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제3부 70화
전대왕들이 모여 있는 신왕성의 대전은 조용했다.
믿었던 수성과 색욕이 죽으니.
그제야 심각성을 느낀 것이다.
“그분의 말이 맞았군….”
“파천혈신을 얕보면 안 될 듯싶소.”
“허허, 언제 이리 강해졌을꼬.”
“이제 어쩝니까?”
“수성과 색욕도 쓰러졌소. 그들보도 서열이 높은 이들이 나가야하지 않겠소?”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 강한 전대 왕이 나가야지만 해결될 일이었다.
그때였다.
안경을 쓴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도 파천혈신에게 뚫린다면 신왕께서 대노하실 겁니다. 이참에 오절만 빼고 전부 나가는 게 옳을 듯 합니다.”
신왕오절.
이름 그대로 신왕을 제외하고 가장 강한 다섯 명이었다.
“그건 아니 될 말이오.”
“지금 파천혈신 하나를 상대로 신왕성 전부가 나선단 말입니까? 수치입니다.”
“나가서 패배할지언정 신왕도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격렬한 반대 의견이 나왔다.
신왕오절을 뺀 나머지가 설극을 막으러 나간다는 건 즉.
신왕성의 전력 오할에 해당했다.
안 그래도 하나를 상대로 합공하는 것도 치욕스러운 상황인데.
전부가 나선다?
신계 생활을 통틀어 가장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신왕오절 중 수좌에 있는 북명이 말했다.
“그렇게 해.”
“북명!”
“이건 아닙니다.”
“곧 전륜도 합류하지 않습니까.”
“차라리 내가 전륜과 합공해서 파천혈신을 물리치겠소.”
하나 북명은 단호히 말했다.
“이번으로 끝내.”
다시 한번 반박하려 했지만.
지그시 보는 북명의 눈에 의해 막혔다.
입을 열었다간 싸우지도 못하고 이 자리에서 죽을 것만 같았으니까.
신왕을 제외하고서는 가장 강한 전 대왕이 북명이었다.
신왕성의 일을 전부 총괄하는 자.
신왕의 오른팔인 북명의 말은 곧 법이었다.
그가 이곳에 누군가를 죽인다 하여도 신왕은 나무라지 않을 것이다.
이 사실을 알기에 북명의 말을 거역하지 못했다.
“가라. 지고 돌아온다면 내게 죽을 것이다.”
신왕오절을 제외한 모든 전대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대전을 나갔다.
입을 다물고 있던 가면 쓴 남자가 말했다.
“저놈들의 말처럼 과한 처사 아니오?”
“아수라. 내 결정이 아니네.”
“신왕의 결정이오?”
“그렇다네.”
“그만큼 파천혈신이 경계 된다는 소린데….”
가면 남자 아수라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렇게 높이 평가한 자는 천극자 말고 없었다.
신왕은 그 제자 또한 높이 평가하고 있으니.
얼마나 두 사제의 무공이 위험한지를 깨달았다.
북명은 고개를 돌려 하얀색과 검은색이 섞인 도포를 입은 남자를 불렀다.
“자하.”
“말씀하시오.”
“자네가 가서 그분의 말을 전해주게.”
“나도 가서 싸우라는 말이오?”
자하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신왕오절 중에 가장 밑에 있지만.
엄연히 신왕의 최측근이었다.
한데 전대 왕들과 같이 가라는 소리에 기분이 언짢아진 것이다.
자하의 반응에 북명이 고개를 저었다.
“혹시나 전대 왕들이 파천혈신에게 패한다면 그때 나서서 그분의 말을 전하기만 하라는 말일세.”
“무엇을 말이오.”
“그건.”
북명이 입을 벙끗거렸다.
자하만이 들리게끔 전음을 보냈다.
북명의 목소리가 들릴수록 자하의 입매가 비틀어졌다.
“진작에 이유부터 말해 주시지 그랬소. 지켜보고 오겠소이다.”
자하가 자리에서 냉큼 일어나더니 대전을 나섰다.
“무슨 말을 했기에 자하가 저런 반응을 보이오?”
“곧 알게 될 것이네. 아주 재밌는 일이 벌어질 게야.”
북명 또한 자하와 마찬가지로 얼굴에 미소가 천천히 번졌다.
* * *
설극은 신왕성의 내부를 걷고 있었다.
일반적인 성으로 착각하면 큰 오산.
신왕성의 내부는 미로였다.
갔던 길을 또 가는 걸 반복했다.
결계를 깨부쉈던 것처럼 힘으로 벽을 무너트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네놈들이 늦게 나올수록 신왕성은 빠르게 사라질 것이다.”
설극의 양손에 파천멸기가 회오리치면서 몰려들었다.
강맹한 기류의 파동에 신왕성이 휘청였다.
양손이 서서히 서로를 향해 다가가자.
푸스스-
가로막은 벽이 가루로 변했다.
원래라면 무너진 벽은 다시 만들어지는 게 정상.
한데 어쩐 일인지 벽이 생성되지 않았다.
파천멸기가 신왕성에 설치된 기관진식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앞을 가로막는 벽이 전부 가루로 되어갈 때쯤.
“멈춰라!”
“그 사이에 아주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았구만.”
각양각색의 복장을 입은 이들이 나타났다.
그 숫자는 대략 서른 명이었다.
그중 절반은 수성과 색욕보다 강했다.
전대 왕들이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설극은 동작을 멈추지 않았다.
“무공.”
짧은 중얼거림이 끝남과 동시에 세상의 색이 사라졌다.
전대 왕들의 움직임도 느릿.
설극만이 제대로 행동할 수 있었다.
양손에 모인 파천멸기가 하나로 합쳐진 순간.
빛이 세상을 감싸면서 터져나갔다.
콰아아앙!
거대한 폭음이 울렸다.
먼지가 피어올랐다.
시야가 가려졌다.
“쿨럭쿨럭!”
설극이 펼친 패천기공의 일공, 무공을 피한 이들이 기침을 냈다.
그들의 귀에 지옥에서나 들릴 법한 차가운 목소리가 맴돌았다.
“신왕이 아니라 또 너희들이냐.”
기침을 하던 천계 출신의 왕이 텔레포트로 몸을 빼려 했지만.
“마법이 안 돼!?”
텔레포트를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러자 결과는 참혹했다.
설극이 그의 목을 우악스럽게 잡았다.
콰드득!
목뼈를 부러트린 게 아니었다.
파천멸기를 이용해 상대의 몸에 있는 뼈는 모조리 부숴버렸다.
설극이 손을 놓았다.
바닥에 힘없이 쓰러진 천계 출신 전대 왕.
그의 머릴 발로 밟아버렸다.
퍼석!
피와 뇌수가 주위로 퍼졌다.
설극은 너무도 쉽게 한 명의 전대왕을 처리했다.
그리고 다시 움직였다.
바람 소리가 들렸다.
“커헉!”
신음이 간간이 나왔다.
파육음과 살이 베이는 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어디에 숨어서 공격하는 거야! 정정당당히 나와 싸우자.”
검은 날개를 지닌 마계의 전대 왕이 소리치니.
그의 뒤에서 설극의 음성이 들렸다.
“마계 쓰레기가 그딴 소릴 지껄이니 우습군.”
설극이 그의 머리를 붙잡고는 그대로 손에 힘을 주었다.
“아아악!”
악력에 의해 두개골이 박살 났다.
그도 모자라 종이라도 된 듯.
아무렇게나 구겨버렸다.
“네 이노오오옴!”
옆에서 거대한 도를 지닌 노인이 튀어나왔으나.
퍼억-
도를 내려치지도 못하고 뛴 그 상태로 상체가 사라졌다.
곳곳에서 비명이 들리자 안 되겠다 싶어 소리치는 전대 왕들.
“먼지! 먼지를 날려버려!”
거센 바람이 주위를 휩쓸었다.
먼지가 사라지니.
그 짧은 시간에 있었던 참상이 눈에 들어왔다.
“마, 맙소사!”
“이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살아남은 전대왕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참상은 충격적이었다.
기괴한 자세로 틀어져 죽은 자가 있는 반면.
상체와 하체가 분리된 자.
독에 중독된 듯.
피부가 검게 변해 경기를 일으키고 있는 자 등.
몸과 분리된 팔, 다리가 곳곳에 있었다.
가장 놀라운 건.
무려 절반의 인원이 소멸했다는 것이다.
너무도 충격적인 결과.
좀처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변성!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도 생각 중이오.”
이곳에서 가장 강한 자가 변성이었다.
지옥계 출신의 전대 왕.
당황한 모두가 그만을 보았다.
“아무래도 최선을 다해 합공을 해야겠소. 모두 마음을 다잡으시오!”
변성이 동요를 빠르게 수습해갔다.
그러던 그때였다.
“덜떨어진 새끼들. 애새끼 하나에 쩔쩔매고 있어.”
“전륜!”
설극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있던 염라대왕이 소리쳤다.
* * *
새로 나타난 남자는 지옥계 출신 전륜이었다.
그가 설극이 있는 곳으로 뛰어내렸다.
“와, 너 세다? 인계에 있는 마선도 강한데 너도 장난 아니야.”
그의 말에 설극의 얼굴에 균열이 일어났다.
“무슨 생각으로 경아를 살려뒀지?”
“그냥. 변덕이라고 해두자. 성장하는 게 재밌었거든. 오랜만에 인계에서 흥미로웠어.”
전륜은 바로 귀환하지 않고 주경아를 죽이고 돌아올 수도 있었다.
하나 그냥 귀환했다.
주경아와의 싸움을 멈춘 채 말이다.
설극은 이런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고작 흥미 때문에?”
“나에겐 가장 중요한 거야. 아참. 너랑은 이따가 대화하자. 저기 내 친우랑 먼저 이야기해야 해. 안 그러면 나한테 개지랄을 할 거거든.”
전륜은 전대 왕들이 죽은 건 개의치 않아 했다.
마치 자기와는 상관이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래서일까.
“전륜! 장난칠 때가 아니오. 저놈에게 벌써 절반이나 당했소이다.”
“맞습니다. 이러다가 그분께서 실망을 할까 두렵습니다.”
“우릴 도와 신왕성에 반기를 든 놈들을 처치하십시다.”
살아남은 이들의 말에 염라대왕에게 걸어가던 전륜이 멈춰 섰다.
뒤를 돌아본 그가 입을 열었다.
“이 쓰레기들이 누구에게 말을 거는 거냐. 능력도 없는 것들이 자리만 차지하는 꼴이라니. 다 죽여버릴까보다.”
전륜의 호통에 변성을 포함한 모두가 자라목이 되었다.
이상했다.
전륜은 신왕성에서도 중간급 서열.
서열로는 변성이 더 높은데 전륜에게 잔뜩 쫄아있는 게 아닌가.
설극은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의아함을 느꼈다.
전륜은 설극이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을 보곤 빙그레 웃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얼굴이랄까.
전륜이 설극을 지나쳐 염라대왕에게로 갔다.
“오랜만에 얼굴 보지 염왕?”
“네놈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
“천극자가 소멸했잖아. 놈 때문에 신왕성이 너무 위축되어 있었어. 저 봐. 저런 떨거지들이 신왕성에서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으니 발전이 없어.”
“또 똑같은 과오를 되풀이할 생각이냐.”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전보다는 우리가 이길 확률이 높아. 너도 알지 않아?”
“천극자가 소멸됐어도 설극이 남아있다. 저 녀석을 무시하지 않는 게 좋아.”
“난 쟤 무시 안 해. 여기에 있는 모든 놈이 다 덤벼도 쟤 하나를 못 잡는데 무시할 리가. 그런데 말이야, 염왕.”
전륜이 염라대왕을 보고 히죽였다.
“저놈이 이곳에 온 이유를 난 알고 있거든.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구나. 악취미가 여전해.”
“네가 나와 안 어울려줘서 그렇지. 새로운 자극이 필요해.”
말하는 전륜의 눈동자에 광기가 가득했다.
구천옥의 광기와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그리고 수백 년이 지나면 모를까 현재로서는 신왕성이 위에 있어.”
“후우우. 이야기를 들을수록 네 편을 들어줄 수가 없다.”
“어차피 파천혈신의 뒤에 설 거면서 날 생각하는 척은.”
“이대로 지낼 생각은 추호도 없느냐.”
“불가. 세상을 절멸시킬 거야. 그래야지만 세상이 새롭게 재편될 거니까. 지금은 너무 썩었어. 인간은 자기 이득을 챙기려고 동료를 죽이는 것도 서슴지 않아 해. 고대 시대보다 더 악랄해졌어. 내가 바라는 건 이게 아니야.”
듣고 있던 염라대왕이 헛웃음을 쳤다.
“흥. 네가 할 말은 아닌 듯싶다. 너 또한 신왕의 지위를 잃을까봐 천극자를 친 게 아니냐.”
“부정은 안 할게. 그런데 난 적어도 인과율은 철저하게 지켰어. 천극자는 신선계에 오르기 전에 인과율을 아주 엉망으로 만들어놨지. 그게 현시대까지 이어져 왔고 말이야.”
“음.”
염라대왕은 반박하지 못했다.
천극자가 인과율을 어기는 걸 눈감아 준게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심지어 4대 왕 모두 인과율을 어그러뜨리는 데 동조하게 만들었다.
이를 전륜은 두고만 봤다.
어디까지 하는지 보려고 말이다.
전륜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누가 더 잘못했냐고 따지자면 천극자 그놈이 나보다 더 잘못했다. 네 생각도 그렇지?”
염라대왕이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또한 맞다. 허나! 이 자리에 있으니 다른 시야가 보이더구나. 인과율에 관해서 유연함이 없다면 더 큰 재앙이 몰려올 수도 있다는 걸 말이다.”
“궤변도 정성껏 늘어놓고 있어. 그렇게 저 사제 지간이 좋냐?”
“난 어디까지나 좀 더 나은 방향을 선택할 뿐이다.”
“그래서 스스로 금제까지 했던 힘을 풀고 이곳 신왕성까지 병력을 이끌고 오셨다? 나와의 약속은 아주 똥 통에 처박아 놨어.”
“미안하게 됐다.”
“사과하지 마. 안 해도 돼. 어차피 너희 다 여기서 묻힐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