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제3부 75화
이준의 눈에 보이는 선명한 선.
무당의 복장을 한 남자의 오른쪽 손목이 눈에 들어왔다.
사신기를 이용해 팔을 휘둘렀다.
푸확-
그 순간 태극의 손목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태극!”
“조심하시게!”
태극은 멀뚱히 서 있다가 이내 비명을 질렀다.
“크아악!”
“천극자의 사신기네!”
“빌어먹을!”
그들이 산개했다.
가까이 붙어 있다가는 모두 한꺼번에 공격당할지도 몰라 흩어졌다.
“온다!”
아수라가 소리쳤다.
이준의 팔이 다시 움직였다.
무형의 함이 허공을 갈랐다.
팔을 휘두른 모습을 보지 않았다면 공격했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것이다.
공간을 압축하며 날아오는 힘.
아수라가 핏빛 강기로 사신기를 막았다.
쿵!
“윽.”
아수라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들렸다.
육중했다.
전력으로 막았으나.
팔의 뼈가 그대로 부서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는 신왕의 최측근 중 한 명.
쉽게 당해줄 수 없었다.
팡-
아수라가 결국 사신기를 무력화시켰다.
하나 그의 얼굴은 좋지 못했다.
‘사신기가 몸에 들어와서 신왕기를 헤집어놓고 있다.’
사신기는 지독한 기운이었다.
한번 몸에 침투하면 사라지기 전까지 기혈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다.
심지어 내상을 치료하는 걸 방해했다.
신왕기와 똑같은 효과.
내공을 좀먹는 건 사신기가 한 수 위였다.
“저놈이 사용하는 건 진짜 사신기요. 방심하면 안 되오.”
아수라가 경고했다.
방심하다간 당하는 건 자신들.
인간이라고 무시하다가는 골로 갔다.
쾅!
이준이 진각을 펼쳤다.
땅이 거미줄로 갈라지면서 사신기가 위로 뿜어졌다.
“하앗!”
북명이 소리치면서 사신기를 두 손으로 찢어발겼다.
그는 마교의 북명신공을 익혔던 무인.
살아생전에는 천마라고 불리기도 했던 자였다.
천마신공이 아닌, 북명신공으로 최초로 천마란 이름을 계승한 무인.
그가 이준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북명의 손에는 검은 뇌기가 모여 있었다.
너무도 강력한 나머지.
대기가 여러 차원으로 갈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수라는 초대 혈마.
마교와 쌍벽을 이룬 단체를 만들어 무림을 일통했던 인물이었다.
아수라의 핏빛 강기가 이준을 향해 쏘아졌다.
반야와 태극도 동시에 공격을 가했다.
봉에선 황금빛 서기가.
검에선 현묘한 기운이 뿜어지며 이준을 양단했다.
“지금의 상태라면 사부님의 무공도 사용할 수 있어!”
이준이 사신기를 극성으로 운용했다.
몸에서 뿜어진 사신기가 주위로 순식간에 퍼졌다.
일대를 점령한 회색의 기운.
“파천멸진.”
이준의 중얼거림이 끝나자.
세상이 회색으로 뒤덮였다.
신왕사절이 최선을 다한 공격은 허무하게 무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들을 기다린 건 다름 아닌 하나의 공간이었다.
“아수라! 어디 있는 겐가. 반야와 태극은 내 말이 들리는가?”
북명이 다른 이들을 애타게 불렀다.
하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수라도 똑같았다.
“북명! 반야! 태극! 날 못 느끼는 것이오?”
“아무래도 저흰 진법에 빠진 듯하오.”
반야가 합장하며 말했다.
득실거리는 마기에 불경을 외웠지만.
마기는 더욱 그를 괴롭혔다.
“허, 지독한 사기올시다.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반야는 마기에 대항해 불기를 뿜어냈다.
곤봉에서 황금빛 서기가 강렬하게 빛날 때쯤!
“방장 사형.”
반야를 부르는 목소리가 나타났다.
“현장?”
“당신은 여전하십니다.”
“무슨 소리인가.”
“제 뒤를 보십시오. 이리 많은 사제를 지옥으로 보내놓고 잠이 오신단 말입니까!”
현장이란 스님의 뒤에 무수히 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모두 소림의 제자들.
살아있는 건 반야뿐이었다.
“아니네, 난 소림을 위해….”
“위선입니다!”
“…최선을 다했어.”
“방장 사형이 밉습니다.”
“사제, 내 말 좀 들으시게!”
“우릴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방장 사형이….”
“아니네!”
반야가 머리를 붙잡고 괴로워했다.
끝내 고래고래 악을 질렀다.
파천멸진은 상대의 모든 걸 통제했다.
기억, 마음, 행동.
시전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기억을 이끄는 게 가능했다.
마기가 상대방의 뇌를 장악하는 게 파천멸진의 최대 장점이었으니까.
일반 환각이나 환영 따위가 아니었다.
기억의 완전한 조작.
없었던 일도 있었던 일처럼 만드는 게 바로 파천멸진의 위력이었다.
모두가 파천멸진에 빠져 기억을 조작당했다.
* * *
“허억허억…”
북명의 얼굴은 피로로 가득했다.
전신이 피로 얼룩진 상태였다.
푹-
서걱!
그를 끊임없이 공격하는 자들.
무림맹도 아닌 신교의 마인들이었다.
죽여도 죽여도 끝없이 몰려와 공격했다.
“으득. 너희가 날 백날 죽이려고 해 보거라. 난 절대 죽지 않아!”
북명이 강기를 터트렸다.
검은 뇌기가 주위로 퍼지면서 달려드는 마인들을 전부 격살했다.
팔, 다리가 바닥에 이리저리 떨어져 있었다.
상체를 잃거나 하체가 분리된 시체 또한 많았다.
“허억… 허억….”
그러던 그때.
그를 향해 걸어오는 한 남자.
이준이었다.
“네가… 감히 본좌에게 환각을 건 것이냐.”
“기억을 조작했을 뿐이야.”
“이주우우운!”
북명이 고함을 질렀다.
기가 주위로 소용돌이쳤다.
검은 뇌전이 바닥을 향해 떨어졌다.
이준의 바로 옆.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여긴 내 영역이라는 걸 잊었나?”
이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하늘에서 낙뢰가 떨어졌다.
정확히 북명을 강타했다.
“커헉!”
그가 무릎을 꿇으며 쓰러졌다.
“억울해하지 마. 다른 놈들도 죽을 거니까.”
이준이 북명의 목을 끊어놓으려는 순간!
‘누구… 지?’
앞쪽에서 강렬한 기운이 느껴졌다.
자신이 있는 쪽으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전륜?’
전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무엇이 좋은지 히죽 웃고 있었다.
마선과 싸울 때는 검이었는데 도를 어깨에 걸치고 있는 모습.
처음 보았을 때와는 다른, 너무도 위험한 기운이 풍겼다.
전륜이 도를 바닥에 꽂았다.
퍽-
그러자 파천멸진이 너무도 쉽게 파훼됐다.
파천멸진에 고전을 면치 못한 신왕사절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억… 허억…”
“쿨럭쿨럭!”
모두가 피투성이였다.
이 중에서 가장 약한 태극은 이미 목숨을 잃은 상태.
반야도 숨이 희미하게 붙어 있었다.
그나마 북명과 아수라가 악착같이 버텼다.
“병신들. 자신만만하게 내려갔으면서 당하고 앉아 있어.”
“전… 륜 허억… 신왕께서 내려 보냈는…가?”
“흑암은 여길 신경 쓰고 있을 입장이 아니야. 직접 파천혈신을 만나고 있거든. 내 의지로 직접 이준을 보러 온 거다.”
전륜이 이준을 보며 말했다.
일부러 파천혈신의 소식을 전해 준 것.
이준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곧 끝나겠어.”
“사부가 걱정 안 돼?”
“걱정할 사람을 걱정해야지. 사부가 아니라 너네 대장이나 걱정해라.”
“믿음이 대단하구만.”
전륜의 얼굴에는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의 표정을 본 이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신왕을 믿는 건가?’
자신처럼 저들도 신왕에 대한 믿음이 가득한 거라 생각했다.
“근데 말이야. 내가 이 싸움에 합류하면 네가 이길 확률은 어떻게 될까?”
전륜은 즐겁다는 듯.
이준에게 질문을 했다.
“…….”
이준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전륜이 끼는 순간 불리해지는 건 자신이었다.
‘저자는… 가늠이 안 가.’
북명이나 아수라는 이길 확신이 있었다.
저들이 어느 경지에 있든.
얼마나 강하든.
질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한데 전륜은 달랐다.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긴장이 들었다.
머리에 경종이 울린 것.
위험한 인물이었다.
‘내가 강해진 것처럼 저자도 강해졌나?’
처음 보았을 때와는 전혀 딴판.
보고만 있어도 손에 땀을 쥐게 했다.
그가 자신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너무 긴장하지 마. 그냥 질문이야.”
“적과 시시껄렁한 대화를 나눌 생각은 없어.”
“난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전륜이 순식간에 이준 앞에 나타났다.
퇴보를 밟아 뒤로 몸을 빼려 했으나.
전륜의 손이 먼저 이준의 어깨에 닿았다.
“널 죽일 생각이었으면 진즉에 죽였겠지. 그래 안 그래?”
전륜은 마치 어린애처럼 너무 해맑았다.
딱딱하게 굳은 이준의 몸.
움직이려 했지만 옆에서 소름 돋는 목소리가 들렸다.
“괜히 객기 부리지 마. 너 그러다 진짜 죽어. 소중한 사람들 계속 보고 싶지 않아?”
몸에 난 털이 바짝 솟았다.
등줄을 타고 내린 땀.
전륜의 음성을 듣고 오싹해졌다.
“전륜, 뭐 하는 건가. 어서 죽이시게!”
“신왕의 명을 수행하시오!”
북명과 아수라가 소리쳤다.
저들의 목소리에도 전륜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쌍욕을 퍼부었다.
“좀 닥쳐. 버러지 새끼들아. 인간에게 졌으면 고개를 처박고 반성을 해야지. 어디서 명령질이야.”
“무, 무슨!?”
“전륜, 미쳤소!”
아수라의 얼굴이 붉어졌다.
자신을 패퇴시킨 인간 앞에서 못 볼 꼴을 보여주니.
민망함이 전신을 감쌌다.
“저 새끼가.”
전륜은 어느새 아수라의 앞에 나타났다.
“헉!”
“내가 아직도 전륜으로 보이냐.”
“큭.”
아수라의 몸이 허공으로 천천히 올라갔다.
발버둥 쳤다.
숨이 막혀와 죽을 것만 같았다.
“내가 경고했잖아. 수틀리면 죽여버리겠다고.”
북명은 전륜의 무위에 경악했다.
단숨에 제압당한 아수라.
북명조차 전륜의 움직임을 보지 못했다.
뿐인가.
그가 현재 발산하는 기운은 신왕급이었다.
“어찌 신왕의 힘을 전륜이…”
전륜은 신왕의 그림자일 뿐이다.
분신.
그래서 신왕성의 서열도 중간급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한데 지금은 여태 보여줬던 힘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었다.
“내가 멋대로인데 흑암이 가만히 있었던 이유가 뭘 거라 생각했어?”
“서, 설마!?”
북명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그저 분신이라 생각했다.
쓰러지면 버리는 패라 여겼다.
그런데 아니었다.
“맞아. 내가 흑암이고 흑암이 나야. 우린 한 몸이면서 달라. 흑암은 악 그 자체라 신왕성 밖으로 나오지 못하지만 난 아니거든. 자유롭게 4대 신계와 인계를 돌아다닐 수 있어.”
“…천극자… 때문…입니까?”
북명은 저도 모르는 사이 전륜에게 존댓말을 했다.
“흑암에게 천극자는 자신을 가둔 원수지만 나는 딱히 녀석에게 악감정은 없어.”
“음…”
북명의 침음이 깊어졌다.
사실을 알고 나니 머리가 복잡해졌다.
궁금증도 생겼다.
“여태껏 힘을 드러내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재밌잖아. 날 그림자라고 무시하는 녀석들을 속이는 재미. 무료한 삶에 소소한 행복이라 해두자.”
“커, 커헉… 컥컥.”
아수라가 땅에 쓰러지면서 숨을 토해냈다.
핼쑥해진 얼굴.
두려움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북명이 전륜에게 조심히 물었다.
“이준은 살려두실 생각이십니까?”
“죽여서 뭐 해. 내 목적은 다른 것에 있어.”
전륜이 이준을 보며 재차 웃었다.
그리곤 도를 겨눠 말했다.
“너 나랑 비무 할래?”
“무슨 짓이야?”
“네가 좀 다쳐야 하거든. 죽이진 않을게.”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내 연극에 놀아주면 마선을 살려줄지도 모르지.”
“적과 협상 따위는 하지 않아.”
“누가 파천혈신의 제자 아니랄까봐. 네가 협조 안 하면 내가 마선을 죽일지도 모르는데?”
이준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상대는 진심.
장난 따위가 아니었다.
‘내가 막을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이토록 무기력한 건 오랜만이야.’
“연극만 어울려주면 쉬운데 무얼 고민해. 너한테 해가 가는 건 아니야.”
“좋아. 어울려주지.”
“잘 생각했어. 너한테도 꽤 좋은 제안일걸. 어쩌면 네 사부도 다시 만날 수도 있어.”
“두루뭉술하게 말하지 말고 제대로 말해.”
“여기까지. 너무 많은 걸 알려고 하지 마.”
전륜이 입을 다물었다.
궁금증을 유발하는 악취미를 가졌다.
“약속은 지켜.”
“나 전륜이야.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대단한 신이거든.”
전륜이 기수식을 취했다.
이준과 비무를 하려는 이유는 단 하나.
이준이 상처를 크게 입는다면 분명 흑암이 파천혈신에게 알릴 터다.
파천혈신은 흑암을 죽이는 것과 인계로 강림하는 것 중 하나를 택할 것이다.
‘흑암은 파천혈신이 이준을 구하기 위해 인계로 갈 거라 생각하겠지만 눈앞의 흑암부터 죽일 거야. 타협은 설극과 맞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