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제3부 91화
각사학 내 스페인 포탈 구역.
이준은 벨렌 로레스를 배웅하고 있었다.
“준. 일이 끝나면 바로 각사학에 복귀할게.”
벨렌 로레스는 진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전 세계에 게이트가 사라지고 생긴 현상.
각지에서 범죄 집단인 카오스 각성자가 생겨났다.
그들은 살인과 방화를 즐기며 일반인을 괴롭혔다.
몬스터를 사냥하지 못한 금단 현상이었다.
예기치 못했던 일.
몬스터를 사냥하는 건 굉장히 자극적이었다.
게이트를 클리어하면 극한의 쾌감을 느끼기도 했다.
한데 다시는 몬스터를 사냥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대체제를 찾았다.
그 대상은 바로 각성자보다 약한 일반인이었다.
“여긴 신경쓰지마. 벨렌의 나라가 더 중요하지.”
“이해해줘서 고마워.”
“도움 필요하면 연락해.”
“응.”
카오스 집단은 일반인을 사냥하면서 다시 한번 쾌감을 맛봤다.
그 결과 하루에도 수백, 수천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이 일에는 이준의 책임도 있었다.
게이트를 전부 클리어한 사람이 바로 그였으니까.
벨렌이 손을 흔들고 포탈로 사라지자.
이준이 몸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상황이 이렇게 안 좋아질 줄은 몰랐어.”
“한번은 겪어야 할 부작용이야.”
파르가가 자책하는 이준을 다독였다.
이준이 시무룩해하고 있는데 주변은 학생으로 가득했다.
모두 이준을 보려고 모였다.
그는 굉장히 귀한 몸이 됐다.
한국의 맹주.
오대가문과 마벽을 합병시킨 유일한 존재였다.
각사학에 나타날 때가 아니면 함부로 보지도 못했다.
“예전에도 느낀 거지만… 잘생겼다.”
“격렬한 전투를 많이 하셨을 건데 얼굴에 상처 하나 없어.”
“아, 이준 님과 한 시간만 사귀어 봤으면 좋겠다.”
여학생들은 몽롱한 눈으로 이준을 바라보았다.
사랑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동경 어린 시선으로 본 학생들도 꽤 많았다.
“파천제 님처럼 강해져서 꼭 무림맹의 선택을 받고 말 테야.”
“졸업하면 어디로 갈지 정했어?”
“당연히 사신가 아니겠냐?”
“그쪽 경쟁 개빡샐 텐데 괜찮겠어?”
“그러니까 열심히 해야지.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했어. 파천제 님도 처음에는 우리와 같은 일반 심법 계승자였잖아.”
“그렇긴 하지만… 이준 님은 나중에 재능이 활짝 핀 천재 과라고 알고 있는데.”
“그게 어떻든 난 이준 님이 가주로 계신 사신가에 들어갈 거야.”
이준을 향한 무수히 많은 시선.
누군가가 용기 내어 이준에게 다가가려 한 순간.
“지금은 머리가 복잡한 것 같으니 다음에 말 걸어주시겠어요?”
한지유가 한 여학생을 막아섰다.
“아, 네….”
여학생은 한지유를 보더니 바로 물러섰다.
빙검후 한지유.
성격이 차갑기로 유명했다.
예전에는 종종 웃는 모습도 보였는데 4차 각성 이후 얼음으로 변했다고 소문이 났다.
학생 모두가 어려워한 그녀.
한지유의 등장에 바글바글하던 학생들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이준. 앞으로 좀 주의해.”
“뭘?”
“네가 각사학에 나타나면 수업이 마비돼.”
“고의는 아니었지만 주의할게.”
이준은 각성자의 우상이었다.
그가 모습을 보이면 도로가 마비될 정도였다.
얼굴을 보려고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어서 항상 기감을 감춰야 했다.
아니면 오늘과 같은 일이 벌어질 테니까.
이준은 한지유에게 사과한 후 경공을 펼쳐 사라졌다.
그의 뒷모습을 보던 한지유가 중얼거렸다.
“고민이 많아 보여.”
그녀는 이준을 따라가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머리가 정리될 때까지 놔두는 편이 좋았다.
그러던 그때.
“지유야! 준이 학교에 왔다며. 어딨어?”
박정연이 나타났다.
강의가 끝나자마자 소식을 듣고 달려온 모양.
한 손에는 검술 강의1 책과 벽운이 들려 있었다.
“갔어요.”
“언제?”
“방금요.”
“어디로 갔지? 지금 출발했으면 따라잡을 수 있으려나?”
박정연이 이준을 보기 위해 기감을 퍼트렸다.
이준의 기를 찾는데 한지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오스 집단으로 머리가 복잡한 것 같아요.”
“집구석에 잠자코 처박혀 있을 것이지. 왜 준이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지랄이야.”
한지유와 반대로 화끈한 성격을 가진 박정연이었다.
“그 새끼들을 전부 잡아다가 단전을 부숴버릴까?”
“대책을 세워야 할 것 같아요.”
박정연이 화를 가라앉히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가 편할 날이 없었다.
* * *
“하아아.”
이준이 학교 본관 건물 옥상에 누워 한숨을 푹 쉬었다.
“사부님. 게이트를 그냥 놔두는 게 나았을까요?”
게이트가 있을 땐 각성자의 목표는 몬스터였다.
지금처럼 일반인이 표적이 아니었다.
모든 게 잘못된 선택을 한 결과 같았다.
[검둥이가 말했지않니. 한 번쯤은 겪어야할 일이란다.]
무극자 대신 주경아가 대답했다.
“그렇겠죠?”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단다. 시간이 지나다 보면 지금 겪었던 일이 양호하다고 여길 날도 있을 거야.]
주경아의 말을 들으니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그녀의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포근했다.
무극자 사부와는 다른 편안함이었다.
[그도 아니면 다른 방법도 있어.]
방법이라는 말에 이준이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해결책이 있으세요?”
[어떻게 보면 지금 세상도 무림과 다름없어. 사마외도를 전부 소탕하는 건 어렵겠지만 녀석들을 억제할 방법은 있지.]
이준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뭔데요?”
[네 이름을 활용해보렴.]
“제 이름이요?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사마외도에게 공식적으로 선호하는 거야. 일반인을 죽이는 카오스 집단은 파천제의 이름으로 처단하겠다고 세계에 알리면 쉽게 해결될 거란다.]
“무림맹의 공적으로 선포하라는 말씀이시군요.”
[네가 곧 무림맹이니 잔뜩 겁먹을 거야.]
“잘 될까요?”
[날 믿어보렴.]
주경아가 환하게 웃었다.
신뢰가 가는 미소였다.
“사 단주.”
이준이 사형준을 부르자 곧바로 그림자가 하나 나타났다.
“카오스 집단을 한국 무림맹 공적으로 선포해.”
“가신들에게 전하겠습니다.”
[본보기로 한 곳 괴멸시키는 게 좋아.]
‘공포를 이용하라는 거네요. 알겠어요.’
[최대한 깔끔하게 처리해야 효과적이야.]
이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사형준을 불렀다.
“사단주.”
“하명하십시오.”
“한국에서 가장 악독한 카오스 집단이 어디지?”
이준의 물음에 김봉팔이 나타나 대신 대답했다.
“전주에 있는 사신곡이 있습죠.”
김봉팔의 말에 이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다시 한번 말해봐.”
“사신… 곡이라고 했습니다만…”
“사신이란 단어를 쓰는 집단이 악독한 짓을 행하고 있는데 가만히 있었어?”
사신은 이준의 근간이었다.
무극자 사부의 근간이기도 했다.
사신이 없었다면 존재하지도 못했을 두 사람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김봉팔이 넙죽 고개를 숙였다.
주인이 화나면 감당하지 못한다.
용서를 비는 게 최선이었다.
“지금 당장 무극단을 움직여서 사신곡을 지워.”
“그리하겠습니다.”
“한 놈도 남기지 마.”
이준의 싸늘한 목소리에 김봉팔이 마른침을 삼켜야만 했다.
주군이지만 너무 무서웠다.
어느 때는 정말 착하고 순수했지만.
어떨 때는 지금과 같이 공포스러웠다.
“주군의 명을 받듭니다.”
사형준과 김봉팔이 사라졌다.
“겁도 없는 놈들이네요.”
[때마침 본보기로 삼을 녀석들이 있어서 다행이야.]
웃으면서 말하는데 섬뜩했다.
어떻게 저렇게 곱고 예쁘게 생겼으면서 살기 짙은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까.
그러다 문득 그녀가 겪었던 일이 생각났다.
무극자 사부가 해줬던 말들.
깨끗하고 맑았던 여자가 독해져야만 했던 이유가 떠올랐다.
‘하긴 신선계에서 사부님 다음으로 강하시니깐.’
그녀는 초월자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신선이었다.
그녀가 곧 선이요 마였다.
‘사모님을 보면 사부님의 이상형은 강한 여자인 것 같아.’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다.
보고 있으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마왕이던 시절보다 지금이 훨씬 강한 상태이니까.
“그런데 사부님은 뭐하시는데 말씀이 없으세요? 많이 바쁘신가?”
[…하도 돌아다니셔서 밀린 업무 중이야. 사부가 없으니 허전하니?]
“조금은요. 그래도 괜찮아요. 지금은 사부님 대신 사모님이랑 대화하고 있잖아요.”
[만약에 말이다… 네 사부가 영영 말이 없으면 어떨 것 같아?]
“음.”
이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사부님이 잠깐 제 곁을 떠날 때가 있었는데 혼자가 된 느낌이었어요.”
이준이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게 더 슬픈 주경아였다.
전생의 연이 이어져서 그런지.
이준은 무극자을 무척이나 따랐다.
“근데 이제 헤어질 일도 없잖아요. 모든 게 잘 끝났으니 그걸로 됐어요.”
[…가가에게 말해서 준이가 보고 싶다 말했다고 전해줄게.]
“안 돼요!”
이준이 크게 소리쳤다.
손사래를 치며 격렬하게 거부했다.
[왜 그러니?]
“제가 그런 낯 뜨거운 말을 하면 사부의 어깨가 한껏 올라갈 거예요. 절대 안 돼요! 분명 절 놀릴 거라고요. 자기 없다고 애처럼 징징댔다고 말이에요.”
[그런… 이유때문에?]
주경아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저런 말을 해줄 사람이 살아 돌아올지 아니면 못 돌아올지 몰랐다.
“사부님한테 절대 말하시면 안 돼요.”
[그래. 가가에게는 비밀로 할게.]
그제야 이준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가. 준이가 벌써부터 보고 싶어하네요. 빨리 돌아오세요.’
주경아는 설극이 무사히 돌아오길 빌었다.
* * *
신왕성의 하늘에 다른 층계의 모습이 보였다.
설극과 전륜의 충돌로 일어난 현상.
층계의 균열을 막기 위해 염라대왕이 나섰으나 혼자선 무리였다.
“저 망할 놈들이 신계를 통째로 무너트리려고 작정했구나!”
염라대왕이 이를 갈았다.
설극과 전륜이 생사결을 한 지 일주일.
물도 안 먹고 싸우고 있었다.
그로 인해 신계가 몸살을 앓았다.
염라대왕이 아니었다면 신계는 이미 층계란 개념이 사라졌을 터다.
염라대왕이 두 사람을 보며 이를 갈고 있는 사이.
집요하게 손을 나누고 있던 설극과 전륜이 떨어졌다.
“허억…! 허억…!”
“하악… 하악…!”
두 사람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옷도 엉망이 된 상태.
걸레짝을 걸치고 있었다.
한 10초가 지났을까.
팟-
전륜이 먼저 설극을 향해 뛰어들었다.
그를 감싼 무형의 도가 주위로 퍼지면서 바르게 회전했다.
회오리가 폭풍이 되어 공기를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화르륵!
거기다가 염제의 화염이 설극을 향해 떨어졌다.
콰아앙-
신왕성을 뒤흔드는 굉음이었다.
“하악…! 하악…!”
전륜은 앞을 바라보면서도 도를 내려놓지 않았다.
언제든 상대의 공격을 방어할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화염의 회오리를 뚫고 설극의 창이 날아왔다.
눈에 보이는 공격.
전륜은 도를 움직여 창을 갈랐다.
퍼억!
“컥.”
하지만 전륜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입에선 피가 왈칵 뿜어졌다.
전륜의 오른쪽 어깨에 무형창이 박혔다.
그는 어깨에 박힌 무형창을 거칠게 뽑았다.
“분명히 막았, 헉!”
어느새 옆으로 나타난 설극.
얼마나 빠른지.
설극의 기운이 그를 따라가지 못해 한없이 늘어져 있는 게 보였다.
전륜이 몸을 틀어 도면으로 몸을 가렸다.
설극의 주먹이 전륜의 도를 강타했다.
쾅!
전륜이 뒤로 쭉 밀려났다.
“크윽.”
주먹을 막았던 도가 산산조각이 났다.
방어를 했지만 충격이 골까지 전해졌다.
무기가 사라진 건 중요하지 않았다.
‘파천혈신에게 내 무공이 통하지 않아.’
설극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무수히 많이 남겼다.
하나 목숨은 취하지 못했다.
신왕의 무공이.
신계의 정점을 찍은 무공이 통하지 않았다.
‘내 공격은 이번이 마지막이겠어.
전륜이 가진 패는 딱 하나였다.
최후의 무공뿐이었다.
쿠웅!
전륜의 몸에서 붉은 화염과 검은 화염이 동시에 치솟았다.
“이게… 내가 가진 모든 패다!”
전륜은 맨손으로 허공을 내리 그었다.
신왕성이 갈렸다.
신선계와 마계, 천계까지 두 쪽으로 나뉘어졌다.
한쪽 면은 붉은 화염으로 뒤덮였고.
나머지 한쪽은 암흑으로 변했다.
설극도 다른 층계와 같이 나뉘었다.
그 광경을 본 순간.
전륜이 입을 열었다.
“이겼다.”
한데!
염제와 흑암에 당한 설극이 여전히 자신에게 다가오는 게 아닌가.
그것도 굉장히 빠른 속도였다.
“말도 안 돼!”
전륜의 눈이 커졌다.
허공에 선들이 그어지는 게 보였다.
무수히 많은 선.
모두 결을 나타냈다.
정확히 말하면 흑암지옥의 결.
전륜이 사용한 무공의 결이 벌어졌다.
설극에게 파훼를 당한 것이다.
그 결과.
다가온 설극이 전륜의 얼굴을 덥석 잡았다.
“이긴 건… 본좌다.”
쾅!
그리고는 전륜의 머리를 신왕성 바닥에 그대로 내려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