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제3부 68화
“크윽… 어떤 자식이!”
거벽이 가슴을 부여잡은 채 일어났다.
그의 눈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시뻘건 눈을 번들거리고 있었다.
“파천혈신!”
거벽이 기세를 피웠다.
주위 안개가 요동쳤다.
“겁도 없이 정말로 신왕성에 쳐들어오다니. 내가 네놈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다.”
거벽은 조금 전에 당했던 일을 까맣게 잊은 듯했다.
단 한방에 나가떨어졌음에도 본인이 설극의 위에 서 있는 줄 착각하고 있었다.
거벽이 설극에게 쇄도하려는데 설극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 같은 찌끄레기 상대할 시간 없다. 신왕 나오라고 해.”
“무, 뭐!? 찌끄레기? 감히 네깟 놈이 날 무시한단 말이냐!”
거벽의 근육이 팽창했다.
거대한 몸이 더욱 커졌다.
엄청난 위압감을 자랑하는 거벽.
거대한 산이 버젓이 서 있는 느낌이었다.
하나 설극은 도리어 언짢아했다.
눈 옆 근육이 실룩였다.
이를 본 염라대왕이 설극을 말렸다.
“네가 나선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경아가 당했소. 지금 나보고 참으라고?”
설극의 몸에서 파천멸기가 치솟았다.
파멸적인 패기였다.
힘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있었다.
심지어 패기는 줄어들 생각을 안 하고 커져만 갔다.
“헉!”
설극의 기운에 거벽이 화들짝 놀랐다.
신왕성이 측정한 무력과는 전혀 달랐다.
피부가 따가웠다.
살을 에는 기세에 거벽이 당황해했다.
“날 말리지 마시오. 우릴 배려해준 건 고맙게 생각하고 있소. 하지만!”
쿵.
대기가 진동했다.
무거워지는 공기.
이곳에 있는 모두가 설극의 기세에 신음해야 했다.
“말린다면 당신도 내 적이 될 것이오.”
설극의 광오한 말에 보다 못한 거벽이 움직였다.
찍어누르는 기세를 무시하고 앞으로 튀어 나갔다.
“나는 안 보인단 말이냐!”
거벽의 건틀릿에 신성력이 어렸다.
황금빛이 주먹을 감쌌다.
주먹이 뻗을 때마다 차원이 찢어져 갔다.
공기를 넘어 차원조차도 가르는 공격.
빗맞기만 해도 사망이었다.
“널 죽이면 신왕이 관심을 가질지 모르겠군.”
설극의 눈이 번들거렸다.
살기가 거벽을 휘감았다.
그 모습에 염라대왕이 소리쳤다.
“안 돼! 여긴 내게 맡기고 넌 물러가거라. 기다리고 있으면 좋은 소식을 전해주겠다!”
하지만 설극은 아무것도 듣지 않았다.
“죽어라.”
그의 짧은 음성이 들렸다.
빠르게 쇄도하던 거벽의 몸이 서서히 느려졌다.
이내 신형이 멈춰 섰다.
“응?”
거벽은 영문을 몰라했다.
왜 자신이 멈춰 섰는지.
주먹에 가득 담겨 있던 신성력이 어디 갔는지.
의문이었다.
설극이 거벽의 옆을 지나쳤다.
“나를 두고 어딜 가느냐!”
거벽의 외침에도 그는 무시했다.
“감히!”
거벽이 몸을 돌려 무방비한 설극의 뒤를 치려는 순간!
“…내가 왜 이러지?”
몸에서 힘이 쫙 빠졌다.
마치 수분이 부족한 느낌이었다.
그뿐인가.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이제는 세상이 기울어져만 갔다.
털썩!
바닥으로 쓰러진 거벽.
설극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졌다.
곁으로 염라대왕이 다가왔다.
“그러게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네놈은 설극을 이기지 못한다고.”
“설마!?”
“넌 설극에게 죽었다.”
“말도 안….”
거벽이 눈을 크게 떴다.
말을 다 끝맺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바닥을 적시는 흥건한 피.
파천멸기가 거벽의 오장육부는 물론.
사지를 전부 끊어놓은 것이다.
굉장히 잔인한 손속이었다.
거벽의 몸이 불꽃에 휩싸였다.
염라대왕의 겁화.
설극의 뒤처리를 염라대왕이 해주었다.
‘신왕성이 설극을 얕보고 있어서 지금은 괜찮을 수 있다. 허나 녀석을 경계하는 순간 위험해질 거야.’
설극이 강하다고는 하나 전대 왕들이 힘을 합친다면 버틸 수 있을까?
회의적이었다.
‘천극자. 네 희생이 헛되게 두지는 않겠다.’
친우가 죽기 전 자신에게 했던 부탁.
제자를 살펴달라는 말이었다.
천극자에게 졌던 빚을 갚으려고 노력하고는 있으나.
이제는 좀 벅찼다.
“대왕. 신왕성을 적으로 돌려도 되겠습니까?”
“이미 강을 건넜다. 돌아갈 순 없느니라.”
염라대왕이 발걸음을 옮겼다.
이 끝은 아무도 모르지만.
적어도 신왕성의 예상대로는 흘러가지 않으리라 보았다.
* * *
“보았… 습니까?”
“음.”
“파천혈신이 저리 강했단 말인가?”
“거벽이 공격도 해보지도 못하고 당하다니….”
“예상외요.”
잠깐의 놀라움 뿐.
다급해진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전대 왕들의 얼굴에 호승심이 어렸다.
“우리를 벼르고 있는 듯 보이는데 누가 나가겠나.”
“제가 나가야겠네요.”
뇌쇄적인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옥계에 나타났던 전대 왕이자, 색욕의 주인에 있던 자였다.
“혼자는 무리인 듯싶소.”
“절 무시하는 건가요?”
그녀가 한 남자를 노려보았다.
하얀 날개를 지닌 걸 보면 천계 쪽 전대 왕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실언했소. 거벽도 쓰러졌는데 색욕도 쓰러지면 신왕성의 체면이 말이 아니지 않소.”
“수성인 당신이 도와주시던가요?”
“그래도 되겠소?”
“기분은 나쁘지만 어쩌겠어요. 신왕성의 체면을 살려야죠.”
“현명한 생각이오.”
남자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소년이 그를 불렀다.
“수성.”
“말씀하십시오. 초강.”
“그의 분신도 함께해.”
이곳에 있는 모두의 눈이 동그래졌다.
“저희로서는 영광이긴 하나 과합니다.”
“전혀 과하지 않다고 그분께서 말씀하신다.”
“정말… 입니까?”
“내가 왜 거짓말을 할까. 듣는 대로 전했을 뿐이다. 영광으로 생각하라”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흐응. 전륜은 거벽과 비슷한 힘을 가져서 도움이 안 될 텐데.”
“색욕!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소년이 대노를 했다.
전대 색욕이 몸을 떨었다.
소년은 지옥계 출신이라 전륜의 강함을 알았다.
심지어 분신.
그것만으로도 신왕성에서 중간 계급에 들었다.
고작 힘의 30% 정도밖에 되지 않은 분신이 말이다.
“미안해요.”
“그분의 호칭도 똑바로 부르도록.”
“전, 아니 그분이 이름으로 부르라고 했는데.”
“어허!”
“네… 그럴게요.”
“가라. 천극자와 관련된 모든 것을 끊어내.”
“예! 초강.”
수성과 색욕이 신왕성을 나갔다.
“이번에는 끝이 나겠지요?”
“무려 세 명의 전대 왕이 나갔소. 심지어 그분의 분신까지 나설 테니 끝나리라 보오.”
“아까운 인재입니다.”
“동감해요. 말만 잘 들으면 신왕성으로 데려와도 참 좋았을 텐데.”
“그 사부에 그 제자 아니겠소. 미련을 버립시다. 세계를 재정립하려면 천극자와 관련된 자들은 모두 정리하는 게 좋소.”
“그보다.”
듣고만 있던 소년, 초강이 입을 열었다.
“사신기가 인간에게 이어졌다는군.”
“사, 사신기가 말입니까?”
“파천혈신도 익히지 못한 무공 아닙니까?”
“대체 누가 익혔답니까.”
그 어느 때보다 소란스러워졌다.
설극이 신왕성으로 쳐들어왔다는 보고가 왔을 때도 이만큼은 아니었다.
“파천혈신의 제자에게서 사신기가 보인다 하오.”
“헉!”
“신왕기의 천적이 고작 인간에게 이어졌답니까?”
“어렵지 않게 죽일 수 있겠군.”
그들의 말에 초강이 고개를 저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녀석이 탈신경에 들었다 한다.”
“그게 문제라도 있습니까?”
“인간이 탈신경에 오른 건 유례가 없는 일이긴 하나 신왕성이 못 죽일 실력은 아닙니다.”
신왕성의 최하급 서열도 탈신경 끝자락이었다.
초입과 끝자락은 애초에 싸움이 성립되지 않았다.
“자네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초강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네 사람을 바라보았다.
여태 입을 다물고 있던 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공을 익힌 지 3년 만인가? 괴물이라 표현하는 것도 민망하오.”
“시간이 1년만 더 있으면 우리와 동등해지는 것도 시간문제일 수도 있소.”
“생각만 해도 오싹해지는군.”
“빨리 처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나도 자네들과 생각이 같네.”
초강이 네 사람의 말에 동의했다.
천극자가 이준에게 사신기를 건네준 이유.
그 누구보다 빠르게 사신기를 수습할 수 있을 것 같아 넘긴 것이다.
역대급 천재였던 파천혈신도 익히지 못한 무공이었다.
깨달음과 성장이 무지막지하게 빠르니.
신왕성에선 골칫거리였다.
자칫 더 크기라도 하면 위험 덩어리가 될지 모른다.
“전륜이 죽이지 못하고 돌아온 건 우리 때문이오?”
“괜히 호출했나?”
“염라대왕만 아니면 안 불렀을 건데.”
이번에도 초강이 고개를 저었다.
“모두 틀렸네. 신왕기 때문이야. 분신은 사신기를 버티지 못 할거네. 분신이 아무리 강해도 본체는 아니니 싸웠다면 힘없이 패배했을 거야.”
“신왕기는 사신기의 천적이니 호출을 잘한 듯하오.”
“그럼 이준은 언제 죽이는 거요?”
“그분께서 차근차근하자고 하시네. 우선 파천혈신부터 처리하는 게 먼저일세.”
* * *
색욕과 수성이 신왕성을 나와 앞에 섰다.
“정말 여기서 파천혈신을 기다릴 거예요?”
“신왕성 주변에 결계가 쫙 깔렸는데 굳이 힘을 먼저 뺄 필요가 있소?”
“이건 내 취향이 아닌데.”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봅시다.”
“파천혈신이 대신 결계를 파괴하면요?”
“그럴 일은 없소. 염라대왕은 신왕성과의 약속을 어기지 못하오.”
“어떻게 그렇게 자신해요?”
“약속을 어겼다면 진작 신계를 자기 마음대로 했을 것 아니오. 염라대왕에게는 그만한 힘이 있다는 걸 색욕도 잘 아시지 않소?”
“신왕성으로 지옥계의 정예를 끌고 오는 것부터 신왕성과의 약속을 어긴 게 아닌가요?”
색욕과 수성도 염라대왕이 힘을 봉인하고 있다는 걸 안다.
염라대왕 정도면 충분히 신왕성에 들 수 있었다.
아니, 차고 넘쳤다.
지옥계의 모든 전대 왕이 신왕성에 든 걸 보면 모르나.
그것도 모두 서열이 최상위에 속했다.
염라대왕은 신왕급 무력을 가진 왕이었다.
계속해서 지옥계에 남고 싶으면 제힘을 봉인해야 했다.
4대 신계의 균형을 맞춰야 했으니까.
특히 신선계나 마계, 천계는 어느 정도 힘의 균형을 유지했다.
하나 지옥계는 달랐다.
생과 사는 물론, 인과율을 담당하는 층계.
왕의 힘이 너무 강하면 이 인과율을 무시할 수도 있었다.
그랬기에 금제를 가했다.
“우리가 먼저 치지 않는 이상은 공격은 하지 못할 거요. 날 믿으시오.”
수성의 말에 색욕은 못마땅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당장이라도 싸우고 싶었으나.
수성이 그녀보다 서열이 높았다.
신왕성은 서열이 절대적인 곳.
무조건 따라야 했다.
“결계에 발을 들인 것 같소.”
“한참을 기다리든가 아니면 아예 싸워보지도 못하고 끝나겠어요.”
색욕이 성벽으로 가서 몸을 기댔다.
전혀 기대가 안 되는 얼굴이었다.
수성은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결계를 유심히 보았다.
안개 속에서 가만히 있는 설극.
‘벌써 포기한 건가?’
그저 앞만 보고 있을 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신왕성 주변의 결계에는 다양한 기능이 있었다.
그중 환각은 최악.
겪어보면 두 번 다시 결계에 들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가장 끔찍하고 아픈 고통을 떠올리게 하니까.
결계를 부숴도 마찬가지였다.
한번 환각에 걸린 순간.
평생 정신병을 앓고 살아야 했다.
‘아, 결을 찾고 있어.’
설극은 포기하지 않았다.
결계를 파괴하려고 약한 부분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소용없어. 이건 전대 왕들이 모여 만든 결계다.’
힘으로는 절대 깰 수 없었다.
금제를 푼 염라대왕이나 신왕이 아니면 힘으로는 불가능했다.
그러니 저렇게 결을 찾고 있는 거다.
‘곧 환각에 걸리겠어.’
아니나 다를까.
설극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적안이 번쩍이며 주위로 살기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지독할 정도로 강렬한 한이 느껴졌다.
‘걸렸구만.’
수성의 얼굴에 미소가 떴다.
굳이 색욕과 나올 필요가 없었다.
결계만으로도 해결이 됐다.
“더 자극해볼까?”
수성은 설극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기 위해 결계를 만졌다.
모든 감각의 수치를 극대화하자.
설극의 반응도 격해졌다.
그가 가진 모든 무공을 허공에 퍼붓고 있었다.
“안쓰럽군, 큭큭. 색욕 여기로 와서 구경 좀 하는 게 어떻겠소.”
“여기서도 보여요.”
“이미 끝난 것 같지 않소?”
“그러네요. 괜히 나왔네요. 쳇.”
“재미없게 만들어서 미안하오.”
“파천혈신을 과대평가한 윗분들의 잘못이죠. 재미없으니 전 이만 들어 가볼게요.”
색욕이 몸을 돌린 순간!
콰아아앙-
뒤쪽에서 거대한 폭음과 함께 지독한 살기가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