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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은방울꽃 부케 (1/111)


1. 은방울꽃 부케
2022.08.03.




“꽃이라도 주문할까요, 상무님?”

업무 보고를 끝낸 정 비서가 슬며시 눈치를 살피며 운을 띄웠다.

사각사각 만년필 소리가 뚝 하고 멈추더니, 예상대로의 대답이 곧바로 돌아왔다.


“꽃은 무슨 꽃입니까. 용무 끝났으면 나가 보세요.”

무심함이 실린 굵고 차분한 음성이 묵직하게 공기를 잠식하며 내려앉았다.

이제 겨우 스물아홉 살의 젊은 상무이자, 채운 그룹의 공식 차기 후계자인 권채하.

아버지인 권 회장을 닮아 완벽한 경영 능력과 우수한 두뇌를 지닌 그는 명실공히 채운의 걸작품이었다.

과거 여배우였던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출중한 외모는 황태자라는 별명에 손색이 없었다.

여백 하나 없는 단정한 이목구비, 한 획에 대범하게 그은 듯 날렵한 콧날과 턱선.

우수 짙은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깊고 강직한 눈빛은 존재에 무게감을 실어주었다.

거기다 늘 꼿꼿하고 곧은 자세의 190cm에 가까운 장신까지.

그야말로 남들이 부러워하는 건 다 가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만 그의 심장에는 온기가 없었다.

권채하는 자신 말곤 아무도 믿지 않는, 일과 성공 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는 남자였으니.

정 비서는 이 준수하고 수려하며, 냉담하기 그지없는 상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아뇨. 그저 오늘따라 상무님께서 조금 싱숭생숭해 보이십니다.”

정곡을 찔린 채하의 손등뼈가 허옇게 불거졌다.

좀처럼 속내를 비치지 않는 그였지만, 오늘만큼은 마음의 동요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정 비서님. 아니, 정 씨 아저씨. 이제 일은 쉬시고 손주들 돌보는 게 낫지 않으시겠습니까? 원하시면 계열사 임원도 다실 수 있으실 분이 굳이 까탈스러운 제 옆에서 비서 노릇을 자처하실 필요는 없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마를 쓸어 넘기며 채하가 입이 닳도록 했던 이야기를 또다시 꺼냈다.

그러자 정 비서 역시 늘 그랬듯 빙그레 웃으며 받아쳤다.


“그럴 수야 있겠습니까. 제가 상무님 곁에 없으면, 우리 채운의 황태자께서 괴물이라 불릴지도 모르는데요.”

원래 오랫동안 형을 보좌하던 정 비서는 본인의 간곡한 요청으로 현재는 채하의 비서를 맡고 있었다.

채하의 아버지인 권 회장과는 동향 친구인지라, 사적으로도 긴밀한 관계이기도 했다.


“연세가 드셔서 그런지 많이 뻔뻔해지셨습니다.”

“나이가 들면 보이지 않던 것도 보이기 마련이지요. 오늘은 상무님 세 번째 결혼기념일이잖습니까. 큰 선물이 아니어도 꽃 한 송이라도 사다 드리면 작은 사모님께서 기뻐하실 겁니다.”

“결혼기념일…….”

그 단어에 채하의 희고 평평한 미간이 깊게 파였다.

곧 그가 만년필을 내려놓고 달력으로 시선을 돌렸다.

5월 24일.

이 날짜가 뜻하는 바는 또렷하게 인쇄된 달력의 볼드체만큼이나 명확했다.

아내인 민설원과의 세 번째 결혼기념일. 즉 두 사람의 계약이 종료되는 날이었다.

문득 채하의 뇌리에 오늘 아침 그를 배웅하던 그녀의 말간 얼굴이 떠올랐다.

평소의 무던한 태도와 달리 설원은 오늘따라 유독 살가운 눈길로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 붉고 오밀조밀한 입술에 하마터면 채하는 그대로 고개를 내려버릴 뻔했다.

계약으로 이뤄진 사이라는 것을 똑똑히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왠지 오늘은 그녀의 눈망울에서 더욱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어느새 저도 모르게 익숙해진 눈망울이었다.

아니, 사실 익숙해진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민설원이라는 여자의 체온, 목소리, 걸음걸이…….

모든 것이 그에겐 자연스럽게 스며든 일상이 되어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사람의 온기에 이런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한시도 편하게 잘 수 없던 그가 그녀의 곁에서만큼은 깊이 잠들 수 있게 된 이후로, 채하는 제 감정에 이따금 의문을 던지곤 했다.

그리고 비로소 끝을 앞둔 이 순간, 어렴풋이 답을 알 것 같았다.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는 걸.

천천히 고개를 들자 눈앞엔 너그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정 비서가 서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다 헤아릴 수 있다는 표정이었다.


“어떤 꽃으로 할까요?”

결심한 일에는 주저하는 법이 없는 채하가 즉시 답을 내놓았다.

이것이야말로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은방울꽃으로 하죠.”

“네네! 아주 잘 생각하셨습니다. 어떤 식으로 할까요? 다발? 아니면…….”

“잠시만요.”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정 비서에게서 그가 잠시 시선을 돌렸다.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에서 요란하게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낯선 지역 번호. 왜인지 본능적으로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안 받으십니까?”

의아해하는 정 비서의 채근에 할 수 없이 채하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권채하입니다.”

[아. 여기는 양양 해양경찰서입니다. 민설원 씨 남편 되십니까?]

남편…… 새삼 그 단어가 마음을 찔렀다. 여전히 가시지 않은 불안과 함께.


“예. 그렇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사고가 났습니다. 아내분께서 몰던 차가 항구 방파제 아래로 추락했습니다. 조금 전 차량은 발견한 상태인데, 차주는 아무래도 파도에 휩쓸린 것 같습니다. 수색 중이긴 한데 파도가 워낙 높아서…….]

“……추락?”

[네. 신분증이 차량 내 가방에 들어 있어서 연락드린 겁니다. 일단 급히 좀 와주셔야겠습니다.]

무슨 소리냐고, 멀쩡하던 차가 왜 바다로 추락했냐고, 지금 민설원은 어디에 있냐고.

치미는 물음은 억눌린 잇새 사이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저 핸드폰을 쥔 손만이 미친 듯이 떨릴 뿐이었다.

경악과 공포로 세차게 흔들리는 그의 눈빛은, 마치 세상의 종말 소식이라도 들은 사람 같았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정 비서가 그의 곁으로 조심스레 다가섰다.


“저, 부사장님. 작은 사모님께 무슨 일이라도…….”

대답 대신 채하의 손에서 핸드폰이 툭,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거기에선 여보세요, 여보세요 하는 외침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것을 주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채하의 몸이 격하게 휘청였다.


“사, 상무님! 괜찮으십니까? 상무님!”

아득하게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희미하게 은방울꽃 향기가 났다.

민설원,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났던 그 아득한 향기가.

*

3년 전, 채하는 지인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이런 행사를 일일이 다니는 것은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지만, 사업상 주요 파트너라는 압박에 인사차 들른 것이었다.

끝까지 자리를 지키라 신신당부를 받았으나 역시나 결혼식은 지루하고 또 지루했다.

졸부들처럼 재력을 뽐내고, 공작새처럼 외모를 뽐내고.

그들은 모두 무언가를 뽐내지 못해 안달이 난 존재들 같았다.

예식에 전혀 흥미가 없던 채하는 시간을 때울 겸 주변을 어슬렁대기로 했다.

보아하니 주례만 30분은 이어질 듯한 데다, 그런 형식적인 축복을 들어줄 인내심 따윈 그에게 없었다.

화려한 웨딩홀에서 빠져나와 조금 걸으니 금세 주변이 한가해졌다.

허영 가득한 인파로부터 벗어나자 이제야 숨이 좀 트였다.

그때였다.

기껏 조용한 곳을 찾았나 싶었더니, 바로 근처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소리뿐만이 아니라 분주히 오가고 있는 여자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새 다른 야외 홀 근처까지 와버린 모양이었다.

상자 가득 꽃들을 옮기고 있는 걸 보니 웨딩홀을 장식하러 온 사람들인 듯했다.

원래 있던 식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인파보다는 나을 것 같아, 채하는 그냥 이곳에 머물기를 택했다.

눈에 띄지 않을 곳에 기대어 선 채 그는 무심한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웨딩홀의 규모가 워낙 커서인지 준비해 온 꽃의 양이 어마어마했다.

한데 곧 무언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분명히 네 사람이 함께 왔는데 꽃을 옮기는 것은 오직 한 여자뿐이었다.

혼자서 꽃만이 아니라 물통까지 나르고 있어 상당히 힘에 부쳐 보였다.

나머지 셋은 뒤쪽의 그늘에서 노닥거리며 그 모습을 유유히 구경하고 있었다.

채하가 서 있는 근처인지라 그들의 목소리는 그의 귀에까지 닿았다.

세 사람은 꽃을 옮기는 여자에게 일부러 들으란 듯 큰 목소리를 냈다.


“민영 언니, 쟤가 혹시 오너한테 일러바치면 어쩌죠?”

“일러바치긴 뭘 일러바쳐? 말단이 잡일을 하는 게 당연하지.”

“그렇긴 한데…… 괜히 저희까지 한 소리 들으면 어떡해요?”

“어휴. 넌 소심하게 뭐 그런 걸 걱정해? 언니가 어련히 생각이 다 있으려고.”

“난 그저 선배로서 가르침을 주는 것뿐이야. 만약 오너 귀에도 들어간다면 정말 그렇고 그런 관계라는 소문에 확신만 더하는 거지. 안 그래?”

셋 중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여자가 심술보 그득한 얼굴로 꽃을 나르는 여자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그렇고 그런 관계’라는 말이 들리지도 않는 듯 그녀는 묵묵히 꽃만 옮기고 있었다.

그러자 그들이 목소리의 크기와 함께 발언의 강도를 더욱 높였다.


“학벌도, 경력도, 쥐뿔도 없는 게 어디서 툭 튀어나왔나 했어. 오너한테 아양이라도 떨었나 본데, 이 바닥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손수 가르쳐줘야지.”

“어머. 더럽기도 해라. 그런 수작을 부리고 싶나 몰라.”

“그러게요. 능력이 안 되면 분수에 맞게 살 것이지 말이에요.”

참으로 알기 쉬운 대화라고 채하는 생각했다.

자기들이 하고 있는 게 질투인지도 모르는 추하디추한 시기심.

당장 어머니 주변만 봐도 저런 중상모략은 모래사장의 모래만큼이나 넘치는 것이었다.

채하는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여자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희디흰 피부에 가녀린 체구. 청초하면서도 다부진 인상이 묘하게 이질적이었다.

꼭 진흙 속에 홀로 피어난 꽃 같은.

하지만 그로서는 그들과 아무런 관련도 없었고, 관여할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채하는 손목시계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기대보다 빠르게 끝난 휴식이 아쉬웠으나 이쯤에서 돌아가기로 했다.

남의 일에는 신경 끄고, 제게 주어진 용무나 얼른 끝내고 갈 생각이었다.

막 모퉁이를 돌아 빠져나가려던 찰나였다.

난데없이 무언가가 가슴팍에 퍽 소리를 내며 부딪쳐 왔다.

동시에 은은한 바람에 실린 생소한 꽃향기가 코끝을 찔렀다.


“……?”

무슨 상황인지도 모른 채, 채하의 시선이 허공으로 흩어지는 흰 꽃송이들에 붙박였다.

그 장면이 꼭 봄에 내리는 눈 같기도 했다.

꽃에 무지한 채하도 잘 알고 있는 꽃이었다.

조금 전에 지인의 식장에서 봤던 신부의 손에도 그 꽃이 들려 있었으니까.


“아…….”

바로 코앞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채하가 시선을 내렸다.

조금 전까지 꽃을 나르던 여자가 바닥으로 날아가 버린 상자를 망연자실하게 보고 있었다.

언제 이쪽으로 와 있던 건지는 몰라도, 저와 충돌하는 바람에 상자를 엎은 모양이었다.

졸지에 채하의 손에도 희고 청초한 은방울꽃 한 송이가 떨어졌다.

순간 우습게도 꼭 제가 부케를 받은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쳤다.

어쨌거나 부딪쳤으니 곤란하게 되었다 싶어 채하가 무어라 말하려는 찰나였다.

당연히 꽃부터 주울 줄 알았던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 보았다.

맑고 커다란, 실로 호소력 짙은 눈동자였다.

곧은 시선으로 그녀가 채하를 보며 정중하게 말을 건넸다.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순간 채하는 저도 모르게 손 위로 떨어진 그 작은 은방울꽃을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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