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제3부 95화
박춘식의 눈 옆 근육이 꿈틀거렸다.
먼저 걸어온 도발.
승부를 피하는 건 남자가 아니었다.
“영섭아.”
“네 아버지.”
“정연이한테 이르거라. 통금과 외박을 풀어준다고 말이야. 이참에 사신가에 눌러 앉으라고 전해.”
“아, 아버지.”
검왕 박영섭이 당황해했다.
통금과 외박을 해제하다니.
딸을 아예 사신가로 넘길 생각인가보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된 박영섭은 아버지인 박춘식을 말렸다.
“정연이의 나이가 이제 스물넷입니다. 시집가기에는 너무 어리지 않습니까?”
“어허! 내 때는 스무 살도 늦은 나이였다. 그리고 맹주와의 혼사인데 빨리 가면 어떠하냐.”
“정연이를 아끼시면서 혼인을 너무 쉽게 시키시는 게 아닌지….”
“다 정연이와 철혈검가를 위해서다. 잔말 말고 정연이에게 지원을 아끼지 말거라.”
“네… 아버지.”
박영섭은 박춘식을 말리지 못했다.
눈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혈마 류한길의 도발 때문.
정심호는 옆에서 박수치며 좋아하고 있었다.
강건너 불구경.
싸움 구경이 제일 재미있었다.
“끌끌. 좋구나. 이기는 편이 우리 편이다.”
진병철이 슬쩍 다가와 입을 열었다.
“괴개 어르신. 너무 일을 크게 벌리십니다.”
“내 손녀는 참전 못해서 배 아파 그런다.”
“큼. 경수도 괜찮은 놈입니다. 맹주와 비교하면 많은 손색이 있겠지만 예나에게만큼은 누구보다 잘할 겁니다.”
“흥! 네놈을 닮지 않아서 받아준 것이다. 너와는 달리 경수는 강단도 있어서 그거 하나는 마음에 든다.”
“경수가 허수와도 의형제로 지내니 너무 배 아파 하지 마십시오.”
만독암가는 무려 진경수와 허수를 손녀사위로 점찍어뒀다.
이준에게 가르침을 받은 두 사람.
무엇보다 현재 그들의 등급은 SS급에 있었다.
발전할 날이 무궁무진하게 많았다.
사신가와 철혈검가를 제외하고서는 만독암가가 부동의 3순위였다.
진병철의 말에 괴개가 심술을 거뒀다.
하지만 이미 기름은 부어진 상황.
혈마가 미쳐 날뛰고 있었다.
“우리 마련은 굉장히 프리하오. 가을이는 이미 외박에 제한이 없어 사신가에 마음대로 드나들고 있지 뭐요. 사흘 전에는 수련한다고 사신가에서 자고 아침에 왔지 뭐요.”
박춘식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상대가 먼저 선수 친 것.
차례놓은 밥상에 먼저 가서 앉아 밥을 먹은 꼴이었다.
박춘식과 류한길이 서로를 향해 노려봤다.
“마지막에 이기는 게 승자라는 걸 명심하쇼.”
“헛된 일에 힘 낭비하지 말게나.”
활활 타오르는 눈빛.
누구 하나 물러나지 않았다.
* * *
4대 성지의 금역.
박정연은 강의가 끝나자마자 이준을 찾아왔다.
사신가에 없으면 금역에 있었다.
지잉-
게이트 중앙.
오아시스 옆에 게이트가 열리더니 박정연이 나왔다.
“여기 있었네.”
“으, 응.”
“감기 들었어? 얼굴이 빨게.”
“아, 아니야.”
이준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박정연만 보면 홍당무가 된다.
사신기로 호흡하면서 진정하려 노력했으나.
마음이 안정되는 것과 두근거림은 별개였다.
“어디 이마 좀 대봐.”
박정연이 무방비 상태의 이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가 훅 들어왔다.
막을 시간도 없이 이마를 허용하고 말았다.
초속의 시간도 반응하는 그였다.
한데 그녀의 손을 못 막은 것.
아니, 몸이 알아서 늦게 움직였다.
“열은 없는 것 같네.”
“가, 가까워.”
이준이 말을 더듬었다.
박정연은 손으로 이준의 이마 온도를 확인한 후.
자기 이마를 가져다 댔다.
2차 확인이었다.
[경아. 진도가 팍팍 나가는 것 같지?]
[애가 참 당돌하고 적극적이에요.]
[준이 같은 아이한테는 딱이야. 연상이 이끌어줘야 해.]
[저도 가가 말에 동의해요. 준이는 너무 여자 마음을 몰라요. 한편으로는 준이를 좋아하는 애들이 불쌍하단 생각까지 든다니까요.]
이준의 옆에 영혼으로 있던 무극자와 주경아가 속닥였다.
‘두 분. 옆에서 말하지 말아주실래요? 다 들리거든요.”
[큼큼. 들렸느냐. 작게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다음번에는 참고하마.]
[호호. 미안해. 하던 거 어서 하렴.]
‘하던 거라니요! 전 아무짓도 안 했어요.’
이준의 얼굴이 더욱 달아올랐다.
“아무 이상 없는데… 다른 병에 걸린 걸까?”
박정연의 얼굴이 떨어졌다.
이준은 그제야 숨을 크게 내쉬었다.
“호흡이 흐트러졌어. 정말 이상해. 테구르!”
그녀가 테구르를 호출했다.
주인님의 부인 후보 중 1순위에 해당하는 박정연이 부르자.
테구르가 하던 일도 멈추고 잽싸게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요. 큰 사모님.”
녀석은 박정연을 이미 사모님이라 부르고 있었다.
“준이가 이상해. 로티틸을 불러와서 힐링 마법을 써야겠어.”
“헉! 주인님 어디 아프십니까요? 이 테구르에게 진귀한 약이 가득 있습니다요. 어떤 게 필요하십니까요?”
테구르가 호들갑을 떨었다.
아공간 주머니에서 각양각색의 포션을 꺼냈다.
죄다 최상급 회복약이었다.
그 중에서도 아주 귀한 영약이 하나 보였다.
플라스크에 담긴 황금색 액체.
반짝이기가지 했다.
테구르는 이준이 안보이게 황금색 플라스크를 슬쩍 아공간 주머니에 넣었다.
“야. 테구르. 치사하게 제일 좋은 영약을 감춰?”
“헤헤. 이건 해독 성분이 없어서 말입니다요.”
“저걸 오른팔이라고.”
“헤헤. 로티틸 님이 와서 주인님의 상태를 볼 겁니다요.”
이준은 테구르 덕분에 긴장이 풀렸다.
녀석이 없었다면 계속 고장난 상태로 있었을 것이다.
“야. 가지마.”
이준이 떠나는 테구르를 불렀지만 녀석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가장 아끼는 영약을 주인이 뺏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줄행랑을 쳤다.
박정연은 여전히 이준의 안색을 살폈다.
“음….”
“아무 이상 없다니까.”
그녀가 빤히 보자 다시 열이 올라오는 듯했다.
그러던 그때였다.
지잉-
금역의 문이 열리고 한지유가 모습을 보였다.
“지유다! 후우우.”
이준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박정연과 둘만 있었다면 마음을 들킬지도 모른다 여겼다.
한지유가 오면 한결 편해지지 않을까.
그녀가 당당히 걸어왔다.
왼손에는 드워프가 강화시켜준 복마참백연이 들려 있었다.
지유야. 빨리….”
이준은 말을 하다가 말았다.
두근.
한지유를 보고 가슴이 뛰었다.
‘이게 미쳤나? 왜 제어가 안되는 거야.”
박정연에게서 느꼈던 두근거림을 한지유에게도 느꼈다.
심자이 통제가 되지 않았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당황스러웠다.
한지유와 박정연을 보고 두근거린 적이 없었다.
한데 왜!
이제와서 이러는 걸까.
‘심장이 고장난 게 분명해. 아니면 병에 걸린 거야.’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한지유가 예뻐 보였다.
도도한 고양이의 느낌.
반전으로 귀여움까지 묻어나왔다.
예전에도 예쁘다는 생각은 했지만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쟤는 왜 또 얼굴에서 광이 나는 거냐.’
한지유의 얼굴은 잡티 하나가 없었다.
기본 베이스 화장만 했지만 남들을 씹어먹는 외모를 가졌다.
거기다가 강하기까지.
한지유와 사귀는 건 모든 각성자의 로망이었다.
“뭘 봐.”
한지유의 차가운 목소리에 이준이 정신을 퍼뜩 차렸다.
“너, 너 안 봤어.”
“그런데 말을 왜 더듬어?”
“내, 내가 언제!”
“지금 그러잖아.”
“아니거든!”
이준이 눈을 질끈 감았다.
사신기를 운용하면서 불경을 외웠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
[별 짓을 다하는구나. 네가 불경을 외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가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큰일났어요.]
[무슨 큰 일?]
[준이가…]
[준이가 왜?]
[풍객인 것 같아요.]
[푸, 풍객!?]
[지유한테도 심장이 떨리고 있잖아요.]
풍객이란 바람둥이를 말했다.
[그 생각은 못했어. 네 이노오오옴!]
무극자가 벼락같은 호통을 쳤다.
불경을 외우고 이준이 황급히 귀를 막았다.
‘왜 그러, 윽… 세요.’
[못된 것만 배워가지고 이젠 하다하다 바람둥이란 말이렸다?]
‘저도 이게 뭔지 모르겠다고요.’
박정연과 한지유를 봐도 고요했던 심장이었다.
박정연은 심지어 매일 달려와서 안는 스킨십을 했다.
그때는 심장이 나대지 않았다.
지금은 조그만 스킨십에도 심장이 미쳐 날뛰었다.
‘그리고! 언제는 강하면 여자가 꼬이기 마련이라고 하셨잖아요. 이제 와서 이러기에요?’
[내가 그랬느냐?]
‘사부님도 한때는 동정호에서 풍류를 한껏 즐겼다고 하셨잖아요. 여자한테 인기가 많아서 피곤했다고 하셨으면서.’
[그럴리가 없을 터인데…]
무극자가 식은땀을 흘렸다.
고개를 옆으로 천천히 돌려 주경아를 보았다.
[가가.]
주경아의 눈에서 레이저가 쏘아지고 있었다.
[그, 그냥 농담이었어. 난 경아밖에 없다고. 그리고 준이에게 말한 건 경아를 만나기 전이야.]
[애한테 아주 좋은 걸 가르치셨어요.]
[하. 하하.]
[잠깐 저 좀 보실래요?]
[그냥 여기서 말하면 안 될까?]
[따. 라. 오. 세. 요.]
주경아의 말에 무극자가 하는 수 없이 움직였다.
이준의 시야에서 사라진 무극자의 영혼.
주경아 또한 무극자를 따라 사라졌다.
‘살았다.’
이준은 살아남았지만 대신 무극자가 무사하지 못했다.
* * *
“여긴 어쩐 일이야?”
“이준한테 볼 일 있어서 왔어요.”
“나한테 말하지. 대신 전해줄 건데.”
“동생이 언니한테 어떻게 부탁을 하겠어요.”
박정연과 한지유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보이지 않은 신경전.
파르가는 두 여자를 보고 이준에게 말했다.
[주인님은 누구 편이야?]
[난 그 누구 편도 아니야.]
[아니, 그게 아니고 누가 더 좋냐 이 말이지.]
[음….]
이준은 박정연과 한지유를 번갈아 쳐다봤다.
각자의 매력이 있었다.
박정연은 화끈한 성격을 지녔다.
반대로 한지유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공통된 점이 있다면 내면은 여리다는 것.
외모 또한 각자의 강점을 가지고 있었다.
[모르겠는데.]
[그러니까 어르신한테 혼난 거야. 주인님이지만 참 답도 없어.]
파르가의 팩폭을 맞은 이준이었다.
[너 누구야! 우리 귀여운 파랑이 데려와. 검둥이는 안 귀여워.]
[주인을 다시 선택해야할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겠어.]
파르가에게까지 핀잔을 들은 이준이 현재의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내가 정말로 바람둥이일까? 다른 여자한테도 가슴이 두근거리려나?’
확인해봐야겠다.
이준은 특별 1반 출신들을 모두 소집했다.
그의 부름에 게이트로 곧장 달려온 아이들이었다.
“선생님 무슨 일로 저희를 부르셨습니까?”
진경수는 여전히 이준을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확인하게 있어서. 지안아 잠깐만 실례할게.”
이준은 이지안을 와락 안았다.
“또 무슨 일 있던거예요 가주 오빠?”
이지안을 이준의 품에 안겨 가만히 있었다.
아니, 오히려 꽉 안아줬다.
폐인이 됐던 오빠였던지라 안쓰러웠던 것이다.
“자, 잠깐!”
박혁진이 둘 사이를 떼어놓으려 했다.
“너희 이러는 거 아니야. 이준 죽을래? 아무리 친구여도 선은 지켜야지. 지안이는 아니잖아.”
“야 끼어들지마. 나 확인할게 있어.”
“이 새끼야. 네가 어떻게 날 배신해.”
박혁진은 억장이 무너지는 표정을 보였다.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를 친구인 이준이 와락 안고 있는 게 아닌가.
그것도 애틋해 보이기까지 했다.
“후우. 다행이다. 지안이한테는 안 뛰네.”
이준이 이지안을 품에서 떨어트렸다.
“네? 뭐가요?”
“아무것도 아니야.”
이준은 이지안의 말랑말랑한 볼을 살짝 꼬집었다.
“헤.”
그의 장난에 이지안이 베시시 웃었다.
귀여움을 받고 좋아하는 모습.
박혁진은 어금니를 꽉 깨물어야 했다.
분한 표정을 드러낸 박혁진.
이준은 녀석의 얼굴을 보며 폭탄발언을 했다.
“여동생 좀 안았다고 아주 이를 가네. 이러다 한 대 치겠다.”
“…피는 안 섞였잖아.”
“너희한테 말 안한게 있는데 지안이 내 친여동생이야. 피가 온전히 섞여 있는 여동생.”
그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 하는 눈치였다.
“여동생으로 생각하는 애가 아니고 나랑 피가 섞인 친동생이라니까?”
“무어어어!?”
“세상에!”
“미친!”
아이들이 뒤늦게야 화들짝 놀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