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제3부 89화
그 무렵 신선계.
설극과 주경아는 신선경 연꽃 위에 앉아서 인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경아 정말 준이에게 정체를 말 안할 생각이야?”
“지금은 아닌 것 같아요. 세월이 지나면… 그때 할게요.”
설극은 주경아를 계속해서 설득했다.
이준을 보면서 혼자 속앓이를 하는 그녀.
몰래 눈물을 보이는 모습도 종종 보였다.
이준에게 살며시 말을 걸 때는 입에 미소가 걸리기도 했으나.
사모님이란 말을 들을 때면 마음 아파했다.
그 모습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설극은 정체를 밝히자고 설득에 나섰다.
하지만 요지부동.
그녀는 이준에게 정체를 밝히길 꺼려했다.
“경아.”
설극은 애가 탔다.
그녀의 아픔을 옆에서 지켜만 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몰래 이준에게 말한다면 일이 더 파국으로 치닫게 될 터.
설극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이제는 약조한 것을 지키러 가야하건만.’
신왕과 약속을 했다.
나중에 신왕성에서 비무를 하기로 말이다.
약조했던 걸 지켜야 할 때였다.
이미 많은 시간이 흘러서 신왕도 더는 기다려주지 않을 터.
슬슬 신왕성으로 떠나야 했다.
그 전에 이준과 그녀의 관계를 매듭짓고 싶었으나 무리였다.
아직은 아닌가 보다.
“그때 했던 말 기억나?”
“어떤 말이요?”
“나한테 이준을 부탁한다고 했잖아.”
“기억나요.”
“이제는 내가 경아에게 말할 차례야.”
“무슨 일 있으세요?”
주경아의 눈동자가 커졌다.
얼굴에 불안감이 가득했다.
설극의 낯선 말.
그와 너무도 어울리지 않은 부탁이었다.
“신왕과 한 약조를 지켜야할 듯 해.”
“어떤 약조인가요?”
“비무. 인계와 신계가 조용해진다면 내가 신왕성으로 가기로 했어.”
정적.
침묵이 내려앉았다.
두 사람은 그저 눈을 마주하고만 있었다.
“위험한 일이라면 저도 가겠어요.”
“그냥 비무일 뿐이야.”
“아무것도 아닌 비무라면 가가가 제게 준이를 부탁했겠어요?”
주경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극을 따라 신왕성으로 가려하는 모습이었다.
“경아.”
“절 말릴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가 잘못되면 준이는 누가 돌봐줘?”
설극의 말에 주경아의 몸이 굳었다.
맞는 말.
한 사람이라도 남아 이준의 뒤를 봐주는 게 좋았다.
“경아는 여기에 남아서 준이를 돌봐줘.”
“위험하지 않다면서요.”
“신왕에게 질 생각은 없어. 만에 하나란 경우가 있으니 말하는 거야.”
또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주경아가 주먹을 꽉 쥐었다.
앞 입술을 강하게 깨물자.
설극이 그녀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괜찮아. 아무 일 없을 거야.”
그의 다독임에 주경아가 깨물던 입술을 놓았다.
살짝 피가 맺혀 있었다.
설극은 엄지로 피를 닦았다.
그리곤 주경아에게 웃어 보였다.
“그래서 절 보챘군요.”
주경아가 설극을 노려보았다.
크게 예쁜 눈으로 쳐다보자.
설극이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그게 말이지.”
“무사히 돌아오세요.”
“응?”
“기다리고 있을게요.”
주경아의 눈동자에는 걱정과 불안이 가득했다.
설극에 대한 염려였다.
“꼭 돌아올게.”
그가 주경아를 안심시켰다.
짧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의 확고한 의지에 안심이 되는 주경아였다.
“신왕성으로 가기 전에 준이와 이야기를 나누세요.”
“그래야겠지?”
“시덥지 않은 대화도 좋아할 거예요.”
두 사람은 이준을 떠올리자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 * *
이준은 너무도 바빴다.
그의 거처, 낙성각에는 서류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다.
현무각주 이의태가 한더미의 서류를 더 던져 가져왔다.
“또 있나요?”
“아직 많습니다.”
“현무 각주님이 적당히 싸인하세요.”
“이것들 전부 가주님께서 싸인해야할 서류입니다.”
“제 대리인이시잖아요. 전 이런 것보다 수련을 하는 게 좋아요.”
“중요한 것들만 추렸으니 이것만 마무리하시지요.”
“하아아. 괜히 세력을 합친다고 했나.”
곧바로 후회했다.
우두머리가 이렇게 바쁜 줄 상상이라도 했겠나.
사신가의 일은 전부 이의태에게 맡겼었다.
그래서 밖으로 나돌아다닐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들어온 서류는 모두 이준이 직접 도장을 찍어야할 것들이었다.
대리인이 하기에는 사안이 너무도 귀중한 것들.
그랬기에 이의태가 이준에게 가져온 서류였다.
그는 한동안 서류에 파묻혀 꼼짝도 하지 못했다.
하루를 꼬박 지새워서야 일이 끝났다.
“난 책상 체질이 아니야.”
“고생하셨습니다.”
이의태 또한 옆에서 이준을 도왔다.
오히려 힘든 건 이의태였다.
그는 검제 박춘식과 비슷한 나이.
곧 70대가 된다.
그에 비하면 이준은 한참이나 쌩쌩할 나이었다.
“이제 일거리 가져오지 마세요. 파업이에요. 나머진 현무 각주님이 알아서 하세요.”
“노인을 너무 부려 먹으시는 것 아닙니까? 그러다 악덕 주인으로 소문나십니다.”
이의태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런 건 최첨단 기술 없나요? 신기지가에 말해서 만들어 달라고 하든지 해야지 후우우. 현무 각주님은 이런 일을 매일 어떻게 했어요?”
“하다 보면 늡니다.”
이의태가 서류를 차근차근 정리했다.
“건강 챙기면서 하세요.”
“지안이가 좋은 것들을 많이 챙겨와서 쥐여주고 있습니다. 아주 귀한 영약들이더군요. 먹었더니 한 20년은 더 정정할 듯합니다.”
“어쩐지 금역에서 영약들이 사라진다 생각했는데 지안이 짓이었어. 혼꾸녕을 내줘야겠네요.”
“전 모르는 일입니다.”
이의태가 고개를 숙이곤 서류를 챙겨 나갔다.
혼자 남은 방.
몸이 쑤시는지 이준도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이른 새벽이었다.
숨을 들이마시니 맑은 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좋네.”
사신기가 피로를 싹 날려주었다.
[무공 수련을 하지 않아서 좋은가 보구나 제자야.]
“시간이 없어서 못한 거예요. 사부님도 보셨잖아요. 서류가 방 전체에 가득했던 광경을요.”
[이 사부는 대궐 같은 집무실에 서류가 가득해도 반나절만에 끝냈느니라. 어디서 그 쥐꼬리만 한 방에 종이가 좀 찼다고 징징거리느냐.]
“그놈의 잔소리.”
이준이 본인만 들리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하나 이를 못 들을 리 없는 무극자가 호통을 쳤다.
[가아아알!]
골이 떨어져 나갈 듯한 일갈이었다.
사신기로도 고통을 무마하지 못했다.
“자, 잘못했어요!”
이준이 항복하고 나서야 일갈이 멈췄다.
[큼큼. 목이 꽉 막혀서 잘 안 나오는구나.]
“컨디션 좋았다면 사람 하나 잡았겠습니다.”
[라떼는 말이다. 천극자 사부님의 말을 한 토씨도 놓치지 않고 새겨…]
라떼 사부가 나왔다.
속사포로 말하는 무극자 사부.
누가 들으면 래퍼인 줄 알겠다.
이준은 로봇이라도 된 듯.
자동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모두 사부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목소리에는 영혼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의무적으로 대답했다.
[제자야.]
그러던 찰나.
무극자 사부의 진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섭게 왜 그러세요.”
[경아를 이 사부처럼 대해야 할 것이다.]
“물론이죠. 전 이제 사부님보다 사모님이 더 좋은걸요.”
[끌끌끌. 이 사부를 골탕 먹이려고 해도 소용없다. 거짓말인 것이 눈에 훤히 보이니라.]
“정말인데요? 진실인지 거짓인지 봐볼까요?”
이준이 방으로 들어가서 하나의 물건을 꺼내왔다.
[그게 무엇인고?]
“진실과 거짓을 가려주는 기계입니다.”
[호오.]
무극자 사부가 호기심을 보였다.
이준은 연무장 너머에 있는 정자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는 기계를 바닥에 놓고 손을 얹었다.
“손을 위에 얹고 여기 버튼을 누르면 제가 거짓말하는지 나와요.”
[어떻게 말이냐?]
“손에 전기가 올라와요.”
[그것 참 신기한 물건이구나. 어서 해 보거라.]
“사부님이 질문을 하셔야 제가 버튼을 누르죠.”
무극자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로 질문을 했다.
[제자는 경아보다 이 사부를 더 좋아한다. 맞느냐?]
“아니요. 전 사모님이 더 좋아요.”
그 말을 한 직후.
이준은 빠르게 기계의 버튼을 눌렀다.
기계가 작동했다.
요란한 음이 돌리면서 가슴을 졸이게 만들었다.
띵동!
그때 알림음과 함께 초록색 등이 커졌다.
[어떻게 된 것이냐?]
“진실이라고 나왔어요.”
[거짓말이다!]
무극자가 버럭 소리쳤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격하게 부정했다.
[다시 해보거라. 준이는 경아보다 사부를 더 좋아한다!]
기계가 작동하며 음이 울렸다.
또다시 초록 불이 떴다.
계속해서 시도했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무극자 사부가 낙담했다.
[그럴 리가 없거늘…]
“보셨죠?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시라고요. 제가 사부님보다 사모님을 더 잘 챙겨드릴 테니까요.”
이준의 농담에도 무극자 사부는 무언가를 중얼거릴 뿐.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사부님?”
[나보다 경아를 더 좋아하다니….]
무극자 사부는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이게 그 정도로 상심할 일인 건가?’
장난을 치던 이준이 심각해진 무극자의 상태를 보고 어리둥절했다.
* * *
설극의 어깨는 축 처져 있었다.
언제나 1순위일 것만 같았는데 주경아에게 밀려나니 상심이 컸다.
“다녀올게.”
“농담일 거예요.”
“경아도 봤잖아. 기계는 거짓말 같은 거 몰라.”
설극은 풀 죽어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는 주경아가 그를 달랬다.
“하찮은 장난감 가지고 그렇게 낙담할 필요 없어요. 마음으로는 가가가 1순위일 거예요.”
“그러겠지?”
설극이 초롱초롱한 눈을 했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주경아는 그에게 듣고 싶은 말을 해줬다.
“당연하죠. 가가가 준이를 키웠잖아요.”
원하는 대답을 들었지만 설극은 다시 어깨를 늘어트렸다.
“아니야. 날 위로하려고 애써 거짓말하지 마.”
그가 앞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그녀가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애라니까.”
저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에 반한 그녀였다.
결전을 앞두고도 자기 아들에게 선택받지 못했다고 낙심한 사람.
누가 그를 파천혈신이자 신선제라고 생각할까.
그녀는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향해 작게 말했다.
“꼭 돌아오세요.”
한편.
심상에 빠져 있던 전륜이 눈을 번쩍 떴다.
“드디어 오는 거냐 파천혈신. 기다리다가 지칠뻔했어.”
전륜은 굉장히 기뻐했다.
자신의 호적수가 드디어 신왕성으로 오고 있었다.
“마중이라도 나가볼까?”
그는 신왕성을 나왔다.
허공에는 신성력과 신왕기가 가득했다.
이곳은 그의 영역.
무한한 힘을 주었다.
“흠.”
전륜은 설극을 기다리다가 누군가에게 말을 걸었다.
“구경 안 올 거냐? 염라.”
[가서 네놈 뒤치다꺼리를 하라는 말이냐.]
염라대왕이 버럭 소리쳤다.
인계에서도 뒤처리하느라 힘들었는데 이젠 하다 하다 신계의 뒤처리를 맡기려 했다.
화가 났다.
당장이라도 전륜을 찾아가 부숴버리고 싶었다.
염라대왕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전륜은 그저 자기 할 말만 했다.
“한 명이라도 더 있으면 좋잖아. 아니면 너도 끼던가.”
[너희 둘 사이에 껴서 무슨 피를 보라고 그러느냐. 됐다.]
“정말 안 궁금해? 우리가 싸우는 걸 직접 보고 싶을 텐데.”
전륜이 계속 자극했다.
그러자 염라대왕도 못 이기는 척 받아들였다.
[네가 하도 부탁해서 가는 것이다. 절대 너희의 싸움이 궁금해서 찾아가는 게 아니다. 알겠느냐.]
“알았으니까 빨리 와.”
염라대왕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신왕성으로 오기 위해 준비하는 모양이었다.
그사이 설극이 도착했다.
한데 몸에 기운이 없었다.
“최상의 상태로 오는 게 아니었어?”
“…….”
설극은 전륜의 말을 무시했다.
홀로 구시렁거릴 뿐이었다.
“뭐지? 기운은 정상인데.”
전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극의 힘은 그 전보다 더 강해진 상태였다.
최상의 폼이었다.
한데 파멸적인 기백은 어디 가고 매가리 없는 모습만 보이는 걸까.
“야. 무슨 문제라도 있어?”
전륜이 재차 물었다.
그제야 설극이 말했다.
“내가 밀렸어.”
“누구한테 밀려? 널 이긴 사람이 있다는 거냐?”
전륜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뿜어졌다.
설극을 이기는 건 자신이라 생각했다.
“그게 아니야.”
“그럼 뭐? 자세히 말해봐.”
“나보다 경아가 더 좋대.”
“누가?”
“내 제자 준이가.”
전륜이 인상을 찌푸렸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이런 일 가지고 풀 죽어있으니 설극이 참 한심스러웠다.
“별것도 아닌 일 가지고 신성한 나와의 비무를 망칠 작정이냐.”
“별것도 아닌 일?”
설극의 몸에서 파천멸기가 일시에 뿜어져 나왔다.
파멸적인 기세였다.
허공에 자리한 신왕기를 거칠게 밀어내는 파천멸기.
설극의 분노에 파천멸기가 동조했다.
“나한테는 별 게 아니야.”
설극의 눈이 적안으로 번들거렸다.
전륜은 가슴을 조여오는 기세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