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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가짜 프러포즈 (4/111)


4. 가짜 프러포즈
2022.08.14.



 


“여기인가.”

무심한 눈길로 채하는 살풍경한 풍경을 둘러보았다.

텔레비전 속에서나 보았던 낡고 궁상맞은 집들이 골목을 따라 지붕을 맞대고 있었다.

말끔한 그의 슈트 차림이 이곳에선 무척이나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제임스가 알려준 주소가 틀림없었지만, 불러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한참을 기다리던 채하는 녹이 슬어 모퉁이가 바스러진 우편함을 손가락으로 슬며시 밀어 보았다.

우편물이 있는 걸 보니 사람이 사는 게 분명한데, 인기척이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봉투를 이 안에 넣고 갈까 하다가, 그는 도로 가슴팍에 집어넣었다.

그때였다.


“어?”

생활 소음만으로 가득하던 풍경을 뚫고,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채하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민설원이 어깨에 누군가를 부축하며 오고 있었다.

힘겹게 지팡이를 짚고 있는 가녀린 중년의 여성.

따로 소개하지 않아도 그녀의 어머니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을 만큼 빼닮은 모녀였다.

흰 피부에 오목조목한 이목구비, 병색이 완연함에도 또렷하고 강단 있는 눈빛까지.

이윽고 채하의 근처까지 다가온 설원이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여긴 어떻게……? 혹시 저를 찾아오신 거예요?”

“숍으로 갔더니 일을 그만뒀다고 하길래 집으로 온 겁니다.”

차분히 답하며 채하가 그녀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결혼식장에서 보았을 때는 단정한 차림에 메이크업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화장기라곤 전혀 없이 편안한 차림새였다.

마찬가지로 채하를 살피고 있던 그녀의 어머니는 방금 한 말에 무척 놀란 기색이었다.


“일을 그만두다니, 이게 무슨 소리니. 설원아?”

“아…….”

어머니의 물음에 설원의 얼굴로 빠르게 당혹감이 퍼졌다.

보아하니 어머니는 아직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엄마. 일단 들어가요. 들어가서 얘기해요.”

설원이 어머니의 등을 떠밀며 파란 대문 안으로 걸음을 옮기자, 채하도 자연스레 그 뒤를 따랐다.

그러나 채 문턱을 넘기 전에 설원이 휙 뒤를 돌아보았다.


“……들어오려고요?”

그녀의 말에 대답한 것은 채하가 아니라 어머니 쪽이었다.


“설원아. 손님이 오셨는데 당연히 안으로 들여야지.”

“그게, 이분은 손님이 아니라…….”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

열린 대문을 호기롭게 통과하며, 채하가 마당 안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설원의 어머니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등 뒤에서 민설원이 곤란해하고 있는 게 여실히 느껴졌음에도 채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녀의 어머니가 채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작은 다과상을 차려 내 왔다.

안색을 보아하니 오래 서 있기도 힘들어 보이는 상태였지만, 고집만큼은 보통이 아니었다.


“…….”

설원의 어머니가 편하게 이야기하라며 자리를 비켜준 보람도 없이, 정작 둘 사이엔 침묵만 감돌고 있었다.

차를 홀짝이는 채하를 묵묵히 바라보던 설원이 참지 못하고 먼저 물꼬를 텄다.


“꽃값, 부족해요? 안 그래도 상태가 너무 좋은 은방울꽃이 왔길래 최대한 많이 넣었는데.”

“아니. 돌려주러 온 겁니다.”

“네?”

더 커질 데도 없어 보이는 그녀의 눈동자가 직설적으로 채하를 향했다.

묘한 끌림을 가진 눈빛.

지난번에도 그랬었지만, 이번에도 어쩐지 그 시선을 마주하는 게 불쾌하지 않았다.


“나는 내 행동에 값을 매기는 걸 싫어해서.”

“……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채하의 얼굴과 돈 봉투를 번갈아 보던 것도 잠시, 설원이 단호히 손을 저었다.


“죄송합니다. 저도 빚지는 걸 싫어하거든요.”

팽팽한 공기. 그건 한낱 자존심 싸움 같은 문제는 아니었다.


“저기요. 도와주신 건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쪽도 꽃을 구하느라 돈을 지불하셨을 거 아니에요. 그러니 이걸 받으시면 공평하게 끝날 일이 아닐까 싶은데요.”

“아버지?”

“네?”

뜬금없는 독백에 의아해하던 설원은 곧 채하의 시선이 벽에 걸린 아버지의 사진에 닿아 있음을 깨달았다.

소방복을 입고 환하고 호탕하게 웃고 계신 아버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버지.

……젊은 얼굴에서 영영 세월이 멈춰버린 아버지.


“예. 오래전에 순직하셨지만요.”

“힘들었겠군. 어머님도 거동이 불편하신 것 같던데, 일은 그래서 그만둔 겁니까?”

“아…… 네. 요즘 자주 쓰러지셔서, 아무래도 제가 계속 옆에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어디가 안 좋으신 겁니까?”

직설적인 질문에, 설원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면역 관련 희귀질환을 앓고 계세요. 처음부터 아프셨던 건 아니었는데, 아버지가 순직하신 뒤로 급격한 스트레스에 노출되면서 정상 세포들이 온몸을 공격하기 시작했어요.”

“암 같은 겁니까?”

“비슷하지만, 달라요. 항암제가 전혀 통하지 않으니까요. 외국에서 들어온 신약 하나로 지금까지 버텨왔는데 요즘 들어 발작도 잦고 자주 쓰러지세요.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제대로 서 있는 것도 힘든 정도예요.”

굳건하던 설원의 눈동자가 아린 슬픔에 젖어 흔들렸다.

제임스가 말한 대로 그녀의 형편은 참으로 좋지 않았다.

외국에서 들어온 신약이라면 국내엔 환자가 얼마 없다는 이야기일 테고, 당연히 약값은 아주 비쌀 터였다.

행여 방 안의 어머니가 들을까 우려하며 설원이 작게 속삭였다.


“그만둔 건 어머니한텐 비밀이에요. 병원비가 비싸다고 입원도 거부하는 통이라, 일까지 그만둔 걸 아시면…….”

“이 돈. 그냥 받아요.”

채하가 다시금 그녀 쪽으로 돈 봉투를 밀었다.

한데 이 안에 든 돈이 가장 절실할 그녀는, 되레 노여운 표정으로 그것을 다시 밀어주었다.


“받지 않겠습니다. 당신한테는 이게 별로 아깝지 않을 푼돈일지 모르지만, 저한테는 제 일에 대한 긍지니까요.”

“긍지?”

그 단어에 채하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주변의 어떤 인물도 이런 단어를 쓰지 않았는데, 생소하면서도 신선했다.


“네. 지금 그쪽이 차고 있는 시계, 아마 저희 집값보다도 비싸겠죠. 이 동네에 있는 여느 집보다도요. 당신 같은 사람들의 세계에서는 그런 걸 긍지라고 부를지 모르지만, 아버지가 제게 가르쳐주신 긍지는 그런 게 아니에요.”

새삼스럽게 채하는 아무렇게나 차고 나온 자신의 시계를 바라보았다.

딱히 값을 가늠해본 적은 없었는데, 게다가 이따위 물건이 제게 긍지가 될 리도 없는데.

조금 화가 난 듯 설원의 맑은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기 전에도 언제나 순직에 대비하셨어요. 자신은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다, 언제고 무슨 위험이 닥칠지 모른다. 행여 먼저 세상을 떠나더라도 그걸 고통으로 여기지 말고 아버지의 긍지로 여겨달라고.”

“훌륭하신 분이군요.”

“이번 일은 어디까지나 제 실수로 벌어진 일이니, 제가 수습하는 게 당연해요. 그러니 이 돈을 돌려주는 건 제게 실례예요.”

성인이 된 뒤론 태산 같은 채운 그룹의 회장, 즉 제 아버지로부터도 훈계 한 번 받은 일이 없는 채하였다.

한데 그녀의 훈계 아닌 훈계가 그다지 싫지 않아, 그는 느른하게 숨을 흘렸다.

그때였다. 방문이 살며시 열리더니 그녀의 어머니가 거실로 나왔다.


“엄마! 어디 불편해요?”

“아니야. 약 먹을 시간이라서 물 좀 뜨려고. 그나저나 저녁때가 다 됐는데, 식사라도 하고 가실래요?”

아까처럼 온화하게 웃으며 어머니가 채하에게 제안을 건넸다.

그 말에 설원이 당황하는 게 보여, 채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불쑥 찾아왔는데 그런 신세를 질 수는 없죠.”

“그런 말 말아요. 손님이 오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반갑기만 한데. 우리 설원이랑은 많이 친한가 봐요? 집을 다 알려주고.”

“엄마. 그런 게 아니라…….”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좋을지 곤란한 표정으로 설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그녀의 어머니는 더욱이 은은한 미소를 띠었다.


“아픈 사람이라 그런지, 항상 내가 떠나면 우리 딸이 혼자 될까 봐 걱정했거든요. 좋은 사람 만나 가정이라도 꾸리는 걸 보면 안심이 될 것도 같은데.”

“엄마도 참. 생판 남한테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친한 사이 아니라니까요?”

“어머, 죄송해요.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요즘 자꾸 실없는 소릴 하게 되네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채하가 입꼬리를 끌어올리자, 어머니가 싱긋 웃고는 물을 떠선 방으로 돌아갔다.

방문이 닫히자마자 설원은 그를 내쫓으려 했다.


“다 마셨으면 이만 돌아가 주세요. 이야기는 충분히 한 것 같으니까요.”

대답 대신 채하는 다과상 위의 차를 한 번에 들이마시곤, 입가에 묻은 물방울을 기다란 손가락으로 쓸었다.

제 안목이 들어맞았다. 역시 민설원은, 그가 찾던 여자였다.


“민설원 씨, 당신은 꽤 효녀 같은데 어머니를 안심시켜드릴 생각 없습니까?”

“네?”

“직설적으로 말하죠. 나와 결혼하는 게 어떻습니까?”

“……!”

결혼, 이라는 단어에 설원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노골적인 의문이 담긴 그 표정에, 채하는 얼른 말을 덧붙였다.


“정확히 말하면 계약을 하자는 이야기입니다. 계약 결혼.”

“……계약 결혼이요?”

“그렇습니다. 3년 정도. 이를테면 기간 한정 결혼인 셈이랄까.”

그는 기왕 확인하고 싶었던 것을 확인한 김에 명함을 꺼내며 ‘목적’을 확실하게 털어놓았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민설원 씨의 사정을 알아버렸으니 이쪽도 솔직히 털어놓도록 하죠. 반년 전에 형이 죽었습니다. 채운 그룹의 본래 후계자이자 어머니께서 가장 애지중지하셨던 아들이.”

‘채운 그룹’이라는 말에 명함을 내려다보던 설원이 흠칫했다.

그러나 채하는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그 탓에 어머니의 집착이 심해졌죠. 특히 결혼에 대해서.”

“…….”

“나는 재벌가의 널리고 널린 여자와 결혼할 생각 따윈 추호도 없습니다. 당신 말대로 자신의 긍지가 보석이나 핸드백, 값비싼 드레스에 있다고 믿는 부류들이라서.”

그들과 동급 취급한 게 미안해진 설원이 슬쩍 고개를 숙였다.

그녀에게 보이지 않게 입꼬리를 다시 한번 끌어올린 채하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어머니는 워낙에 드센 분이라 어지간한 마인드로는 상대가 안 될 겁니다. 나는 민설원, 당신의 굳건한 눈빛과 긍지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거기다 입도 무거운 것 같으니 계약 내용을 섣불리 발설하지도 않을 것 같달까.”

찻잔 손잡이를 쥐고 있던 설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 자그마한 손을 힐끔 본 뒤 채하는 이 제안에 조금 더 박차를 가했다.


“일을 그만뒀으니 수입이 없으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당신은 아니라도, 어머니는 돈이 필요하실 것 같은데. 사위가 있으면 더 기뻐하실 거 같고.”

반쯤 능청이 섞였지만, 차마 부정할 수 없는 말에 설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채하는 그녀가 결코 거절할 수 없는 카드를 내놓았다.


“필요한 건 얼마든지 줄 수 있습니다. 나와 결혼하는 조건으로 당신 어머니의 치료비를 전부 대도록 하죠. 결혼 기간과 상관없이 완전히 회복하실 때까지 어떤 약이든 수술이든, 현존하는 최고의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그쪽이…….”

“권채하.”

“네?”

단호한 음성에 설원의 시선이 채하의 얼굴에 붙박였다.

왜인지 그 눈망울이 오래 머물렀으면 좋겠다는, 생소한 감정이 채하의 가슴을 스쳤다.

그래서 채하는 서슴없이 가짜 프러포즈를 건넸다.


“내 이름, 권채하입니다. 이 정도면 서로 윈윈일 것 같은데 민설원 씨. 우리 결혼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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