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제3부 86화
신계에 오른 인간이나 영물이라면 모두 무극자를 두려워했다.
파천혈신은 신계 역사상 가장 잔혹하다고 평가받았다.
신선계의 신선들이 멋대로인 파천혈신을 혼내려 했으나.
되레 당한 걸로 유명했다.
신계조차 제어하지 못한 단 한 사람.
그가 바로 파천혈신, 무극자였다.
절대종이라면 다들 한 번씩 들어본 이름.
특히 흑룡왕의 기억을 가진 파랑이, 아니 이젠 검둥이가 된 파르가는 무극자를 굉장히 어려워했다.
강할수록 자신보다 높은 존재가 얼마나 천상계에 있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파르가란 멋진 이름도 있는데…”
작은 반항을 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어허. 이 녀석이 그래도? 노부는 네가 준이를 위해 희생하였다고 봐주지 않느니라. 노부는 검둥이가 마음에 들었으니 그리 알거라.]
“힝.”
아이덴 루블리스와 함께 천계의 신을 상대로 엄청난 위엄을 보였던 흑룡왕 파르가는 없었다.
무극자의 눈에는 꼬맹이 시절부터 길렀던 파랑이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그때.
파랑이에게 구원의 손길이 내려왔다.
[가가. 정녕 검둥이란 이름밖에 없나요?]
주경아의 목소리였다.
[경아는 검둥이가 마음에 들지 않은 거야?]
무극자의 단호하던 음성이 그녀로 인해 부드러워졌다.
주경아는 무극자의 질문에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이준을 향해 되물었다.
[준아. 그 이름이 최선이니?]
이준도 뜨끔했다.
“너무… 성의가 없어 보이죠?”
[세상에는 예쁘고 아름다운 단어들이 많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지 않으렴?]
파르가의 얼굴이 활짝 폈다.
드디어 자신의 편이 나타난 것.
마음이 놓였다.
파랑이에 이어서 검둥이가 될 뻔했다.
아무리 흑룡왕이란 별명을 집어 던졌다지만.
검둥이는 아니었다.
“음…”
[크흠….]
이준과 무극자가 동시에 생각에 잠겼다.
무극자가 손을 턱에 괴니.
이준도 똑같이 행동했다.
사제지간이 고민하는 것도 똑같았다.
이를 본 주경아가 피식 웃었다.
[전생의 인연이라도 핏줄이라서 하는 짓이 똑같구나.]
무극자가 인상을 찌푸리자 이준은 눈까지 좁혔다.
두 사람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사부님.”
[너도냐?]
“네.”
[이 사부도 전혀 생각나지 않는구나. 검둥이가 뇌리에 박혀서 떠나가질 않아.]
“저도요. 암만 생각해도 괜찮은 이름이 안 떠올라요.”
무극자와 이준의 말에 파르가가 절망에 빠졌다.
그는 구원자인 주경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는 주경아의 아름다운 영혼이 보였다.
파르가가 그녀에게 도움을 청했다.
[어찌 예전과 하나도 달라진 게 없는지 쯧쯧.]
주경아가 혀를 찼다.
그녀는 무극자의 작명 실력을 잘 알고 있었다.
현대 말로 저급한 네이밍 센스랄까.
정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무극이란 무공명에 비명을 질렀을까.
본인 이명에 자부심이 있는 건 알겠는데 죄다 무극이 들어가니.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이걸 작명 실력이라고 말하기가 부끄러웠으니까.
[준아. 네가 결정하거라. 이 사부는 너의 결정을 따르겠느니라.]
“아니에요. 사부님이 계시는데 어찌 제자가 결정을 합니까. 사부님이 이름을 정해주세요.”
괜히 주경아에게 한 소리 들을까 봐 떠넘기는 두 사람이었다.
옆에서 보고 있자면 가관.
짜증이 올라올 지경이었다.
심지어 주경아는 인내심이 그리 많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파랑이로 하든, 검둥이로 하든 마음대로 하세요. 신선제와 인계의 천하제일인이 지은 이름이 그따윈지 원.]
주경아가 버럭 소리치고 사라졌다.
무극자와 이준이 서로 눈치를 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그냥 검둥이로 하자꾸나.]
“저도 그러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어감이 착착 붙고 좋기만 한데…”
결국 파르가는 검둥이가 되고 말았다.
잠깐의 희망이었다.
“차라리 나타나시지나 말지.”
파르가는 희망을 주고 사라진 주경아가 원망스러웠다.
“검둥아. 다시 잘 지내보자.”
이준은 파르가의 마음도 모른 채 얼굴을 비비며 좋아했다.
* * *
이준은 한동안 파르가와 시간을 보냈다.
지금도 혼원문이자 사신문 폭포수 아래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알게 된 사실.
“처음부터 흑룡왕인 걸 몰랐던 거야?”
“응. 주인님이 아이덴의 기억을 되찾으면서 내 기억도 돌아온 거야.”
“신기하네.”
“그보다 정말 용계는 어떻게 됐을까?”
파르가의 말에 이준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호 말대로라면 지금쯤 무언가가 나타나야 하는 거 아닌가?”
아무런 일도, 소식도 없었다.
그 흔하던 메시지도 말이다.
“주인니이이임!”
테구르가 자신이 있는 곳으로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러다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옷매무새를 고쳐 잡고 말했다.
“드디어 로티틸 님이 귀환했습니다요.”
“부상자는?”
“페어리들은 치유 스킬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병력이 그대로 인 것 같습니다요. 주인님께 보고할 게 있다고 하니 곧 이곳으로 올 겁니다요. 헤헤.”
테구르가 굽신거리면서 웃었다.
녀석의 시선은 한쪽에 고정된 상태였다.
“신기하지?”
“아, 아닙니다요!”
테구르가 바짝 긴장한 채 대답했다.
상대는 십미호가 아니었다.
절대종 중에서도 최강인 드래곤.
사신수와 맞먹는 종족이었다.
용계의 대군주 앞에서 신기해하다니.
목숨이 열 개라도 살아남지 못하리라.
“네가 검둥이를 데려온 건 칭찬받을 일이야.”
“게이트의 모든 아티팩트는 주인님의 물건. 제가 검둥님을 데려온 건 당연한 일입습죠.”
테구르의 대답에 옆에 있던 파르가가 버럭 소리쳤다.
“검둥이가 아니고 파르가다! 네놈 죽고 싶으냐!”
파르가의 눈이 검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준과 무극자가 검둥이라고 부르는 건 어쩔 수 없으나.
다른 몬스터는 아니었다.
“히에엑! 자, 잘못했습니다요. 제가 시, 실언을 했습니다요. 앞으로 검둥, 아니 파르가 님이라고 꼭 부르겠습니다요.”
테구르가 넙죽 엎드려 용서를 구했다.
상황판단이 참 빠른 녀석이다.
이준 앞이라고 조금이라도 행동이 늦었다면 목숨을 보장받지 못했을 것이다.
“모두에게 전해. 날 검둥이라고 불렀다가는 죽는 목숨이라고.”
“아무렴요. 제가 전 몬스터에게 파르가 님의 이름을 널리 퍼트리겠습니다요.”
테구르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 사이.
귀환한 로티틸과 페어리들이 다가왔다.
“페어리 전원 무사 귀환했습니다.”
“부상자와 사망자는?”
“전무해요.”
“기대 이상인데? 욕망의 항아리면 그래도 절대종이 있었던 곳인데 말이야.”
욕망의 항아리는 사흉수 도올의 구역.
도올이 사라졌다지만 그 안의 몬스터는 죄다 태생이 블랙급이었다.
일반적으로는 페어리가 이길 가능성이 없는 몬스터였다.
한데 부상자와 사망자가 하나도 없이 클리어했단다.
엄청난 성과.
페어리들이 태생과 잠재력이 블랙급으로 올랐다지만 너무도 사기적이었다.
“다 주인님이 베풀어주신 은혜 덕분이에요. 그렇죠, 여러분?”
“물론이죠. 주인님이 안 계셨으면 저흰 이 자리에 없었을 겁니다.”
“이미 이무기에게 잡아먹혔을 거예요.”
페어리들이 이준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로티틸은 다시 보고를 이어갔다.
“이건 게이트를 클리어하고 얻은 것 중에 귀중해 보이는 것들만 가져왔어요.”
모두 다 SS급의 아티팩트들.
이것들만 팔아도 작은 나라를 살 금액이었다.
돈을 갈퀴로 긁어모으고 있는 이준.
로티틸의 보고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것들이에요.”
로티틸이 몸을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뒤에서 페어리들이 네 개의 바구니를 가져왔다.
“이건 또 뭐야?”
이준의 눈이 커졌다.
놀란 목소리에 엎드려 있던 테구르도 호기심에 몸을 일으켜 바구니를 보았다.
“알… 입니까요?”
“검둥아. 어떻게 된 일이야?”
“나도… 모르겠어. 어째서 적룡왕의 알이 있는 거지?”
빨간 줄무늬의 알은 바로 이준이 죽였던 적룡왕 카르디의 알이었다.
“주인님. 메시지를 다시 확인해봐. 그냥 넘기고 지나간 메시지가 있을 거야.”
이준은 홀로그램을 열어 메시지를 차근차근 읽어나갔다.
* * *
[로티틸이 이끄는 제2 군단이 ‘욕망의 항아리’를 클리어했습니다.]
[블랙존 게이트를 모두 클리어했습니다.]
[유일무이한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칭호 ‘균열의 지배자’를 얻었습니다.]
[용계를 점령할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무주공산인 용계를 점령하겠습니까? (Y/N)]
[제한 시간 – 00:00:01]
[제한 시간이 끝났습니다.]
[주인이 없는 용계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보상으로 ???를 얻었습니다.]
[보상으로 ???를 얻었습니다.]
[보상으로 ???를 얻었습니다.]
[보상으로 ???를 얻었습니다.]
놓쳤던 메시지를 찾았다.
워낙 많은 메시지가 올라오니 보지 못하고 넘겼던 것들이다.
이준이 알을 차근차근 보자.
알 위에 정보창이 떴다.
[적룡의 알]
[백룡의 알]
[무룡의 알]
[녹룡의 알]
자신이 죽인 용신족 우두머리들의 알이었다.
“내가 용계의 주인이 돼서 이 알들이 나한테 온 건가?”
“아마도?”
“대박이네. 그런데 이 녀석들 깨어나면 검둥이 너처럼 기억을 가지고 있는 거야?”
“난 다시 태어나도 전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만 저 녀석들은 달라. 기억이 전부 사라져.”
“그건 다행이네.”
적룡이 부활한다 하더라도 자신에게 칼을 들이댈 일은 없었다.
물론 다시 싸운다 해도 이길 자신도 있지만 말이다.
“전부 다 내가 키워야 하나?”
“저 녀석들은 애완견이라 보면 돼. 잘 키울 자신이 있으면 주인님이 전부 키우고 아니면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기는 게 좋아.”
“남한테 주기는 또 싫은데.”
이준은 욕심이 많았다.
무려 용신족이었다.
그것도 각자의 속성에서 정점의 존재.
그런 녀석을 남에게 주는 게 쉬운 일일까.
능력이 안 돼도 전부 다 가지는 게 옳았다.
아니면 호구라고 할 테니까.
“잘 생각해야 해. 성격 잘못 잡히면 카르디처럼 삐뚤어져. 그러면 또 지금과 같은 상황을 반복할 수 있어.”
이준이 팔짱을 낀 채 알들을 차례대로 보고 있을 때였다.
“준아. 뭐하냐.”
박혁진이 이준의 이름을 부르면서 올라왔다.
그러다가 이내 발을 멈췄다.
이준 앞에 있는 알들을 보았기 때문.
박혁진의 눈은 어느새 반짝이고 있었다.
이준은 그를 보며 감탄했다.
“귀신같은 놈. 타이밍 기가 막혔다.”
“준아, 이것들 뭐냐? 설마 또 테이밍 하려고?”
“아니야.”
“그럼?”
“너 저것 중에 하나 골라 봐.”
이준의 말에 박혁진이 벙찐 얼굴을 했다.
눈에 물방울이 맺힌 박혁진이었다.
“이 자식! 역시 형 생각하는 건 너밖에 없다.”
그러다 이준을 확 안았다.
“놔라. 안 준다.”
안 준다는 말에 박혁진은 이준을 밀치며 곁에서 떨어졌다.
“저게 뭐인 줄 알고 가지고 싶어하냐.”
“뭐든 상관없어. 귀엽고 강한 녀석이면 돼.”
박혁진은 이준의 몬스터가 굉장히 부러웠다.
사신수의 흑염마조.
십미호의 파랑이.
이 두 마리만 가지고 있어도 너튜브 동영상은 난리가 날 것이다.
억대 뷰?
일주일 안에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동경의 대상이 된 이준.
박혁진도 친구인 이준을 동경했다.
그를 따라 하면 조금이라도 닮아가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더욱이 몬스터를 가지고 싶었다.
“정말 사차원이라니까.”
“매형. 고르면 돼?”
“내가 왜 네 매형이야!”
“어? 너 박정연이랑 결혼 안 할 거야?”
“연애도 안 해봤는데 무슨 결혼이냐.”
“나중에 할 테니까 미리 부르는 거지.”
“하지 마!”
“어어? 너 박정연 싫어?”
“그건 아닌데….”
“지유 때문에 그래?”
“그건 더욱 아니야.”
“그럼 마음 가는 대로 확실히 행동해. 어정쩡하게 굴다가 한쪽은 더 상처받을 테니까.”
“갑자기 대화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른다?”
“친구로서 충고야 매형 놈아.”
“네가 벌써 정한 것 같은데?”
“너 빼고 다 알걸? 허수나 경수 선배한테 물어봐. 네가 누굴 좋아할 것 같냐고.”
“티가 많이 났나?”
“네가 가장 많이 챙기는 게 박정연이라 그런 거야.”
이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생각에 잠기려는데.
“네 연애는 됐고 난 저 네 개 중에 고른다?”
“미친놈 고민도 못 하게 하네.”
이준이 피식 웃으면서 박혁진을 보았다.
고민해서 뭐 할까.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난 이 알이 마음에 들어.”
박혁진은 네 개의 알 중 하나를 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