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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산모 수첩 (2/111)


2. 산모 수첩
2022.08.07.



“민설원!”

앙칼진 외침이 등 뒤에서 들려오더니, 그녀의 일행이 일제히 몰려왔다.

그러더니만 꼭 기다렸던 듯 비난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어머, 어떡해! 하필 자갈 사이로 떨어져서 꽃잎이 다 망가졌어요. 언니!”

“큰일 났네. 이거 신부 대기실이랑 단상 센터피스 용이라 중요한 건데!”

그들 덕분에 채하는 방금 부딪친 여자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민설원. 아무도 밟지 않은 새벽의 흰 눈 같은, 잘 어울리는 이름이란 생각이 들었다.

세 여자는 부딪친 채하의 존재는 보이지도 않는지 그녀에게 쏘아대기 바빴다.

대충 비싼 건데 어쩔 거냐, 네가 책임질 거냐. 이런 뻔뻔스러운 내용들이었다.

보다 못한 채하가 성큼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그만하시죠. 어디 숍 소속입니까? 남의 결혼식장에서 민폐란 것도 모르나.”

“뭐……!”

민영이란 여자가 언성을 높이려다, 그의 서슬퍼런 시선을 마주하자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쳤다.

채하가 한마디 더 얹으려던 찰나였다. 설원이 재빠르게 상황을 정리하며 나섰다.


“선배. 제 잘못이니까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럼 되죠?”

“그, 그럼 당연하지! 꽃값도 네가 알아서 보상해!”

철면피 같은 소리를 마지막까지 내뱉곤 그들은 도망치듯 사라졌다.

그러자 설원이 작게 한숨을 쉬더니 채하에게 다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못 볼 꼴을 보였네요.”

짤막하게 한마디를 건네곤 설원은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은방울꽃들을 줍기 시작했다.

한 송이, 한 송이. 그녀의 손에 다시 꽃들이 모여갔지만, 이미 부질없어 보였다.


“그 꽃들, 다 못 쓰는 거 아닙니까?”

그 말에 흠칫 설원의 손이 멈추더니 자세를 곧추세웠다.

이제 보니 그녀의 눈높이는 겨우 채하의 가슴팍 정도까지밖에 오지 않았다.

그녀가 자갈에 치여 너덜거리는 자그마한 꽃들을 살펴보곤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런 것 같네요. 꽃도 없는데 어쩌지.”

“꽃이 없다?”

“아. 은방울꽃은 수입인데, 수입도 잘 안 되거든요. 몇 주 전부터 예약을 걸어놓고 사입하는 거라 당장 구할 수 있는 데가 없어요. 저희 숍만 해도 꽤 큰데, 여분이 따로 없을 정도니까요.”

들어보니 꽤나 곤란한 상황이었다.

채하는 힐끗 방금 세 사람이 도망친 방향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저들 책임도 있는 거 아닙니까? 숍에 보고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시시콜콜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살기엔 세상은 녹록지 않으니까요.”

“제삼자가 듣기에도 민망한 소릴 지껄이던데, 그럼 그것도 괜찮은 겁니까?”

“그건…….”

설원의 흰 뺨이 살짝 붉어진 듯 보였다.

그녀가 변명하듯 얼른 말을 이었다.


“그냥…… 손님 한 분이 원래 예약한 부케 말고 제가 작업한 걸 원하신다고 한 바람에. 좀 오해가 있었어요.”

결국은 질투란 거군, 채하는 속으로 츳 하고 혀를 찼다.

실력이 부족하면 갈고 닦을 것이지, 뒤에서 추잡한 괴롭힘이나 주도하고 있다니.


“어쨌든 굳이 일일이 대응할 필요 없어요. 지금은 이 꽃을 어떻게 할지가 저한텐 더 중요한 일이고요.”

이쪽이 나이는 확실히 더 어려 보이는데, 말투는 아까 그들보다 두 배는 어른스러워 보였다.


“여기서 기다려요. 그 은방울꽃, 30분 안에 가져다주라고 하죠.”

“네. 네?”

채하의 말에 그녀의 눈동자가 꽃에서 시선을 옮겨 그에게로 올라왔다.

한없이 당찬, 왠지 눈을 떼기 어려운 눈망울이었다.


“말 그대로 기다리란 뜻입니다. 부딪친 데엔 내 책임도 있으니까.”

불친절한 설명을 끝내고, 채하는 원래 있던 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하객들 안에는 웨딩 관련 업체를 줄줄이 거느린 거대 호텔 체인의 아들도 있었다.

꽃 몇 송이쯤 받아오는 일은, 적어도 권채하에겐 아무 일도 아니었다.


“잠깐만요!”

채하의 걸음을 멈추게 한 건 슈트 자락을 붙든 자그마한 손이었다.

어째서일까. 타인의 접촉을 싫어하는 그임에도 딱히 불쾌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은은히 감도는 은방울꽃 향기 덕분인 건지.


“뭡니까? 기다리라니까.”

“여기, 저희 숍 명함이에요.”

다급한 손길로 그녀가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제가 지금은 숍 명함밖에 없어서요. 꽃값, 꼭 드릴 테니까. 숍으로 연락주세요.”

그렇게 말하곤 설원은 바닥에 떨어진 나머지 꽃들을 주우러 자리로 돌아갔다.

그제야 채하는 손을 펴고 그녀에게 돌려주지 않은 은방울꽃을 내려다보았다.

수줍게 고개를 숙인, 작고 여리면서도 한없이 고귀해 보이는 꽃.

민설원. 그녀와 꼭 닮은 꽃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상무님.”

정 비서가 한참을 고개만 숙이고 있는 채하를 향해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그는 같은 내용의 경찰 브리핑을 몇 번이나 들은 뒤 깊은 침묵에 빠져 있었다.

브리핑 내용은 전화로 들었던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건져진 것은 차량과 몇 점의 소지품들뿐이고, 차량 소유주인 설원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아마 거센 파도 탓에 멀리 떠내려갔으리라는 추가 설명은, 채하의 매서운 눈빛 앞에서 힘을 잃고 사그라졌다.

그러나 해양 경찰들은 이미 그녀의 사망을 기정사실로 한 듯 보였다.

채하는 경찰이 건네준 설원의 소지품들을 한참이나 내려다보았다.

물에 젖어 쭈그러든 크림색 카디건과 수수한 에코백, 긴 머리카락에 늘 질끈 묶여있던 머리끈까지.

주인을 잃은 그 물건들은 신분증과 함께 탁자에 덩그러니 놓인 채, 그가 거둬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채하는 차마 그것들에 손끝 하나 댈 수가 없었다.

사고 후 벌써 6시간이 흘렀다.

곧 자정, 조금 전 해양 수색대가 거친 파도 탓에 수색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고 통보해 온 뒤로 채하의 눈동자에선 아예 빛이 사라져버렸다.


“……민설원.”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이 너무도 공허하게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민설원, 겨우 스물여섯밖에 안 된 자신의 아내.

운명의 장난처럼 그녀는 세 번째 결혼기념일에 불의의 사고를 당해 바다에 삼켜지고 말았다.


“상무님. 일단 댁으로 돌아가시죠. 여기서 이러고 계셔도 딱히…….”

보다 못한 정 비서가 채하를 설득하려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러나 채하의 뇌리엔 오늘 아침 마지막으로 보았던 설원의 눈망울만이 계속해서 맴돌 뿐이었다.

오늘따라 설원은 꼭 제게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수줍은 듯 달싹이던 입술은 무엇을 전하려고 했던 걸까.

아니, 그게 무슨 말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채하 쪽에서 그녀에게 먼저 말했어야 했다.

한정된 기간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나와 부부로 있어 달라고.

계약이 아닌 진실한 관계로 함께해 달라고.

말을 아끼고 마음을 아낀 자신을 탓해봐야 이미 늦은 일이었다.

전하지 못한 진심은, 설원의 존재와 함께 깊숙이 가라앉고 말았다.

*

방문을 열자 낯선 공기가 그를 반겼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두 사람의 체향이 뒤섞여 있던 공간.

하지만 지금 그녀의 향기는 그저 희미할 뿐이었다.

텅 빈 침대에 털썩 걸터앉아, 채하는 거칠게 이마를 쓸어올렸다.

익숙했던 침대가 오늘은 유난히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채하는 무심한 손길로 부들거리는 이불 위를 쓸어보았다.

추위를 많이 타는 그녀 때문에 5월인 지금까지도 두툼한 이불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이 이불의 주인은 더는 이 공간에 없다니.

원망인지 의문인지 모를 말이 입가에서 무심코 흘러나왔다.


“……나더러 당신이 죽었다는 걸 믿으라고?”

어제까지만 해도 이 침대에서, 그녀의 숨결이 닿는 거리에서 잠을 청했던 그였다.

늘 반듯이 누워 잠드는 설원이 이따금 제 쪽으로 몸을 틀 때면, 그녀의 얼굴을 한참이나 멍하니 바라보기도 했다.

살포시 다문 붉은 입술, 흰 목덜미 뒤로 넘실대던 긴 머리카락, 유난히 체온이 높은 따스하고 보드라운 몸.

곁에 있으면 은은하게 풍기던 꽃향기까지…….

모든 것이 이토록 생생한데, 민설원이라는 존재가 그려낼 수 있을 듯 선명한데.

채하는 제 손을 새삼 들여다보았다.

가장 괴로웠을 때 이 손을 꼭 잡아주던 자그마한 손이 이젠 곁에 없었다.


 


“하…….”

바닥으로 떨구려던 손은 채 바닥에 닿지 못하고 채하의 두 눈을 가려버렸다.

슬픈 건가? 알 수가 없어서인지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그저 입에서 계속 튀어나올 것 같은 그녀의 이름을, 삼키고 또 삼킬 뿐.

한참을 신음하던 그는 와인 진열장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가, 가장 높은 도수의 위스키를 병째로 꺼내 들었다.

한동안은 술에 입을 대지 않았지만, 오늘만큼은 한계였다.


“제기랄……!”

기어이 채하는 벽에다 술병을 내던지고 말았다.

빌어먹을 술, 빌어먹을 권채하.

평소라면 벌써 취했어야 하건만 아무리 마시고 마셔도 기억과 감각만 더 또렷해졌다.


“미치겠군.”

자리에서 일어선 채하는 설원이 쓰던 수납장으로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재벌가의 사모님 것이라곤 믿기 힘들 정도로 소박한 원목 화장대 의자에 걸터앉아, 채하는 다시금 거칠게 얼굴을 쓸었다.

그러고는 미친 사람처럼 서랍장 하나하나를 열어젖히기 시작했다.

화장대의 서랍부터 장롱까지 전부 열었지만, 그 안은 반도 채 차 있지 않았다.

3년이나 이 채운가의 사람으로 있었으면서, 민설원이라는 여자는 욕심도 없었던 모양이었다.

분명 마음대로 쓰라는 말과 함께 한도가 없는 카드를 건네줬던 걸로 아는데, 그럴싸한 옷도 가방도 액세서리도 아무것도 없었다.

자조의 웃음을 피식 흘리며 채하는 거칠게 장롱 가장 밑바닥 서랍을 열었다.

순간 채하의 손이 멈췄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건 색이 바랜 리본이 달린 반지 상자였다.

아득한 기억 속에서 그녀에게 이것을 의무적으로 건넸던 순간이 떠올랐다.

채하는 얼른 그 상자를 열었다. 어차피 비어 있으리라고 믿으며.

아내의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이 집에 들어온 날부터 설원은 결혼반지를 한시도 손에서 빼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게 여기 있지?”

채하는 거친 손길로 반지를 케이스에서 빼냈다.

엄지와 검지 사이로 그 반지를 들고서 그는 찬찬히 그 물건을 살펴보았다.

영롱하기 그지없는 커다란 다이아몬드와 이니셜 대신 새겨진 5월 24일이라는 결혼 날짜.

이것은 그가 건넨 결혼반지가 틀림없었다.

혼란의 연속 탓에 이성적 사고가 원활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기분이 가슴 한복판까지 밀려왔다.

왜 하필, 그녀는 사고를 당한 날 반지를 끼고 있지 않았을까.

그때였다. 채하의 눈에 무언가 다른 물건이 들어왔다.

그가 이 반지 상자를 거칠게 끄집어내지 않았다면, 발견되지 않았을지도 모를 것이.

상자가 놓여 있던 선반 아래 틈새로 종이 같은 것이 삐죽 튀어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채하는 얼른 손을 뻗어 아예 그 거추장스러운 선반을 빼버렸다.

그러자 그 안에 들어있던 종이가 온전한 형태를 드러냈다.

그것을 본 채하의 동공이 충격으로 확장됨과 동시에 눈에 핏발이 섰다.


“이건…….”

집어 드는 손이 미친 듯 떨려와, 채하는 나머지 한 손으로 제 손목을 붙들어야만 했다.

자그마한 분홍색 수첩. 그 겉면에는 ‘산모 수첩’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아래에 민설원이라는 이름과 함께.


“산모 수첩…….”

3년이라는 결혼 생활을 지속하면서도 그의 세상은 설원의 세상과는 완전히 별개였다.

한데 이 순간, 그녀의 이름 석 자에 채하의 세상이 우지끈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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