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제3부 96화
너무 뜬금없는 소리에 얼이 빠졌다.
갑자기 불러서 이게 무슨 폭탄 발언인가.
막장 전개도 아니고.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왜들 놀라.”
이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이들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박혁진이 넋 나간 표정으로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거냐?”
“어.”
이준이 박혁진을 순수한 표정으로 보았다.
“네 친여동생이라니까 놀라지!”
“그러니까 그게 왜?”
“현무 각주님의 손녀인 줄만 알았지, 네 여동생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고.”
“지안이 나랑 닮았지 않아? 너희들은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이준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전혀 몰랐다.
사신가 출신이라 잘해 준다고 생각했다.
설마 여동생일 줄이야.
황당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지안을 뚫어지게 보고 있던 허수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테구르 님의 태도가 심상치 않더니 다 이유가 있었어.”
허수는 이들 중에서 테구르를 가장 오래 봤다.
이야기를 가장 많이 나누기도 했다.
때문에 테구르가 어떤 성격을 가진 몬스터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본인한테 이득이 안 되는 건 절대 하지 않는 몬스터.
특히 처세술에선 절대종급 몬스터에 올라 있었다.
그런 테구르가 이지안을 이준 대하듯 행동했다.
처음에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 또한 이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액션을 취하고 있다고 여겼다.
한데 아니었던 것이다.
테구르는 이지안이 주인의 여동생인 걸 알았던 것.
그래서 최선을 다해 모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수야. 우리 지안이한테 뭐 잘못한 거 없지?”
“아마도 없을 겁니다.”
“우리가 서운하게 한 일도 없겠지?”
“음….”
“음이 아니야. 앞으로 우리 인생이 달린 일이란 말이다.”
“용석이, 넌 왜 말이 없…어?”
허수가 고개를 돌려 조용석을 보았다.
한데 조용석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
“저 녀석 상당히 충격받은 것 같지?”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지안이한테 찝쩍거리다 이준 형님께 깨지고 또다시 귀찮게 굴다가 혁진 형님한테 까이지 않았습니까.”
“넘보지 말아야 할 걸 건드렸으니 네 심정이 오죽하겠냐.”
진경수가 조용석의 어깨를 토닥였다.
허수 또한 위로를 해줬다.
“잘 가라. 다음 생에 보자.”
“내가 네 대신 잘살게.”
두 사람의 위로에 조용석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 이제 어떻게 합니까?”
조용석이 간절한 눈빛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와 거리를 조금씩 벌렸다.
“사요나라.”
“빠이짜이찌엔.”
조용석을 바로 손절하는 두 사람이었다.
한편 박정연은 이지안에게 슬며시 다가갔다.
그리고는 이지안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아가씨. 언니한테 섭섭한 거 없죠?”
박정연도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녀의 행동에 이지안이 당황해했다.
“아, 아가씨 아니에요. 그리고 존댓말 하시면 제가 불편…해요.”
“예쁜 얼굴처럼 자상도 하셔라.”
박정연은 반짝이는 눈을 한 채 이지안의 얼굴 쪽으로 바짝 다가갔다.
“내 마음 알죠? 앞으로 잘 부탁해요.”
“네….”
박정연은 이지안의 은발을 만지며 예뻐했다.
이지안은 어색하긴 했지만 가만히 있었다.
예쁨 받는 느낌이 썩 나쁘지 않았으니까.
한지유도 조용히 다가와 이지안의 옆에 섰다.
“지유 언니?”
그녀는 말없이 박정연이 하는 행동을 따라 했다.
한지유까지 이지안의 곁으로 가자.
정예나, 정예은.
류가을, 박은비, 서혜지까지.
모두 이지안에게 몰려가서 한마디씩 했다.
“지금 보니까 선생님이랑 똑같이 생겼다.”
“머리가 은발이라 못 알아봤어. 검정색이었다면 바로 알아차렸을 거야.”
“얼굴하며 재능하며 선생님이랑 똑같네.”
이준의 폭탄 발언을 어느새 수긍한 아이들이었다.
오직 한 명.
박혁진만이 얼을 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정신을 차렸다.
비장한 얼굴을 한 채 이준의 앞에 섰다.
“왜?”
“형님!”
“너 미쳤냐.”
“앞으로 이준 형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미래의 매부가 인사 올리겠습니다.”
“하지 마라.”
“형니이이님!”
“저리 꺼리라고.”
박혁진이 이준을 안으려고 하자.
이준이 기겁하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 * *
이준의 폭탄 발언에 진이 빠진 건 본인이었다.
하루 종일 박혁진에게 시달렸다.
이지안을 자기한테 달라나 뭐라나.
아주 거머리가 따로 없었다.
오랜만에 떠들썩한 게이트.
금역의 몬스터까지 합세해서 저녁을 즐겼다.
“오랜만에 아무 생각 없이 웃는 것 같네. 우리 주인님.”
파르가가 이준의 어깨에 앉아서 말했다.
[이제는 마음의 평화를 얻은 것 같군.]
머리 위에는 흑염마조가 앉아 있었다.
현무는 황금이의 모습으로.
백호와 청룡은 그 모습 그대로 몸집만 작게 한 채.
이준의 곁에 있었다.
“궁금한 걸 확인했으니까.”
“그래서 결론은 뭐야?”
“내 마음을 못 잡은 것뿐. 난 절대 바람둥이가 아니란 거지.”
심장이 고장난 이유를 알려고 아이들과 포옹했다.
그 결과.
박정연과 한지유에게만 두근거린다는 걸 느꼈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라 생각했다.
무극자 사부 말대로 바람둥이가 됐으면 어쩌나 고민했다.
한데 아니었던 것.
그저 박정연과 한지유에게만 떨린 것뿐이었다.
[난 지유가 좋다. 도도한 면이 매력있어.]
[어쩐 일로 나와 생각이 같지?]
흑염마조와 현무의 의견이 일치했다.
항상 티격태격 싸우던 두 신수였다.
성격과 생각이 정반대인 흑염마조와 현무가 같은 생각을 했다니….
[그럼 난 정연이로 하지. 애가 싹싹하고 밝아. 어두운 구석이 있는 이준과는 천생연분이다.]
박정연의 편에 선 청룡.
이제 남은 신수는 백호 하나뿐이었다.
[난 기권. 둘 다 좋아.]
백호의 포기에 신수들이 맥 빠진 표정을 지었다.
대신 파르가가 말했다.
“정연이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
2:2 동점인 상황이었다.
흑염마조는 게이트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큰 주인은 어느 쪽이지?]
잠시 후.
무극자의 목소리와 함께 영혼이 나타났다.
[흠… 선택하기가 쉽지 않아.]
[며느리로 삼고 싶은 아이로 골라 봐.]
[오래 본 정이 있으니 지유가 나으려나?]
[가가. 언제는 제 선택에 따르신다면서요.]
주경아의 음성도 들려왔다.
[당연히 경아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내 마음속의 원픽은 아직까지 지유가 좀 앞서서 말이야.]
무극자는 주경아의 눈치를 보면서도 할 말은 끝까지 했다.
[큰 주인도 나와 생각이 같군.]
3:2였다.
이제 남은 건 주경아의 선택뿐이었다.
가장 권력이 큰 사람.
그녀가 선택하면 무극자는 알아서 따라와야 했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쏟아졌다.
[전…….]
과연 누구일까.
사신수는 각자 응원하는 아이의 이름이 호명됐으면 했다.
[정연이가 준이의 짝이었으면 좋겠어요. 가.가.]
그러면서 무극자를 뚫어지게 보았다.
무극자는 그녀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그래도 느껴지는 뜨거운 시선.
무극자는 지조를 지키기 위해 반항을 해 보았다.
[경아. 우리의 마음이 무슨 소용이 있어. 준이가 좋아하는 여자면 된 거야.]
쩔쩔매는 무극자의 모습에 이준의 장난기가 올라왔다.
“전 사부님이 정해 준 사람과 사귀고 싶어요.”
[그렇다는데요, 가가?]
무극자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지조를 굽힐 것이냐.
아니면 이대로 불도저처럼 밀고 나갈 것이냐.
난관에 봉착했다.
[가가?]
그녀의 부름에도 무극자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잘못 말했다가는 골로 갈 수 있는 상황.
신중하게 선택해야 했다.
일생일대의 위기였다.
[흠.]
무극자는 몸을 돌렸다.
천천히 숨을 고르며 생각에 잠긴 모습.
주경아와 거리가 벌어졌다는 생각이 든 순간!
인계에 있던 영혼이 사라졌다.
모두 벙찐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무극자가 도망을 친 것이다.
삼십육계 줄행랑.
파천혈신이자, 고금제일인이 며느리를 고르지 못하고 빤스런을 했다.
너무도 뜻밖인 행동에 모두가 말을 잃고 말았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주경아가 무극자를 쫓아갔다.
[가가! 잡히면 모가지를 비틀어 버리고 말 거예요!]
이준이 피식 웃었다.
‘즐겁네.’
행복했다.
4대 성지의 금역만큼은 자신의 세상.
이 안에서 소중한 사람들이 웃고 즐거워하니.
자신 또한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었다.
피로 얼룩진 과거와는 다른 현재.
천외천을 물리쳤고 마계를 물리쳤다.
용신족의 거대한 야망을 막았을 뿐더러.
천계의 욕심마저도 꺾었다.
게다가 옛 친구인 파르가도 돌아왔다.
무극자 사부 또한 신왕과의 결투에서 살아남았다.
결과는 가르쳐 주지 않아서 알 수 없으나.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는 사부의 모습을 보면 어렴풋하게나마 승패를 알 수 있었다.
사부의 승리.
그것 말고는 생각나지 않았다.
‘내가 항상 꿈꾸던 장면이야.’
소중한 사람 중 누구 하나도 슬퍼하지 않는 세상.
회귀 후 강해지기 위해 그토록 노력한 이유이기도 했다.
‘이제는 좀 쉬어도 되겠지?’
게이트도 닫혔겠다.
카오스 집단도 곧 정리되겠다.
남은 건 무림맹이 알아서 처리하겠지.
열심히 달려온 만큼 이제는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이준의 마음을 아는지.
파르가가 말했다.
“고생했어. 주인님.”
[수고했다, 작은 주인.]
[너니까 가능했던 일이다.]
[앞으로도 잘 부탁하지.]
[계속 지켜보겠다.]
신수들도 이준의 노고에 감사를 표했다.
인계는 사신수의 영역.
세계를 안정시킨 이준은 사신수에게 고마운 존재였다.
사신수의 인사에 이준이 해맑게 웃었다.
“별 말씀을.”
사신수와 같이 있는 이준을 박정연이 불렀다.
“준아. 거기서 뭐 해. 여기 와서 놀자.”
오아시스 안.
에메랄드빛 물 안에서 박정연이 이준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혼자 고독한 척하지 말고 같이 어울리지?”
한지유도 이준을 불렀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특별 1반 출신 전원이 이준을 불렀다.
“선생님. 빨리 오십시오. 한 명이 부족해서 숫자가 안 맞습니다.”
“제가 형님의 호위를 자처할 테니 무서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빠 같이 물놀이 하자. 우리 이러는 거 처음이잖아.”
이지안까지 합세해서 이준을 불렀다.
하지만 이준은 물놀이를 할 생각이 없었다.
“너희들끼리 해. 난 지금이 좋아.”
이준은 옷이 젖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옷이 젖으면 찜찜했으니까.
이준의 거절에 박정연과 박혁진이 눈을 마주쳤다.
한지유와도 눈빛을 나눈 그들이 음흉하게 웃었다.
모두 같은 생각.
그들은 오아시스에서 나와 이준에게 달려갔다.
“안 오면 강제로라도 입수시키고 말 거야.”
“무공으로는 이기지 못하니 물놀이라도 이겨야겠어.”
“어어?”
이준의 팔과 다리가 아이들에게 붙잡혔다.
아이들이 달려오기 전.
사신수들이 이준의 몸을 붙잡고 있었던 것.
그는 꼼짝없이 오아시스에 던져지고 말았다.
“우왁!”
오아시스에 보글보글 물방울이 올라오더니 이준의 몸이 위로 확 올라왔다.
“다 죽었어.”
“도망쳐!”
“잡히면 죽을 거야.”
“저, 전 아닙니다. 선생님.”
이준의 흥분에 아이들이 도망쳤다.
* * *
신선경에선 설극과 주경아가 인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경아의 얼굴에 미소가 지워지지 않네.”
“좋아서요.”
주경아는 이준의 행복한 모습을 보며 웃고 있었다.
전생에 태어나지 못했던 아들의 모습.
얼마나 보고 싶었던가.
“신계도 안정을 찾았으니 이제는 매일 행복한 것만 보게 될 거야.”
“고마워요, 가가.”
“경아가 행복하면 난 그걸로 만족해.”
그녀를 위해 희생을 해 왔던 설극이었다.
설극의 삶은 오직 주경아가 있기에 존재했다.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신선제에 오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가가도 행복하셔야죠.”
“그러면 경아가 쭉 옆에 있어 주면 되겠네. 내 행복은 바로 경아니까.”
주경아의 미소가 진해졌다.
한평생 자신만을 위해 살아온 설극.
이제는 그도 이준처럼 행복해질 차례였다.
“알겠어요. 이제는 제가 가가를 지켜 줄게요.”
설극의 눈이 커졌다.
주경아가 드디어 뜻을 똑바로 밝혔다.
늘 신선계에, 제 곁에 있었지만 애매모호한 대답만 늘어놨었다.
가가란 호칭으로 바뀐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후의 선을 그어 놓은 느낌.
한데 오늘 그 선이 무너진 것이다.
“경아 고마워.”
설극이 주경아를 와락 안았다.
주경아도 싫지 않은지 설극을 안으며 그의 등을 토닥였다.
“제가 더 고마워요.”
그녀의 시선은 또 한 번 신선경으로 향했다.
전생의 아들이 물놀이하는 모습이 눈에 또렷히 박혔다.
‘준아. 고맙구나. 너로 인해 이 어미도 모든 마음이 완전히 풀렸어.’
이준이 아니었다면 평생을 원망 속에서 살았으리라.
아들의 행복한 모습에 주경아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이 행복과 평화가 영원했으면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