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제3부 94화
낙성각 안.
이준의 방은 난장판이었다.
탁자가 부러지고 유리가 깨진 상태였다.
그곳에서 이준은 널브러져 있었다.
“주군….”
사형준은 흐트러진 이준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사신곡을 전멸시키고 돌아왔더니.
이준은 폐인이 되어 있었다.
엉망이 된 이준의 모습을 처음봤다.
왜 이러냐고 묻고 싶었으나 묻지 못했다.
가벼운 언행을 지녔던 김봉팔조차 꿀먹은 벙어리였다.
[단주. 어떻게 좀 해보십시오.]
[말을… 못하겠다.]
[단주가 겁을 먹으면 어찌합니까.]
이준의 곁으로 접근한 것만으로도 큰 결심을 한 것이다.
회색의 기운.
사신기가 공기 중에 요동쳤다.
이준의 기분을 대변하는 사신기.
말을 걸려고 하면 사신기가 목을 옥죄여 왔다.
위기 감지 능력에 탁월한 김봉팔이라 그런지.
낙성각 안으로는 한 발자국도 들어가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에요? 준이가 잘못 됐다니?”
“폐인이 됐다던데 거짓말이죠?”
박정연과 박혁진이 찾아왔다.
두 사람의 말에 김봉팔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입니다. 안으로 들어가 보십시오.”
박정연과 박혁진이 낙성각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사형준은 두 사람을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집안 꼬라지가 무슨….”
박혁진은 말을 하다말고 입을 다물었다.
사형준이 서 있던 자리에서 한 발자국 더 움직이자.
칼날 위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서늘한 등골.
목 뒤에 식은땀이 흘렀다.
방문이 열린 사이로 이준이 보였다.
“준아.”
박혁진은 선을 넘지 못했지만.
박정연은 과감없이 넘고 말았다.
서걱!
사신기가 가차없이 박정연을 갈랐다.
그녀의 볼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준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야. 나한테 말해봐.”
사신기는 다가오지 말라고 경고했다.
서걱서걱!
그녀의 어깨와 가슴이 칼에 베인 듯 잘려나갔다.
하얀 티를 주로 입는 그녀였는데 옷이 피로 물들었다.
그녀가 누워 있는 이준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왜 이러고 있어.”
이준의 눈은 공허했다.
그 안에는 분노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물도 안 먹었는지.
목소리가 쩍 갈라졌다.
“가. 지금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
“힘든 게 있으면 말해봐. 내가 들어줄게.”
박정연은 다정한 목소리로 이준을 설득했다.
하지만 이준은 입을 다물고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하고 싶을 때 말해. 기다려줄게.”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에 박혁진과 사형준이 밖으로 나갔다.
“물이라도 마셔.”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
그나마 박정연의 말에는 대답해주고 있는 이준이었다.
그녀는 벽운을 바닥에 두고는 이준의 머리를 들어올렸다.
“무슨 짓이야.”
“맨 바닥은 불편해.”
이준의 머리가 그녀의 무릎에 올려졌다.
그녀는 이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간혹 이준이 했던 행동을 이제는 그녀가 했다.
“그동안 힘들었어?”
“…….”
이준은 또 입을 다물었다.
박정연은 그가 말하든 말든 대화를 계속 이어갔다.
“아니면 사부님이 보고 싶어서 이러나.”
이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순간 박정연도 당황했다.
사부란 말에 이준이 눈물을 보인 것이다.
당황한 기색을 집어넣고 태연한 척했다.
“나도 사부님과 사모님 보고 싶다. 정말 멋진 분이시던데.”
그녀는 이준의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을 이어갔다.
“준이는 참 복 받았어. 널 아끼는 분이 두 명이나 계시잖아. 네가 위험하다고 하늘에서 내려오시기까지 했잖아. 우리 할아버지보다 더 멋지셔.”
“이젠… 없어.”
“응?”
“망할 영감탱이가… 날 버리고 떠났어….”
드디어 이준이 입을 열었다.
그가 팔로 얼굴을 가렸다.
애써 울음을 참으려 했다.
“네가 오해하고 있는 게 분명해. 널 구하기 위해 신선계에서 인계로 강림까지 하셨잖아.”
“그래서… 더 싫어. 그냥 그때 죽게 놔두지.”
그러던 그때였다.
이준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내가 너를 그리 나약하게 키웠단 말이냐.]
무극자 사부의 음성이었다.
이준이 눈을 크게 떴다.
“사부… 님…?”
[사부라 부르지 말거라! 고얀놈 같으니라고.]
“정말… 사부님이시죠?”
이준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무극자의 목소리에 그동안 참았던 눈물이 터진 것이다.
“사부니이임….”
[이 사부가 그리 못 미더웠더냐…?]
이준의 울음에 무극자도 목이 메여왔다.
자신을 생각하는 게 신선계까지 느껴졌다.
마음 여린 제자였다.
자신이 신왕에게 죽었을까봐 불안해 했을 터.
그렇다고 이정도로 망가져 있을지 생각지도 못했다.
“흐어엉 아니요….”
[한데 그 꼴이 뭐란 말이냐.]
무극자는 계속 이준을 나무랐다.
자신이 없어지면 어찌 살려고 저러는 건지.
한숨이 나왔다.
[뚝 그치지 못하겠느냐!]
무극자가 호통을 쳤다.
그러자 오히려 이준이 반발하고 나섰다.
“왜 소리치세요, 흐어엉. 사부가 먼저 끅. 잘못했잖아요, 끅끅….”
이준은 속에 있던 말을 그대로 뱉었다.
할말은 하고 사는 이준.
무극자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큰소리치고 야단치면 더욱 반발하는 게 바로 제자였다.
무극자는 야단을 치다 말고 이준을 다독였다.
[알았다. 이 사부가 거짓말을 쳐서 화가 난 게냐. 사과할 테니 그만 뚝 그쳐라.]
이준의 나이는 이제 스물 셋.
아직 어린 나이였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커온 아이라 그런지.
무극자에게 무척이나 의지했다.
아버지 이상의 존재였다.
“히끅….”
이준이 울음을 그쳤다.
박정연이 옆에서 그의 등을 두들겨줬다.
그녀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
사부란 분이 이준의 곁에 영혼으로 붙어 있다는 것을.
“사부님이 돌아오신 거야?”
“…응.”
“거봐. 내가 뭐라고 그랬어. 널 버리고 떠나실 분이 아니라고 했잖아.”
무극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훌륭한 며느리 상이었다.
[어때요 가가. 제 눈이 정확하죠?]
[내 마음에는 지유도 아직까지 있지만 정연이도 애가 참 바르고 한결같아.]
[혼인해서 떡두꺼비같은 애 하나 낳았으면 해요.]
[옛날이었으면 이미 혼인했을 나이긴 하지.]
무극자와 주경아는 박정연을 매우 흡족해했다.
힘들 때 항상 옆에 있어주는 박정연.
한 살 연상이긴 하나 요즘 시대에는 흠이 아니었다.
오히려 연상연하 커플이면 여자가 능력자라 할 정도였으니까.
그 사이.
이준은 마음을 다 추스렸는지 안정을 되찾았다.
공허했던 눈도 정광이 가득하게 돌아왔다.
살기로 가득했던 낙성각의 공기가 한결 맑아졌다.
[못난 제자놈 같으니라.]
“사돈 남말 하시네.”
[어쭈. 말이 짧다 제자야.]
“흥.”
이준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돌렸다.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이었다.
설극은 화가 끓어 올랐다.
영혼을 끌어모아 일갈을 터트리려 했으나.
주경아로 인해 그러지 못했다.
[후우우. 이 사부가 오늘만은 참으마.]
“그러시든가요.”
이준의 꼬라지에 무극자가 물러났다.
[다시 한번 못난 모습 보이면 경을 칠 줄 알거라.]
그 말을 끝으로 무극자가 사라졌다.
주경아의 영혼이 이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돌아왔으니 심술은 적당히 부리렴.]
그녀도 다정한 사람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기분이 풀리지 않은 이준이었다.
“거짓말쟁이.”
마음은 한결 놓였다.
신왕과의 승패는 중요하지 않았다.
무사히 돌아왔다는 게 중요했다.
이준이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이내 축 늘어졌다.
전과는 다른 모습.
삶에 미련이 없는 게 아닌 안도감에 몸이 풀어진 것이다.
“배고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몇날 며칠 동안 물도 한모금 먹지 않았다.
그러니 배고플수밖에.
“가져올게!”
박정연이 벌떡 일어나서 낙성각을 나갔다.
이준은 그런 박정연의 뒷모습을 보았다.
항상 고마운 누나.
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났다.
그러던 그때였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뭐지? 설마 또’
소중한 사람들에게 변고가 생긴 게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이준이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검둥이 파르가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야.”
파르가 또한 얼굴이 반쪽이 된 상태.
말할 힘도 없었다.
주인이 밥을 안 먹는데 파르가가 먹겠는가.
주인과 마음을 공유하고 있는 녀석이라 똑같이 고생이 심했다.
“그럼 이건 뭐야?”
느낌이 이상했다.
심장이 너무도 빠르게 뛰었다.
그러면서도 간질간질거렸다.
점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설마.”
박정연의 뒷모습을 보고 뛴 심장이었다.
어색한 기분에 어찌할바를 몰랐다.
“예나 지금이나 여자에 대해서 아는 거라곤 하나도 없어.”
아이덴 루블리스일 때도 여자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한 이준이었다.
현생에는 많은 여자가 들러붙고 있지만.
연애 고자가 어디 가겠나.
마음이 가는 여자 뒷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리고 당황해하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모태 솔로.
연애 한번 못해본 대마법사가 이준이었다.
* * *
이준이 폐인에서 벗어났다.
그의 행동은 짧은 시간에 가주들의 귀에 들렸다.
이준은 무림맹의 맹주.
이제는 가주들에게도 주군이 되는 사람이었다.
일거수 일투족이 관심 대상.
용산 각사학 인근 무림맹이 새로 들어올 건설 현장에서는 이준의 이야기로 한창이었다.
“검제님. 축하드립니다. 사신가에선 정연이를 맹주의 짝으로 점찍었다지요?”
진씨가문의 가주인 진병철의 말이었다.
박춘식은 상당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정연이가 한 게 있나. 맹주의 옆에 있었을 뿐이라네. 허허.”
“사신가 사람들에게 듣기로는 그때 맹주의 옆에 함부로 다가가지도 못했다 합니다. 한데 정연이는 다치면서까지 다가갔다지 뭡니까.”
“사랑의 힘 아니겠나. 요즘 아이들은 우리 때와 달리 저돌적이야.”
“하하. 맞습니다. 사랑도 쟁취해야하는 겁니다.”
박춘식과 진병철이 화기애애하게 웃고 떠들었다.
곁에 있던 괴개 정심호는 진병철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진가주. 우리 같은 팀 아니었나? 춘식이 줄에 서는 건 생각지도 말아.”
정심호는 배가 무척 아팠다.
절친인 박춘식이 손녀로 인해 엄청난 이득을 보려는 게 아닌가.
이준과 박정연이 결혼이라도 하는 날에는 철혈검가에 날개가 달리는 것이다.
막을 방법은 하나.
경쟁하게 만드는 것밖에 없었다.
“신기학사. 너는 뭐 하는 거냐. 어여쁜 딸자식을 놔두고 손 놓고만 있을 거야?”
“지유가 워낙 차가워서 말이지요.”
“차가운 여자가 더욱 매력적인 법이야. 내가 보기에는 지유도 맹주를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으니 확실하게 밀어줘.”
한지웅이 부채를 들고 웃었다.
사실 그도 자존심이 상한 상태.
자신의 딸이 뭐가 부족해서 박정연에게 밀린 걸까.
이유를 분석해본 결과 답이 나왔다.
적극적이지 않은 것.
박정연은 시도때도 없이 이준을 찾아갔지만.
한지유는 바깥에서 맴돌았다.
이준의 시야에서 벗어났기에 마음을 얻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노력해보겠습니다.”
검제처럼 적극적으로 밀어줬다면 한지유도 이준의 마음을 얻지 않았을까.
‘원래는 지유와 맹주가 더 가까웠는데 내가 너무 안일했구나.’
한지웅은 자신의 불찰을 통감했다.
‘지유의 마음을 들어보고 맹주를 좋아한다면 확실하게 밀어줘야겠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검제님.’
그가 속으로 칼을 갈았다.
그의 눈이 반달이 되자 정심호는 만족한 표정을 드러냈다.
한지웅의 눈이 반달이 됐을 때가 진짜였다.
그도 은근히.
아니, 경쟁심이 굉장히 뛰어난 인물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정심호가 만족해하고 있는데 류한길이 폭탄선언을 했다.
“우리 가을이도 맹주를 좋아한다고 하오. 그래서 말인데 마련은 전력을 다해 가을이를 도와주기로 했소.”
혈마 류한길의 참전 소식.
박춘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허허. 안 봐도 뻔한 승부이거늘. 괜찮겠나?”
“길고 짧은 건 대봐야 하지 않겠소?”
류한길이 박춘식을 도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