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제3부 92화
“허억…! 허억…!”
설극이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발목에 상처가 났다.
아킬레스건이 베였는지 피가 가득 흘렀다.
뿐인가.
전륜과 마찬가지로 설극의 가슴이 길게 갈라져 있었다.
하얀 뼈가 보일 만큼 긴 상처였다.
“크흑. 이긴 줄 알았는데… 보기 좋게 당했어.”
전륜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최후의 일격이었다.
이 공격은 염라대왕조차도 막는 게 불가능했다.
한데 막히고 말았다.
“허억… 허억…!”
설극은 여전히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파천멸기가 빠르게 상처 부위를 치료하고 있으나.
신왕기로 인해 치료가 늦어졌다.
“마지막 공격이 막혔다 하더라도 난 포기하지 않아!”
설극의 밑에 있던 전륜이 사라졌다.
그의 뒤를 점한 전륜이 발을 휘둘렀다.
퍽!
설극이 반응하지 못하고 옆으로 나가 떨어졌다.
하지만 전륜도 곧장 움직이지 못했다.
설극과 마찬가지로 심각한 내상을 입었기 때문.
설극에게 당하고 바로 공격한 것도 신왕기의 회복력 덕분이었다.
반면에 혼원신공은 오직 파멸과 파괴에 특화됐다.
자기 회복력도 뛰어났으나 어디까지나 다른 신공에 비해서였다.
신왕기에 비하면 조금 모자랐다.
“으윽.”
설극이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간신히 몸을 세웠으나 곧이어 휘청거렸다.
뼈마디가 아우성쳤다.
한계에 다다랐다고 몸에서 신호를 보낸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을 꼿꼿이 세웠다.
전륜은 그러한 설극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좋아. 내 호적수라면 포기하지 말아야지!”
그가 신왕기를 피웠다.
그가 기수식을 취했다.
마치 손에 도가 있는 듯.
설극을 향해 전력으로 팔을 휘둘렀다.
심도.
무도의 최고봉에 있는 심득이었다.
심도가 공간과 함께 설극을 자르려 했지만.
설극이 팔을 앞으로 뻗어서 허공을 잡았다.
콰직!
공간이 찌그러졌다.
마치 거울이 깨진 것처럼 조각나기 시작했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깨진 조각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악…! 하악…!”
그 전보다 숨이 더 가빠졌다.
숨이 넘어갈 듯했다.
피로 흥건해진 손을 들어 보였다.
전륜의 다음 공격을 막으려는 자세를 취했다.
“하악…! 포기를 못 하악… 하겠다면 포… 기 시켜 주지 하악…!”
설극은 단전에 있는 파천멸기를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끄집어냈다.
쾅-
전륜과 설극이 서로를 향해 쇄도했다.
설극의 주먹이 전륜의 어깨를 강타했다.
퍽!
전륜의 심도가 설극의 다리를 훑고 지나갔다.
서걱!
허벅지에 긴 선이 그어지며 피가 뿜어졌다.
가득한 상처 위에 또다시 상처가 생겼다.
처절한 싸움.
누구 하나 쓰러지기 전에는 끝나지 않는 싸움이었다.
서걱!
심도가 설극의 옆구리를 베었다.
“큭.”
쾅!
설극도 지지 않고 전륜의 복부에 장력을 박아 넣었다.
“푸우웁!”
전륜이 검은 피를 토해냈다.
그 속에는 내장이 섞여 있었다.
“너를… 허억, 허억… 적수로 생각하… 허억… 길 정말 잘한 듯싶어…,”
전륜이 팔로 피를 닦곤 설극을 향해 튀어갔다.
설극이 회복하기 전에 끝내려는 심산이었다.
“하악…! 하악…!”
전륜이 지척에 다다랐음에도 설극은 거칠게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정말… 이게 마지막 허억… 이다!”
최후의 공격은 안 통했지만 시간은 전륜의 편이었다.
공격적인 면은 설극이 더 뛰어났다.
하지만 회복적인 면은 전륜이 한수 위였다.
전륜은 이 점을 이용한 것이다.
푸욱!
전륜의 심도가 설극의 심장에 틀어박혔다.
그는 승리를 확신했다.
설극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으니까.
* * *
4대 성지의 금역.
누워서 명상하고 있던 이준이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응!?”
가슴이 철렁했다.
무언가를 잃은 느낌이었다.
이준의 행동에 그의 어깨에 앉아 있는 파르가가 물었다.
“왜 그래?”
“느낌이 안 좋아.”
파르가는 이준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이준은 파르가의 계약자였으니까.
“불안감이 더욱 심해지고 있어. 갑자기 무슨 일이야?”
“나도… 모르겠어. 가슴이 울렁거려.”
“심법을 돌려서 안정해봐.”
이준은 파르가 말대로 사신기를 돌렸다.
사신기가 내부를 거칠게 달렸다.
빠르게 뛰는 심장을 조절하려고 했으나.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오히려 불안감만 커지고 있었다.
“안 되겠다. 애들한테 연락해봐야겠어.”
이준은 폰을 들어 곧장 박정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음이 두 번 정도 울렸을 때.
수화기 너머에서 박정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준아! 어쩐 일로 전화했어?
박정연은 반가운 음성으로 받고 있었다.
“무슨 일없지?”
-응. 아무 일도 없는데?
“지금 어디야?”
-각사학. 강의 중이야.
박정연은 이준의 전화에 수업 중임에도 곧바로 받은 것이다.
“학교에 아무런 일도 없는 거지?”
-평화로워서 지루할 지경인데 그건 왜?
“아무것도 아니야. 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는 애들은 누구누구야? 아니, 강의 없는 애들 좀 알려줘.”
-오늘은 혁진이 하고 지유 말고는 전부 강의가 있을걸?
“알았어. 고마워.”
이준이 전화를 황급히 끊었다.
그리고 박혁진의 번호를 눌렀다.
통화음이 갔다.
시간이 길어질 때마다 초조해졌다.
“혁진이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여보세요.
박혁진이 전화를 받았다.
“너 어디야?”
-쇼핑 중인데? 준아. 테구르가 만든 아티팩트 죽인다. 백화점에서 최고 인기 상품이래. 재고가 없어서 못 팔 지경이라는데?
“혹시 백화점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 아니지? 게이트가 다시 열렸다던가. 아니면 카오스 집단이 나타났다던가.”
-게이트? 잠깐만.
박혁진은 주변에 게이트가 열렸는지 찾아보고 있는 것 같았다.
-게이트로 보이는 기운은 없어. 카오스 집단도 마찬가지야. 뭔데 그래?
이준의 불안감이 박혁진에게 전해졌는지.
박혁진이 그에게 되물었다.
“느낌이 이상해서 전화해봤어. 혹시 너희들한테 이상이 생겼나 해서 말이야.”
-준아. 우린 네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강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신이 나타나서 공격하지 않은 이상은 우릴 위험에 빠트리지 못한다는 건 너도 잘 알잖아.
“그러네.”
이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신과도 싸워 이길 만큼의 실력을 가졌다.
박혁진을 걱정하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래도 고맙다. 항상 내 걱정해줘서.
“됐어.”
-쑥스러워하긴.
“끊는다.”
이준이 전화를 종료했다.
“하아아.”
한숨이 나왔다.
안도감이었다.
친구가 아무런 일도 없다는 말에 안심했다.
“지유에게 전화하는 건 무의미하겠지?”
“모두가 안전한지 확실하게 확인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이준의 마음을 잘 아는 파르가가 말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한지유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음이 계속 울렸다.
전화를 받지 않은 한지유.
-연결이 되지 않아 소리샘으로…
이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유를 찾아봐야겠어.”
“나도 같이 가.”
이준이 금역을 나갔다.
낙성각으로 나온 그가 벽을 타고 건물 꼭대기에 섰다.
‘한지유. 어디 있어?’
이준이 기감을 넓게 폈다.
새소리.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
자동차 경적음.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소리 등.
모든 소리가 이준의 귀에 집중되었다.
“찾았어?”
파르가 옆에서 물었다.
“아직.”
“이렇게 오래 걸릴 일이 아닌데.”
파랑이가 의아해했다.
이준은 인간의 범주에서 벗어난 존재였다.
최상위 신과도 대등한 무위를 가질 만큼 빼어났다.
이 세계에서는 이준의 시야를 벗어난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찾았다!”
“예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어. 어디야?”
“신기지가 수련실.”
“가까운 곳이잖아?”
파르가의 눈이 번쩍였다.
그러자 이준의 몸이 빛에 휩싸이면서 사라졌다.
이준과 파르가가 다시 나타난 곳은 신기지가 내부.
정확히는 한지유의 개인 수련실이었다.
“진법이랑 결계, 마법진이 몇 중으로 설치되어 있었구나?”
진법과 결계는 한지유의 기운을 흐트러트렸다.
흔적을 지우는 게 아닌, 방해.
그래서 이준이 그녀의 지척을 늦게 찾은 것이다.
“지유도 아무 일 없어.”
이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지유는 첨단 캡슐방 안에서 적과 싸우고 있었다.
상대는 바로 이준.
자신이었다.
그녀는 가상 공간에서 구현된 자신을 상대로 전력을 다했다.
위이이잉!
캡슐방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그러다 곧 경고음이 사라졌다.
한지유는 이를 무시하고 싸웠다.
“끝났네.”
가상으로 구현된 자신이 그녀의 턱 끝에 창을 겨누고 있었다.
“첨단 심상 대련 장치의 기술력이이 정도 많이 올라왔나?”
세상에 아직 공개되지 않은 기술.
오직 신기지가만이 보유하고 있었다.
한지유가 캡슐방에서 나왔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이준을 보고 놀란 그녀였다.
“이준!? 네가 어쩐 일이야?”
“전화는 왜 안 받아.”
“전화했어? 캡슐방에 있어서 전화가 울린지도 몰랐어.”
“아무 일도 없지?”
“보시다시피?”
“그럼 됐다. 검둥아 가자.”
“지유야 또 봐.”
파르가가 한지유를 향해 인사했다.
그리고 이준과 함께 사라졌다.
“뭐야, 저 녀석.”
한지유는 갑자기 나타나 사라진 이준을 보고 어이없어했다.
이준은 사신가로 돌아와서 생각에 잠겼다.
“그래도 불안해?”
파르가의 물음에 이준이 대답했다.
“응. 불안감이 지워지지 않아.”
문득 주경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만약에 말이다… 네 사부가 영영 말이 없으면 어떨 것 같아?]
갑자기 왜 떠오른 걸까.
이에 불안감은 더욱 증폭되었다.
“사부님.”
이준이 무극자를 불렀다.
“사부님 계세요? 급하게 물어볼 게 있어요.”
그의 말에도 무극자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여긴 그란투스 대륙도 아닌 지구.
천계의 신이 소통을 방해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무극자 사부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사부님. 살아 계시면 대답 좀 해보세요!”
이준의 외침에 마침내 목소리가 들렸다.
무극자 사부가 아닌, 주경아의 음성이었다.
[무슨 일이니?]
그녀의 목소리에 불안감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 * *
전륜이 설극의 심장을 찌르기 전.
설극의 귀에 이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부님!]
[사부님 계세요? 급하게 물어볼 게 있어요.]
‘준아.’
설극은 전륜이 쇄도해 오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이준의 목소리를 마음에 담았다.
[사부님. 살아 계시면 대답 좀 해보세요!]
‘사부에게 무슨 일이 있다는 걸 눈치챘구나.’
여자한테는 눈치가 눈곱만큼도 없더니.
이럴 때는 또 귀신같이 눈치가 빨랐다.
‘이 사부가 네게 거짓말을 했어. 고금제일인이라 말했건만 사부의 위에도 강한 놈이 존재하고 있었느니라.’
설극의 시간은 느리게 갔다.
이준과 지냈던 추억이 떠올랐다.
장난을 쳤던 모습.
이준이 토라진 모습.
녀석의 목숨이 간당간당했을 때의 모습까지.
파노라마처럼 기억이 지나갔다.
‘사부가 오래 곁에 있지 못해서 미안하다.’
설극이 눈을 감았다.
몸에 감각이 없었다.
언제 쓰러져도 문제 될 게 없을 정도.
피로도는 한계를 이미 넘은 상태였다.
힘이 하나도 없어서 전륜의 공격을 그대로 맞아야 했다.
그러던 그때였다.
[망할 사부님아! 오래오래 똥칠할 때까지 산다며! 왜 또 나한테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떠나는데!]
이준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격한 슬픔이었다.
제자의 목소리가.
전생에 태어나지 못하고 환생한 아들의 목소리가.
설극의 정신을 일깨웠다.
하지만 이미 늦은 상황.
푸욱!
전륜의 심도가 심장을 파고 들어왔다.
설극은 공허한 눈을 들어 보였다.
“…죽으려 했지만… 그러지 못하겠다…”
“…너!?”
“사신…선.”
설극이 전륜의 몸에 손을 얹으며 힘겹게 말했다.
전륜이 몸을 빼려 했지만 설극이 놓아주지 않았다.
“미, 미친! 같이 죽자는… 커허억!”
설극은 내가중수법으로 전륜의 몸에 사신선을 펼쳤다.
천극자나 이준처럼 완전하지 않지만.
지근거리에 있는.
그것도 전륜의 내부를 망가트리기에는 충분한 무공이었다.
털썩.
전륜이 쓰러졌다.
기혈과 혈맥이 전부 파괴된 채 기절했다.
설극도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하악…! 쿨럭쿨럭!”
그의 입에서 피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싸움이 끝나자 숨죽여 보고 있었던 염라대왕이 다가와 한마디 했다.
“심장을 간신히 비껴 맞았구나. 제정신이 아닌 놈이야. 전륜에게 제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는 놈이 있을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