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제3부 제79화
“사부님 졸려요.”
“한숨 자고 일어나면 끝나 있을 것이다.”
설극이 응급 처치를 해서 그런지.
이준의 안색이 한층 밝아지면서 졸음이 쏟아졌다.
완전히 감긴 이준의 눈꺼풀.
숨소리가 작게 들렸다.
설극은 이준을 바닥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그가 몸을 돌리자.
전륜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힘까지 준 거야? 제자를 끔찍이 아끼는 사부구만.”
전륜의 말대로 설극은 본인의 힘을 이준에게 기꺼이 넘겨주었다.
불안정한 기운이 잠잠해진 것도 이 때문이다.
설극의 살기가 전륜에게 쏟아졌다.
“잠깐 난 너랑 싸울 생각 없어.”
“그랬다면 내 제자를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쟤는 널 인계로 강림시키기 위한 미끼에 불과해. 정말 죽일 생각은 없었어. 너도 날 봐서 알잖아. 내가 네 제자를 죽이겠다고 마음먹었으면 벌써 목숨을 잃었다는 걸 말이야.”
전륜의 말은 설극에게 통하지 않았다.
앞으로 걸음을 옮기는 설극.
전륜이 인상을 찌푸렸다.
“주경아!”
설극의 걸음이 멈췄다.
그의 또 다른 약점은 바로 주경아였다.
“하아. 이제야 멈추네.”
하나!
잘린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는 걸 보아야만 했다.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지독히도 싸늘한 음성이었다.
“해보자는 거냐.”
설극의 태도에 전륜도 폭발하고 말았다.
흑암을 제거하려고 설극을 이용하긴 했지만 한 편으로는 고맙기도 했다.
둘로 나뉜 몸을 하나로 합쳐지게끔 해주었으니까.
“네가 먼저 걸어온 싸움이다.”
“말이 안 통하는 놈이야. 쉽게 지나갈 수 있는 일을 크게 만들고 있어.”
전륜의 기세가 폭발했다.
흑암의 힘을 흡수하더니.
보다 더 강력한 존재감을 보였다.
파천멸기와 겁화가 허공에서 충돌했다.
팽팽할 줄 알았던 기세가 한쪽으로 치우쳐졌다.
“제자에게 힘을 나눠줘서 기운이 없는 것이냐.”
전륜이 강한 것도 있었다.
그는 완전한 힘을 가지게 됐다.
신계의 정점, 신왕.
신 중 염라대왕과 같이 가장 오래 산 인물이었다.
수련해도 설극보다 억겁은 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곧 후회하게 될 것이다.”
설극이 역천을 드러냈다.
붉어진 그의 눈동자.
적안이 번쩍이더니.
검붉었던 파천멸기가 붉게 물들었다.
그 순간.
파천멸기가 불쑥 나타나 전륜을 후려쳤다.
쾅!
전륜의 겁화, 신왕기가 공격을 막았다.
“기 싸움은 재미없으니 근접전으로 가자.”
전륜이 땅을 찼다.
설극도 그를 향해 쇄도했다.
쿠웅!
지옥도와 무형창이 충돌했다.
주위로 충격의 여파가 몰아쳤다.
사방에서 빛이 번쩍였다.
설극과 전륜이 연신 부딪혔다.
쿵!
쿵쿵!
육중한 충돌음이 수십 차례나 일어났다.
지옥도의 강함에 버티지 못하고 부서진 무형창.
설극은 무기가 깨지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새로운 무형창을 만들어 공격했다.
“참 재밌어. 마선과 이준이 날 흥분시키더니 너 또한 날 즐겁게 해주고 있어.”
전륜은 미친놈처럼 지옥도를 휘둘렀다.
엄청난 속도의 도격이었다.
쾌도.
설극이 아니라면 받지 못할 만큼 빠르게 움직였다.
도의 잔상이 5초 뒤에나 사라질 정도였으니까.
전륜의 도격은 속도만 빠른 게 아니었다.
무겁고 강하기까지 했다.
무형창이 몇 번 부딪혀 보지도 못하고 깨지니.
얼마나 강하게 휘둘러지는지 알 수 있었다.
한데 설극의 표정은 처음 그대로였다.
차가운 얼굴.
당황하거나 다급함이 없었다.
이에 전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지옥도를 빠르게 휘두르면서 설극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유효타를 한 번도 날리지 못했어.’
설극의 하얀 무복이 그대로였다.
먼지만 묻어 있을 뿐.
도에 베인 흔적이 없었다.
‘천극자만큼 참 흥미로운 녀석이야.’
천극자 이후로 가장 재밌었다.
그 누가 신계의 정점인 자신과 동수를 이루겠나.
역사상 오직 천극자 뿐이었다.
그가 사라지니.
천극자가 남긴 후인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무료한 삶에 한 줄기 빛이 내려진 것.
그래서 설극이 마음에 들었다.
그로 인해 신계를 싹 엎을 수 있었으니까.
‘지금 마음껏 즐겨야겠어.’
흥이 오른 전륜은 자신이 가진 모든 걸 지옥도에 쏟아부었다.
* * *
설극과 전륜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싸웠다.
신들의 싸움.
인계가 버티지 못했다.
뒤늦게 나타난 염라대왕이 그란투스의 붕괴를 막았다.
원래라면 천계왕이 해야될 일.
공석이 된 상태라 지옥계의 왕인 염라대왕이 대신 결계를 만든 것이다.
“후욱…후욱….”
“…하아아….”
설극과 전륜의 얼굴에 피로가 가득했다.
무려 사흘 동안 싸웠다.
신이라도 지치는 건 당연했다.
숨을 고르던 설극이 먼저 입을 열었다.
“…후우욱 권능은 어디에 다… 두고 사용하지 않는 거냐.”
그의 질문에 전륜이 피식 웃었다.
“신왕의 율법을 사용하면 시시하잖아.”
흑암과 전륜, 둘로 나뉘었을 때는 권능을 사용하지 못했다.
완전한 힘이 아니니.
허락되지 않은 것.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흑암이 죽어 전륜이 신왕에 올랐으니.
권능이 허락됐다.
한데 전륜은 권능을 사용하지 않은 거다.
고작 시시하다는 이유로.
신왕의 권능은 신계의 율.
신계의 규칙을 어기거나 신왕에게 반기 든 신을 처단할 수 있었다.
설극은 신왕에게 반기를 든 존재.
지금 이 자리에서 벌을 가하는 게 가능했다.
“아아, 오해하지마. 권능을 사용해서 널 소멸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하니까.”
“내게 족쇄를 가하는 것은 가능하겠지.”
“흑암이 왜 널 죽이려 한지 알아? 네가 천극자의 힘을 이어받았기 때문이야. 신왕의 권능은 어떤 신에게도 통해야 하는데 천극자는 권능을 피해 갔거든.”
오직 무력으로만 징벌을 가할 수 있다는 소리.
설극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
“안 그래 염라? 그래서 네가 천극자를 어려워했잖아.”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 친우라 배려해준 것이다!”
어느새 나타난 염라대왕이 버럭 소리쳤다.
“네가 더 개소리하는 것 같은데? 신계의 율도 지키지 않고 천극자의 부탁을 들어준 게 몇 갠데. 여기서 쫙 읊어 봐?”
“크흠.”
염라대왕이 헛기침을 했다.
인정하는 표정.
전륜이 고개를 저었다.
다시 설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으로 부족해. 준이와 경아를 살려놓은 이유가 뭐지? 너도 염라대왕처럼 내게 족쇄를 가할 생각인가.”
“난 그런 야비한 짓 안 해.”
전륜의 대답에 염라대왕이 버럭 소리쳤다.
“네가 할 말은 아니다! 설극을 이용해서 흑암을 제거한 것도 다 네놈의 계획 아니냐. 그게 야비한 짓이 아니고 뭐란 말이야!”
“너처럼 약점을 쥐고 흔드는 짓은 안 하잖아.”
“이익!”
염라대왕이 발끈했지만 전륜은 그를 무시하고 설극에게 말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난 너와 싸울 생각 없어. 비무라면 모를까. 내가 네 소중한 이들을 살려준 건 딱 하나. 흑암과 썩어 빠진 신왕성을 무너뜨려 주었기 때문이야.”
“내가 직접하면 될 일 아닌가?”
“불가능해. 내가 흑암을 죽이면 신왕의 힘을 잃게 돼. 신왕성 소속도 마찬가지고.”
“네 손으로 부하를 죽인 것 같은데?”
“몇천 년 신왕성에 처박혀 있으면 될 일이야.”
“그러니까 난 네가 하지 못한 일을 처리해준 청소부였다는 소리군.”
“에이. 작게 은혜를 입었다고 하자. 상스럽게 청소부가 뭐냐.”
설극이 고개를 돌려 염라대왕을 보았다.
그의 눈빛을 읽은 염라대왕이 한숨을 쉬었다.
“이해하거라. 워낙 가벼운 놈이다.”
“순수하다고 해줘라. 아.”
전륜이 무언가를 떠올린 표정을 했다.
그리고 이내 입을 열었다.
“염라, 주경아의 목숨 간당간당하지 않아?”
“이런!”
염라대왕이 주경아의 수명을 보았다.
신계 명부에 적혀있는 숫자는 단 1일.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
“신왕기를 없애려면 사신기가 필요할 거야.”
전륜이 설극에게 친절히 가르쳐주었다.
“고맙다고 하진 않겠다. 애초에 너희들이 우릴 건드리지 않았으면 경아는 건강하게 잘살고 있었을 테니까.”
“그래. 대신 마선이 건강해지면 신왕성으로 와. 못 끝낸 싸움은 마무리 지어야지.”
전륜은 기대감이 가득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러지.”
설극의 대답에 전륜이 환하게 웃었다.
“염라. 인계 정리 좀 해줘. 난 삭신이 쑤셔서 못 움직이겠어.”
전륜은 인계의 일을 염라대왕에게 맡기고는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네가 벌인 짓을 왜 나한테 맡기는 것이냐!”
[위에서 까라면 까야지. 잔말이 많아.]
“전륜 이 개….”
[이제 체통을 버리게? 나야 언제든 환영이야.]
“다음에 만나면 가만두지 않겠다.”
[불만 있으면 신왕성으로 와.]
끝까지 한마디도 지지 않은 전륜이었다.
염라대왕은 부글거리는 마음을 붙잡고 엉망이 된 인계를 정리했다.
“본왕이 어쩌다가 천계놈의 영역까지 복구하는 팔자가 되었는지. 하아아.”
한숨을 푹 쉬는 염라대왕이었다.
* * *
설극은 이준을 데리고 4대 성지의 금역으로 왔다.
[큰 주인!]
흑염마조의 몸집이 작아지더니 설극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경아는?”
[혼원문에 있다.]
설극은 곧장 혼원문을 올랐다.
사신전 앞에는 주경아가 가부좌를 틀고 운공을 하고 있었다.
“경아!”
설극의 외침에 주경아의 눈꺼풀이 떠졌다.
“가가?”
그는 그녀를 덥석 껴안았다.
“숨…막혀요.”
“미안해. 경아가 다쳤다는 걸 늦게 알았어.”
“제가 숨긴 거니 미안해하지 마세요.”
“사부님. 재회는 나중에 나누셔요. 지금은 한시가 급하다고요.”
설극과 주경아의 애틋한 장면에 이준이 찬물을 끼얹었다.
“이 못난 제자가.”
설극의 눈이 활활 타올랐다.
좋은 분위기를 연출해주지는 못할망정.
되려 망치고 있으니 화딱지가 났다.
“아고고 갑자기 가슴이….”
사부의 눈총에 이준이 꾀병을 부렸다.
한데 상황이 너무 커졌다.
가슴에 난 큰 상처를 주경아가 봤기 때문.
안 그래도 신왕기로 인해 힘든데 이준의 상처를 보니 평정점이 흔들렸다.
“쿨럭쿨럭!”
주경아가 검은 피를 토해냈다.
창백한 혈색.
병색이 완연했다.
“괜찮으세요? 제가 금방 치료….”
“됐다.”
주경아가 이준의 손을 뿌리쳤다.
“당장 치료받으셔야 해요!”
“경아. 왜 그러는 거야. 지금 아니면 늦어.”
“가가. 제가 지옥계로 떠나기 전 뭐라고 했나요?”
“…끝까지 지킬 거라 했어.”
“그런데 애가 이렇게 다치는 동안 뭐 하셨어요.”
“그건….”
설극은 그녀의 상처를 치료하려고 신왕성에 쳐들어갔다.
그에게 있어서 그녀가 1순위였으니까.
“저는 괜찮아요.”
“넌 가만히 있거라. 이건 나와 네 사부의 일이다.”
단호한 목소리에 이준이 뒷머리를 긁었다.
“가가께서 이러시면 제가 어떻게 눈감을 수 있어요.”
“경아! 무슨 말을 그리 심하게 해. 절대 죽지 않을 거야.”
“맞아요. 제가 사모님을 살려드릴 수 있어요.”
“다친 네게 어찌 치료를 받는단 말이냐. 그럴 수 없다.”
주경아가 격하게 거부하자.
이준이 강제로 그녀의 등에 손을 얹었다.
“무례를 용서해주세요.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위험해요.”
“너? 윽.”
주경아는 이준의 사신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나 사신기가 보통의 기운인가.
그녀가 받아들이고 말고를 결정하는 게 아니었다.
사신기는 오직 이준의 뜻에만 따랐다.
그녀의 마기를 뚫고 내부로 들어간 사신기.
숨어 있는 녀석을 찾으며 돌아다녔다.
[어떠하냐?]
설극의 전음이었다.
[꼭꼭 숨었어요.]
[사신기로 자극해 보거라.]
[예.]
이준은 사신기를 전신으로 퍼트렸다.
그녀의 내부가 사신기로 가득 차자.
“아프실 거예요.”
사신기를 광포하게 풀어놓았다.
사신기는 그녀의 내부를 제집인 양 돌아다녔다.
외부의 기운이 멋대로 행동하니.
그녀의 몸을 좀먹고 있던 신왕기가 튀어나왔다.
마치 남의 집에 쳐들어와서 왜 행패를 부리냐고 항의하는 듯했다.
[찾았어요!]
[한꺼번에 깔끔히 처리하거라.]
[네.]
이준은 풀어주었던 사신기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사신기의 목표는 오직 신왕기뿐이었다.
쿵!
주경아의 몸이 들썩였다.
“읍!”
신음이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기혈이 터지는 충격이었다.
골까지 흔들릴 정도.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시작에 불과했다.
[모조리 먹어 치워.]
이준의 명령에 사신기가 거칠게 신왕기를 흡수했다.
주경아의 몸이 여러번 들썩였다.
뾰족한 비명을 지를 만도 하지만.
고통을 꿋꿋히 참아냈다.
‘정신력이 대단하시네. 이 정도 충격이면 나도 침을 질질 흘리면서 몸부림쳤을 건데….’
그는 주경아의 뒷모습을 보면서 연신 감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