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제3부 82화
드워프들의 재촉에 박춘식과 정심호는 본인의 무기를 얼떨결에 건넸다.
“우린 성검류 밖에 안 만드니 너흰 땡잡은 거야.”
“고, 고맙소.”
“인간은 여전히 싹퉁머리가 없구만. 어른과 맞먹으려 들다니 말이야.”
박춘식이 이준에게 고개를 돌리자.
“검제님보다 삼백 년은 더 살았을 거예요.”
그가 곧바로 대답했다.
“텔자크. 네가 동안이라서 그런 거야. 이해하라구.”
“그런 거냐?”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드워프의 말에 검제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작에 칭찬이었다고 말하지. 오해할 뻔했잖아. 흐흐. 기분 좋으니까 50만 골드만 받을게.”
텔자크는 싱글벙글했다.
참 단순하고 순순한 종족이었다.
“고맙… 습니다.”
300년을 훌쩍 넘게 살았다고 하니.
절로 존댓말이 나왔다.
괴팍한 성격을 지닌 괴개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드워프의 괴랄한 성격 때문인지.
괴개가 정상인으로 보였다.
“이준 님. 대회의가 있기 전까지 무기를 만들고 싶은데…”
“남쪽에 테구르의 대장간이 있어요. 이 녀석들이 안내해줄 거예요.”
“배려 감사합니다.”
드워프의 왕인 말론 툰두가 대표로 인사했다.
좋은 무기를 한가득 본 드워프들은 기분이 한껏 올라갔다.
박춘식 등에게 건네받은 무기를 들고 샤크로아의 안내에 따라 남쪽으로 이동했다.
“후우우.”
박춘식이 숨을 내쉬었다.
폭풍이 지나간 자리.
정신이 없었다.
이준은 박춘식과 정심호에 물을 건넸다.
“물 좀 마시세요.”
“고맙소.”
박춘식은 건네받은 물을 그대로 원샷했다.
한 번에 다 마신 그의 눈이 커졌다.
“물맛이 왜!?”
정심호는 한방울이라도 남기지 않으려고 컵을 계속 털어냈다.
“춘식아. 이건 보통 물이 아니야. 영약이라고.”
두 사람이 놀라고 있을 때.
박혁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혼원문 앞에 있는 오아시스 물이에요. 몬스터들 말로는 생명의 샘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럴수가!”
“영약이 샘으로 만들어져 있단 말이냐.”
“그런 셈이죠.”
파랑이가 주고 간 축복 중 하나.
모든 장소에 생명이 넘쳐흘렀다.
유독 강력한 힘을 뿜어내는 곳이 몇군데 있는데 그중 한곳이 바로 게이트 중앙의 오아시스였다.
“너희도 이 물을 마셨느냐?”
박춘식의 물음에 박혁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매일 마시고 있어요.”
“허, 허허.”
그가 허탈하게 웃었다.
마신 물은 한빙수의 영약과 비슷한 효력을 지녔다.
이 물을 매일 마신다면 노폐물은 물론 내공도 빠르게 상승한다.
뿐인가.
음기의 무공을 익힌다면 엄청난 성장을 보일 터다.
그만큼 이준이 내민 물은 엄청난 힘을 지녔다.
박춘식이 놀라는 사이.
정심호는 손녀들을 불렀다.
“예나와 예은이는 어디 있느냐!”
정심호의 내공이 담긴 목소리에 정예나와 정예은이 어디선가 달려왔다.
그녀들의 몸에선 꽃냄새가 가득했다.
정심호가 말을 더듬으면서 물었다.
“너, 너희들도 이, 이 물을 마셨느냐.”
“네.”
“오아시스에 있는 물을 물어보는 거다.”
“오아시스 물은 식수원이니 당연히 마셨죠?”
“경수와 허수도?”
“물론이죠. 그게 왜요?”
“이, 이게 얼마나 귀한 물인지 알지?”
“할아버지 저도 각사학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교수예요. 오아시스의 물이 평범하지 않다는 건 진작부터 알았어요.”
“후우우. 알았으면 됐다. 여기 있는 동안 하루에 3L씩 꼭 마시거라. 아니지. 마실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이 마시는 게 좋겠다.”
행운도 이런 행운이 없었다.
억만금을 주고도 사지 못하는 게 영약류.
한데 이 게이트에선 식수원으로 사용한단다.
전생에 나라를 구하지 않고서야 이런 행운을 얻지 못했다.
정심호는 이준을 존경 어린 눈으로 보았다.
“정말 대인배이오. 귀한 물을 아무런 대가도 없이 주다니 파천제의 행동에 감복했소.”
앞으로 손녀들과 손녀사위의 길은 탄탄대로였다.
세계 랭킹 1위의 각성자가 이토록 아끼고 밀어주는데 잘 안될 수가 없었다.
“별것도 아닌 일로 고맙다하실 필요 없어요.”
“마음이 대해와 같구려.”
정심호도 이준에게 푹 빠졌다.
제3자가 보면 이준은 호구.
그것도 호구 레벨에서 만렙을 찍은 사람이었다.
하나 이준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를 호구로 취급하지 않았다.
이준의 사전에는 공짜가 없었으니까.
어떤 식으로든 해준 값을 받으려 하는 게 그였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다.
가진 걸 전부 베푼다 한들.
결국 이준의 밑.
근골과 천부적인 재능을 동시에 타고나지 않은 이상.
이준을 뛰어넘을 수 없었다.
이것도 많이 생각한 것.
이준의 발끝이나 따라오면 다행이었다.
이준도 여유가 있으니 베푸는 것.
여유가 없다면 친구들에게 퍼줬을까.
“하, 하.”
이준이 어색하게 웃었다.
무언가 양심이 찔렸다.
그가 재빠르게 화제를 전환했다.
“가주들의 의견은 어떤가요?”
“응당 파천제의 의견을 따른다고 했소.”
박춘식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이준이 말을 이어갔다.
“그란투스 대륙과 지구가 이어지면 많은 혼란이 일어날 거예요.”
“감내해야 할 부분이오.”
세상은 이미 게임이 되었다.
각성자 시스템이 생기고부터 시작된 결과.
세계의 틈이 지구와 연결된 순간.
새로운 세계가 탄생할 것이다.
게임이나 웹소설처럼 이세계인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기존의 질서가 아닌,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질 터.
적응하는데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
“대외적인 일은 두 분이서 잘 처리해주세요.”
“노력하리다.”
* * *
하루가 더 지나자.
4대 성지 금역으로 사람들이 속속 등장했다.
귀족으로 보이는 남자가 틈을 건너왔다.
그는 제로니아 왕국의 귀족.
물의 도시 해미리트 영지의 베오가 영주였다.
해미리트 영지는 금역과 맞닿아 있었다.
“많이 늦었습니다.”
베오가 영주가 이준에게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이준은 베오가에게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었다.
빨리 와도 모자랄 판국에 드워프보다 늦게 모습을 보인 것이다.
“괜찮습니다. 이유가 있었겠지요.”
금역에서 이루어지는 비밀대회의.
그란투스 대륙을 대표하는 이들이 참석하기로 했다.
“왕께서 고민이 많으신 바람에 죄송합니다.”
“결국 제로니아 왕은 안 왔네요.”
“면목이 없습니다. 대신 모든 권한을 제게 위임하셨으니 제가 대회의를 잘 마치겠습니다.”
제로니아 왕은 겁쟁이였다.
왕으로서 자질이 한참이나 부족했다.
의심과 질투도 많았다.
한마디로 못난 인간이다.
그러니 나라를 대표하는 자리에 베오가 영주를 대표로 보냈겠지.
인사하는 사이.
엘프족도 도착했다.
대장로와 사티아와 후계자인 엘루르였다.
“오랜만에 보는군요.”
사티아는 변한 이준의 기운을 알아봤다.
그의 몸속에 전속성이 다 들어 있었다.
아이덴 루블리스 때와 같은 느낌.
세상은 그의 중심으로 돌아갈 거라 확신했다.
“잘 지낸 걸로 보이네요.”
“당신 덕분입니다. 아, 그리고 회의는 잘 끝날 거예요.”
그녀는 예언가였다.
미래를 아는 엘프.
좋게 끝난다는 말에 이준이 웃었다.
“그래야지요.”
이준의 말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그는 아이덴 루블리스의 환생.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피를 흘리는 것도 서슴지 않았었다.
전생의 기억을 가진 그라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전해드릴 말이 있어요.”
“뭔데요?”
“당신의 주위에 인연이 보여요.”
“무슨 인연이요?”
“옛날부터 이어진 인연이라는 것만 알아요.”
“옛날의 기준이 어디까지죠?”
“전생의 인연이에요.”
그녀의 말에 이준의 눈이 커졌다.
‘파랑이인가?’
옛날부터 이어진 인연이라면 파랑이가 농후했다.
녀석은 전생과 현생 모두 자신의 앞에 나타났다.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으니.
다가올 인연은 파랑이가 아닐까.
“만나는 장소를 알 수 있을까요?”
“거기까진 몰라요.”
“아.”
모든 걸 아낌없이 주고 간 녀석.
말릴 틈도 없이 가버렸다.
너무 뜬금없는 모습을 한 채 정체를 완전히 숨겼다.
그래서 더욱 안타까웠다.
“기다려보세요. 곧 만날 겁니다.”
그녀의 말에 이준이 안심했다.
곧 만난다는 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리였으니까.
“감사합니다.”
이준이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하자.
대장로 사티아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대회의 장소로 안내해드려.”
“예.”
샤크로아가 사티아와 엘루르를 이끌고 사라졌다.
이준이 계속 손님을 맞이했다.
로에니아 제국의 새로운 황제와 크세레나 신성의 대주교도 왔다.
초대한 손님이 모두 도착하자.
박정연이 테구르를 찾았다.
“준아. 테구르는 아직이야?”
“바빠 죽겠는데 아직도 게이트에서 사투 중이야.”
테구르는 손님 맞이에 최적인 몬스터였다.
녀석을 대체할 몬스터를 찾았으나.
테구르만큼 비굴할 정도로 몸을 낮추는 몬스터가 없었다.
그래서 직접 손님을 마중한 것이다.
이곳은 이준 본인의 게이트였으니까.
“클리어하지 못한 적을 만난 게 아닐까?”
금역 소속 몬스터 중 많은 수가 돌아왔다.
여전히 게이트 공략에 나선 몬스터는 테구르가 속한 스케먼과 페어리 등이 있었다.
명령어를 안 바꿔놔서 테구르가 여전히 게이트를 공략하고 있는 거지만.
다른 몬스터가 타 게이트를 공략해 나갈 때.
테구르가 이끄는 스케먼은 고작 열 곳밖에 클리어하지 못했다.
“녀석도 블랙급 몬스터야 절대종을 만나도 잡는 게 가능한 능력을 지녔어. 게이트를 클리어하고 와야지. 아니면 다른 몬스터에게 서열이 밀릴 거야.”
테구르의 자리를 넘보는 몬스터는 무수히 많았다.
스케먼이 무려 3군단장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태생이 레드급 몬스터는 테구르를 인정하지 못했다.
불만이 쌓여 있는 그때.
게이트 소탕 명령이 내려졌다.
몬스터들은 이때다 싶어 최선을 다해 게이트를 클리어했다.
테구르의 자리를 넘보는 녀석들은 이미 돌아온 상태.
전 몬스터가 금역으로 귀환하면 그때부터 상벌이 열릴 터.
많은 수의 몬스터가 서열이 바뀔 것이다.
여태 많은 공을 세웠던 테구르도 예외는 아니었다.
몬스터의 서열은 오로지 강함에 의해 정해졌으니까.
어떤 게이트를 클리어했는지가 가장 중요했다.
“테구르라면 전투 경험도 많고 머리가 똑똑하니 잘 해내겠지.”
박정연은 테구르를 걱정하지 않았다.
처세술이 대단한 몬스터.
인간은 물론 지능이 뛰어난 몬스터보다 훨씬 똑똑했다.
어딜 가도 살아남을 몬스터가 바로 테구르였다.
아마 지금도 게이트를 클리어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있는 게 아닐까?
* * *
그 시각.
박정연이 예상했던 것처럼 테구르는 스케먼들과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모든 탄을 쏘아대도 꼼짝 안 한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찍!”
“흠….”
테구르의 눈이 거대한 웅덩이에 꽂혀 있었다.
그 안은 온통 검은색.
안으로 들어갔던 스케먼은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여길 건너야 보스 몬스터를 만날 수 있습니다, 찍!”
“아니야. 저 웅덩이가 보스 몬스터인 것 같아.”
“찌익!?”
“다리를 건너는 게 아니었습니까 찍?”
웅덩이 위에 있는 다리를 건너다가 얼마나 많은 스케먼이 죽었나.
밑으로 떨어진 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렇다는 건 목숨을 잃었다는 소리였다.
“찌이익!”
지금도 스케먼이 웅덩이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스케먼은 다리를 건너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저게 뭐냐?”
“무엇을 말입니까요, 찍?”
테구르가 웅덩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뎁쇼, 찍.”
테구르의 눈에만 보였다.
웅덩이 밑에 숨어 있는 탐욕의 괴물이.
아주 잠깐이지만 찰나의 순간에 모습을 드러내는 때는.
“알았다! 먹이를 먹을 때는 몸을 숨기지 못해. 모두 섬광탄 장착해.”
“옙, 찍!”
스케먼들이 섬광탄을 마력총에 장착했다.
다리를 건너던 스케먼이 아래로 떨어진 순간!
“발사!”
테구르가 명령을 내렸다.
수천 발의 섬광탄이 웅덩이를 향해 날아갔다.
펑 펑 펑!
섬광탄이 터지며 빛을 토해냈다.
암흑 속에 모습을 감췄던 괴물이 먹이를 먹기 위해 아가리를 벌리는 게 포착됐다.
“지금이다! 탄을 물감액으로 교체!”
훈련이 잘된 스케먼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탄을 교체했다.
“발사!”
테구르가 마력탄을 쏘자.
형광색 물감이 허공을 갈랐다.
스케먼들의 총도 일제히 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