은 가능한 빠르게 잡아주시고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채하 너! 백영 그룹 막내딸 백사라가 네 약혼자라는 소문, 모르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약혼한 적도 없는데 약혼자라니, 헛소문이겠죠.”

채하가 냉담한 눈빛으로 어머니를 내려다보며 싸늘하게 덧붙였다.


“아니면 그걸 바라는 사람이 낸 소문이거나.”

“여, 여보! 당신 빨리 뭐라고 말 좀 해봐요! 채하가, 우리 채하가…….”

세상이 무너질 듯한 허영주와 달리 권 회장은 차분하게 자리에서 일어서선 물었다.


“마음 정한 거냐.”

“예.”

“그래. 내일 저녁 시간 비워두마.”

“여보!”

다급한 외침에도 권 회장은 할 말은 다 끝났다는 듯,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들의 결혼 문제에 있어선 허영주의 뜻을 꺾기가 역부족이었지만, 그는 본디 자식에게 무엇이든 강요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채하 역시 3층에 있는 제 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허락을 구하려는 게 아니라 일방적인 통보였으므로.

그러나 방문이 닫히기도 전에 허영주가 따라 들어와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권채하! 똑바로 들어! 나는 이 결혼, 허락 못 한다! 어디 근본도 없는 애를 채운 그룹 며느리로 들이겠다는 거야?”

“아직 보지도 않았는데, 근본이 있는지 없는지 어머니가 어떻게 아십니까.”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아니? 채하 너 잘 들어! 우리 집 며느리는 백사라야! 사라가 너랑 결혼하겠다고 몇 년째 나한테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결혼할 당사자는 어머니가 아니라 접니다.”

“안 돼!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 돼! 올해 안에 사라랑 결혼 날짜 잡기로 했다고!”

이미 고부 관계라도 맺은 듯 길길이 날뛰는 어머니를 보며 채하는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젊은 시절 초유의 인기를 누렸던 대 여배우.

눈부신 미모 덕분에 아버지의 눈에 들어 한순간 신분 상승을 했지만, 본래의 뿌리에 대한 열등감은 평생을 가도 가시질 않았다.

넘치는 허영심과 대비되는 출신의 빈곤함은 그녀를 늘 당당하지 못하게 했고, 그것은 자식 대에서 반드시 충족시켜야 할 욕구가 되었다.

위험한 욕구, 위험한 욕심. 결국은 비극적인 희생을 부른.


“……형을 보고도 아직 그런 말이 나오세요?”

채하의 말에 허영주의 몸이 충격을 받은 듯 비틀거렸다. 못 들을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크게 확장된 동공엔 분노가 여실히 담겨 있었다.


“너…… 너…… 채하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이만 나가주세요. 어머니. 저 피곤합니다. 결혼식은 윤 실장님하고 정 비서님께 의논해서 진행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상대가 백사라가 아니니 성대하게 할 필요도 없고요.”

“권채하…… 너 정말…… 정말 이럴 거야?”

“예. 이럴 겁니다. 어머니. 그러니까 어머니도 제발 그만 하세요.”

아들의 일침에 허영주의 가슴 속엔 형용할 수 없는 설움과 억울함이 피어올랐다.

응당 제 편이 되어야 할 아들이 어미의 가슴에 비수를 꽂고 있다니, 분하고 또 분했다.

누군지 몰라도 아직 보지도 않은 며느리가 미워 견딜 수 없었다.


“마음대로 해라! 하지만 결혼식은 절대 못 올려! 결혼식을 하려거든 나 죽고 난 다음에 해!”

“……어머니.”

“나는 그런 허접한 며느리 본다고 세상에 떠벌릴 생각 추호도 없다! 권채하, 네가 지금은 정신이 나간 모양이지만, 나중에 정신 차리면 나한테 고맙다고 할 거다. 이혼할 때쯤 되면 결혼식 안 올린 덕분에 그나마 조용히 헤어질 수 있을 테니까!”

허영주의 번뜩이는 두 눈에 담긴 광기, 형은 이걸 몇 번이나 마주했었을까.

형 태하를 떠올리자 불쑥 지친 감정이 밀려들었다.

그래서 채하는 그냥 한발 물러섰다. 어차피 크게 중요한 것도 아니었기에.


“알겠습니다. 하지만 혼인 신고는 할 겁니다. 그래야 백사라도 포기할 테니까. 설마 법적으로 유부남이 된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나오진 않겠죠.”

“채하 너 정말…….”

광기 어린 어머니의 눈에 분노의 눈물이 차올랐지만, 양보하는 것은 여기까지였다.

애초에 이 결혼을 하려는 목적이 분명한 만큼 그 목적을 반드시 이룰 작정이었다.

*



“저는 괜찮아요. 어차피 엄마가 아프셔서 결혼식 같은 건 올릴 상황도 아니고요.”

설원에게 사실을 전했을 때, 그녀의 반응은 채하가 예상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로의 이해관계로 맺어진 둘에게 결혼식은 딱히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차피 식을 올리려던 의도는 어머니와 백사라의 의지를 꺾었다는 것을 외부에 드러내기 위해서였기 때문이었다.

채운 그룹의 권채하는, 백영 그룹은 물론이고 어느 재벌가와도 혼인을 원하지 않는다고.

어쭙잖은 위로 대신 채하는 보상으로 사 온 물건을 설원에게 내밀었다.

앙증맞은 리본이 묶인 상자를 열자 설원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도 커다랗게 빛났다.

그야말로 예상도 못 했다는 표정이었다.


 


“아무리 계약이라고 해도 결혼반지 정도는 있어야겠지.”

“……이렇게 비싼 걸 줘도 돼요?”

“계약금 같은 거라고 생각해.”

그랬다. 계약금 혹은 보상.

엄밀히 말하면 저와의 결혼은 설원에게 ‘총알받이’가 되어 달란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안 좋은 소식도 있어.”

“뭔데요?”

설원이 반지를 껴보지도 않은 채 뚜껑을 닫으며 물었다.

어차피 직접 끼워줄 만한 사이도 아니었지만, 왠지 그 행동에 묘한 불쾌감이 밀려들었다.

게다가 나름 반지를 건넨 것을 기점으로 ‘부부’가 되었다 여겨 어쭙잖은 존댓말도 거두었는데, 그녀는 눈치채지도 못한 듯했다.

쓸모없는 감정을 억누르며, 채하가 덤덤히 말을 이었다.


“분가는 하지 못하게 됐어. 어머니께서 며느리로 받아들이는 대신, 무조건 집에서 함께 살아야 한다고 우기셔서.”

“아아…… 괜찮아요. 어쩔 수 없죠. 어차피 그런 걸 견뎌낼 만한 여자를 원해서 저를 선택한 거잖아요.”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채하는 변명도 위로도 더는 덧붙이지 않았다.

그녀라면, 긍지 높고 단단한 심성을 가진 민설원이라면.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어머니와 백사라로부터 방패막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었다.

그 정도로 사실혼을 유지한다면 막내딸을 금지옥엽으로 여기는 백영 그룹에서 저를 사위 후보로 더는 보지 않을 테고, 어머니 또한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만 하리라.

자신 역시 아내가 원하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지원할 작정이었다.

그러니 두 사람에게 이보다 완벽한 계약은 없을 터였다.

채하는 입가에 느른한 미소를 띠며 자신의 아내를 바라보았다.


“그럼 이걸로, 오늘부터 우리는 부부야. 민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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