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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녀를 택하지 않았더라면 (3/111)


3. 그녀를 택하지 않았더라면
2022.08.10.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어머니?”

채하의 짙은 눈썹이 맹렬한 분노로 꿈틀대며 제 어머니 허영주를 향했다.

그러자 그녀가 벼르고 별렀다는 듯 허리에 양손을 짚은 채 훈계조로 쏘아붙였다.


“장례식을 치르자고 했다.”

“하.”

그의 입에서 공허와 분노가 뒤섞인 탄식이 흘러나왔다.

가당치도 않은 단어를 들었다는 것처럼.


“장례식이라니요? 누가 죽었습니까?”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잖니!”

“네. 겨우 일주일 지났죠.”

“채하 네가 바라는 대로 잠수원까지 투입해서 찾을 만큼 찾았다. 근방의 섬들 해안까지 싹 수색했고. 더 뭘 해야 하니? 이제 포기해라. 아무리 수색해도 시신을 발견할 수 없…….”

“어머니.”

살벌하게 울리는 목소리는 허영주의 귀에 거의 위협처럼 들려왔다.

여전히 낮은 목소리로, 하지만 더 말했다간 지옥에라도 끌고 갈 듯한 음성이 그의 목을 긁으며 흘러나왔다.


“말씀 가려서 하십시오. 민설원은, 제 아내는 죽지 않았습니다.”

그 말에 허영주는 치솟는 짜증을 결국 표출하고 말았다.

지난 며칠간은 남편의 만류에 꾹 참고 있었지만, 이젠 인내심이 바닥난 탓이었다.

겨우 그런 별 볼 일 없는 여자 하나 때문에 온 집안이 살얼음판이라니.


“권채하! 그럼 이대로 마냥 실종 상태로 놔두자는 말이야? 찝찝하게 난 그렇게 못 한다! 떠난 사람을 위해서라도 제대로 장례식을 치러주는 게 맞는 법이야. 죽은 사람은 보내야지.”

피식, 채하의 입가에 비웃음이 서렸다.


“이상하군요. 어머니께서 제 아내를 그렇게 생각해주는 줄 미처 몰랐습니다. 누가 들으면 꼭 성대한 파티라도 열어주는 줄 알겠네요.”

“…….”

“그리고.”

채하의 눈빛에 서늘한 이채가 스치는가 싶더니, 그가 어머니를 향해 한 발자국 성큼 다가섰다.

기세에 눌린 허영주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자, 채하는 차가운 말투로 마지막 일침을 가했다.


“결혼식도 못 올리게 하신 분이, 장례식은 기어이 치르려고 하시는 이유가 궁금해지는군요. 제가 결혼한 사실은 입에 담기도 싫어하셨으면서, 아내가 죽은 사실은 세상에 다 공표하고 싶으신 겁니까?”

움찔, 하고 허영주의 눈가가 떨렸다.

그러나 며칠 만에 얻은 말을 섞을 기회를 이대로 놓칠 수는 없었다.


“떠난 사람은 떠난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채하 네 앞길도 좀 생각해야 할 거 아니니?”

“글쎄요. 제 앞길이라. 아내가 사라진 뒤 일주일 만에 생각할 거리로는 부적절한 것 같군요.”

채하의 말에 허영주가 발끈하며 결국 언성을 높였다.


“언제고 새 출발은 해야지! 그럼 죽은 마누라만 끌어안고 살 거야? 잘 들어. 권채하. 민설원은 죽었어! 방파제에서 추락해서 파도에 휩쓸려 갔다고 경찰이…….”

“어머니.”

오싹한 음성에 허영주의 입이 절로 다물어졌다.

곧 피가 날 정도로 세게 이를 악물며 채하가 스산하게 읊조렸다.


“죽었다는 말, 한 번만 더 꺼냈다간 저도 제가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그저 말이 아니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낀 허영주가 애처로운 두 눈만 끔벅였다.

그런 어머니를 뒤로하고 채하는 거친 발걸음으로 위층으로 향했다.

예나 지금이나 결혼에 지독하게 집착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원의 자리에 온기도 가시기 전에 재가를 운운하다니 실로 기가 찼다.


“……하.”

하나 계단을 끝까지 올랐을 때, 결국 화살이 향한 곳은 그 자신이었다.

누구를 비난할 자격이 있단 말인가.

설원을 그렇게 만든 것은 바로 그가 아니던가.

이제껏 살면서 그 무엇에도 후회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는 채하였다.

뒤돌아볼 여지가 없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선택만을 했기 때문이었다.

한데 이 순간 인생 최대의, 그야말로 감당할 수 없는 후회가 폭풍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하…… 하하.”

실성한 사람처럼 실소를 토해내며 채하는 가슴을 쥐어뜯었다.

저만 만나지 않았더라면 민설원은 살 수 있었을 터였다.

그녀에게 계약 결혼 따위를 제안하지만 않았더라면.

권채하. 제가 그녀를 택하지 않았더라면.


 
3년 전.

채운 그룹의 장남이자 채하의 형인 권태하가 죽은 뒤로 허영주의 히스테리는 날로 심해졌다.

그녀는 장남을 통해 이루지 못한 열망을 차남이 반드시 이뤄줄 것을 종용했다.

그것은 바로 걸출한 집안과의 ‘결혼’이었다.

일찍이 허영주는 채운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그룹의 딸들을 두 아들의 며느릿감으로 점찍어두었다. 그중 하나가 백영 그룹의 막내딸, 백사라였다.

한데 태하가 갑작스레 죽자 그녀는 염불 외듯 백사라의 존재를 채하에게 주입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결혼 생각이 없다고 말해도 막무가내였다.

형의 죽음을 무기 삼아 눈물로 호소하면, 채하로서도 아들 된 도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지나친 집착에 점점 피로감은 짙어져만 갔다.

원치도 않는 결혼식에 얼굴을 비치고 돌아온 그날도, 어김없이 허영주가 그를 붙들었다.


“다음 주에 백영 어른들하고 자리 만들기로 했다. 시간 비워 둬.”

“어머니. 저는 싫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을 텐데요.”

“사라 걔, 애가 얼마나 살가운지 몰라. 확실히 좋은 집안에서 곱게 자란 애는 다르더라. 벌써부터 어머님, 어머님하고 따르는데 어찌나 예쁘던지.”

역시나 그녀는 아들의 의사 따윈 들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하, 채하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으며 제 방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런 그의 등에 허영주의 선전포고가 화살처럼 날아와 꽂혔다.


“꼭 참석해. 따로 맘에 둔 여자가 있는 것도 아닌데, 최고의 신붓감을 마다할 이유가 뭐가 있니? 다 내가 채하 널 위해서 그러는 거야!”

차라리 어머니가 대신 결혼하시란 말이 목 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그녀를 자극하면 또 바닥에 주저앉아 몇 시간이고 형의 이름을 부르며 통곡할 게 뻔했다.

평생 어머니의 말을 고분고분 들었지만, 마지막엔 그녀를 끝없이 실망시킨.

그래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형의 이름을.

형인 태하가 죽은 뒤로 채하는 좀처럼 제대로 잠들 수가 없었다.

가족에게 정이 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피붙이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에게도 큰 상처를 남겼다.

지친 마음에 몇 번이고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채하는 어리석을 정도로 우직했던 형을 떠올렸다.


“바보같이.”

결국 채하는 핏줄이 곤두서도록 세게 이불을 말아쥐었다.

동시에 형을 보내고도 변함이 없는 어머니에게 형용할 수 없는 반발심이 치밀었다.

지금껏 여자에 관심을 가져본 적 없는 그였기에, 허영주가 더욱 거침없이 밀어붙이고 있다는 점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채하는 절대 백사라와 결혼할 생각 따윈 없었다.

그런 번드르르하고 화려하기만 한, 속이 텅 빈 여자는 추호도 원치 않았다.

어차피 누군가와 결혼해야만 한다면, 어머니가 원하는 정반대의 여자와 하고 싶었다.

아무런 배경도, 가진 것도 없는 여자.

그러기 위해선 진짜가 아니라 해도 가짜 상대라도 데려올 수 있었다.


“가짜…….”

그 단어를 읊조리던 채하의 뇌리에 문득 한 여자가 스쳐 지나갔다.

오늘 결혼식장에서 만났던 묘한 분위기를 지닌 여자.

지금껏 제가 봐 온 부류의 여자들과는 다른 결을 가진 여자였다.

왜일까. 그녀의 이름 말고는 아무것도 아는 것도 없으면서, 이상하게 그녀가 떠올랐다.

침대에서 일어선 채하는 곧바로 걸어두었던 재킷 주머니 깊숙한 곳을 헤쳤다.

그리고 그 안에서 아까 받아들었던 명함을 꺼내 들었다.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숍 명함임에도, 흰 종이 위로 이름 석 자가 선명히 어른거렸다.

민설원. 그녀의 이름.

꽃값을 받을 생각은 물론 추호도 없었다.

다만 단단한 눈빛으로 저를 응시하던 그 눈동자를 한 번 더 마주하고 싶어졌다.

*

다음 날, 채하의 까만 세단이 미끄러지듯 한 건물 앞에 멈춰 섰다.

[로라 앤 제임스 플라워]

마치 커다란 온실을 연상케 하는 통유리 건물 안으로 채하는 주저 없이 걸음을 옮겼다.


“실례합니다.”

“예. 어서 오십시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안에서 꽃을 손질하고 있던 한 남자가 방긋 웃으며 채하 쪽을 돌아보았다.

옅은 개나리색의 수염이 인상적인, 중년의 혼혈 남성이었다.

아마도 그가 오너인 제임스인 모양이었다.

한데 용건을 꺼내기도 전에 그가 반가운 얼굴로 대뜸 다가와 아는 체를 했다.


“혹시 우리 설원 씨를 도와주신 분이신가요?”

“네?”

“설원 씨가 어제 키 크고 잘생긴 남자분께 도움을 받았다면서, 숍에 찾아오면 이걸 전해주라고 했거든요.”

그가 싱글거리며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키 크고 잘생긴 남자분이라니, 그녀가 그렇게 말했을 것 같진 않은데.

얼떨떨한 손길로 채하가 그 봉투를 받아들자 이내 그의 미소가 시름으로 바뀌었다.


“죄송합니다. 손님. 사실은 제가, 무슨 문제가 생겼나 싶어 봉투를 열어봤습니다.”

“그렇습니까.”

“예. 그런데 적지 않은 돈이 들어있더군요. 그래서 말인데, 실례지만 혹시 설원 씨가 그만둔 것과 이 돈이 관계가 있나요?”

“……네? 민설원 씨가 그만뒀다고 하셨습니까?”

뜻밖의 말에 채하가 되묻자, 제임스가 수심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제 사직서를 냈습니다.”

“사직서…….”

“보기 드문 인재였는데 저도 참 유감이에요. 정식으로 꽃을 배운 적은 없어도 감각이 아주 뛰어났거든요. 내 아내 로라가 아주 극찬해서 특별히 채용한 건데, 무척 아쉽습니다.”

제임스가 조심스레 채하의 눈치를 살피곤 말을 이었다.


“사실 그래서 더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설원 씨 형편상 그런 돈을 마련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갑자기 일까지 그만둬서요.”

형편이 좋지 않다라……. 대답 대신 채하는 그 말을 곱씹었다.


“혹시 설원 씨와는 무슨 사이신가요? 무슨 일로 설원 씨가 손님께 이 돈을 드리는지, 실례지만 제가 알 수 없을까요? 만일 가게의 책임이 있다면 제가 대신 물어드리겠습니다.”

채하는 무심한 손길로 봉투를 열어보았다.

과연 제임스가 우려할 정도의 금액이 그 안에 들어 있었다.

넉넉하게 은방울꽃을 배달해주긴 했지만, 그보다도 더 넘치게 돌아온 듯했다.


“전 민설원 씨와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그냥 어제 결혼식장에서 한 번 스친 게 답니다. 하객으로 참석했었거든요.”

“……그렇군요.”

칼같이 돌아온 채하의 대답에 오너 제임스가 들고 있던 조경 가위를 내려놓고서 한숨을 쉬었다.

그는 설원이 어제 당한 일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시시콜콜 일러바치지 않는다는 말이 그냥 던진 말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억울함을 토로할 법도 한데, 꽤나 입이 무거운 여자였다.

채하가 받았던 봉투를 다시 제임스에게 밀어주었다.


“어쨌든 이건 됐습니다. 꽃값을 받으러 온 게 아니니까요.”

“아닙니다. 전 부탁을 받았으니 분명히 전해드려야죠. 돌려주시려면 설원 씨를 직접 만나서 돌려주시는 게 맞아요.”

과연 제삼자에게 넘길 일이 아니긴 했다.

결국 채하는 제임스에게서 돈 봉투와 함께 설원의 주소를 받아들었다.

돈도 돈이지만, 실은 그녀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보고픈 마음이 가장 컸기에.

어쩌면 민설원은 지금의 제게 가장 필요한 여자일지도 몰랐다.

그것을 똑똑히 확인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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