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제3부 47화
“폐하. 가시지요.”
철문을 부순 남자가 옆으로 길을 비켰다.
그래워드 황제로 변장한 샤샤드가 걸음을 옮겼다.
말파르 광산 입구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샤샤드가 광산 꼭대기에 있는 드워프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날 맞이할 생각이 없나 보지?”
그리곤 한쪽 손을 들어보였다.
뒤에서 걸어 나온 기사 다섯이 검을 뽑아 들었다.
화르륵.
검 손잡이부터 회오리치며 올라온 화염이 불을 뿜어냈다.
곧이어 샤샤드의 음성이 들려왔다.
“드워프에게 황제의 위엄을 보여라.”
“예 폐하!”
다섯의 기사가 마력이 담긴 검을 휘둘렀다.
콰앙!
거대한 폭음이 들려왔다.
철로 된 광산이 흔들리며 무너져 내렸다.
뭉게구름을 피웠던 먼저가 가셨다.
그리고 드러난 광경.
흙과 나무로 뒤덮였던 광산이 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검은색과 회색으로 이루어진 철산의 자태가 드러났다.
단단한 철문도 갈랐던 화염검을.
다섯 명이 휘둘렀는데 철산은 흠도 생기지 않았다.
아직 가공하기 전의 광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강도가 엄청나게 강했다.
무엇보다 철산에서 보이는 강렬한 마력량.
광물 안에 마력이 가득했다.
“마정석보다 한 차원 높은 광물이라더니.”
“저게 말로만 듣던 흑마정석입니까?”
“그런 것 같구나.”
흑마정석은 일반 마정석에 비해 족히 두 배가량의 단단함과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란투스 대륙에서도 극소량만 발견될 뿐.
흑마정석은 말파르 광산에만 존재했다.
샤샤드의 눈이 탐욕으로 가득할 때.
광산 꼭대기에서 내려온 말론이 도끼를 겨누며 말했다.
“무슨 의도로 왔냐.”
“네게 부탁할 게 있어서 왔다.”
“그 태도가 어디서 부탁을 하러 온 사람이지?”
“좋은 말할 때 나오라 하지 않았더냐.”
“불순한 의도가 있는 인간의 말에 순순히 나갈 정도로 내가 바보 같아?”
“너와 드잡이질할 생각 없다. 영웅왕의 검을 가지러 왔다.”
“성검을 네게 주라는 말이냐?”
“그래.”
“성검은 영웅왕이 직접 뽑아가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영웅왕께서 내게 대신 가지고 오라고 명령하셨다.”
말론이 코웃음을 쳤다.
“성검을 가지러 오지 않은 영웅왕이라니. 그놈 가짜 아니냐.”
“감히 영웅왕을 모독하는 건가!”
“성검은 영웅왕밖에 뽑지 못해. 네가 접근해봤자 성검이 거부할 거야.”
“넌 성검이 있는 곳만 알려주면 된다.”
“말이 안 통해.”
말론은 답답했다.
영웅왕이 나타났다.
이보르 러예스가.
그의 후손인지 아니면 진짜인지는 모르나.
영웅왕은 성검을 가지러 말파르 광산으로 오지 않았다.
대신 신부름꾼을 보냈다.
성검을 보관하고 있는 말론은 기가 찼다.
영웅왕과 성검은 한 몸.
그란투스 대륙이 균열로 가득하다 해도 영웅왕은 성검부터 가지러 와야 했다.
그래야지만 완전한 영웅의 힘을 보일 테니까.
“성검을 내줄 수 없다면 새로운 성검을 만들어라. 전보다 더욱 강력한 성검을.”
샤샤드의 명령에 말론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영웅왕의 성검보다 더 강한 무기를 만들라니.
“제정신이야?”
“미친 인간이 뚫린 입으로 아무 말이나 지껄이고 있어.”
“성검이 어디 뉘집 개 이름이냐.”
“성검을 만들려면 말론의 대지 마력을 전부 넣어야지만 성공할까 말까 억.”
드워프가 발끈했으나 도중에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어느새 기사의 검이 드워프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말론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보지 못했어….’
한낱 기사 아닌가.
황제의 친위대라도 마찬가지였다.
기사가 강해봤자 거기서 거기.
말론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그는 대장장이.
그것도 4대에 속한 최고의 장인이었다.
보는 눈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생물의 움직임이든.
사물의 본질이든.
그 어떤 것도 꿰뚫어 볼 수 있는 마안의 소유자였다.
한데 친위대의 움직임을 보지 못했다.
‘내가 보지 못한 건 딱 하나. 드래곤의 마력이야.’
드래곤은 생명체가 생겨나기 전부터 존재했다.
드워프보다 더 오랜 역사를 지녔다.
말론의 마안조차도 드래곤이 만든 것.
그러니 다른 건 모두 볼 수 있어도 드래곤의 마력만은 보지 못한 거다.
“죽고 싶지 않으면 내 말을 듣지그래?”
샤샤드가 음흉하게 웃었다.
그 미소를 본 말론은 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황제에게서 위화감이 들었다.
‘저 녀석! 그래워드 황제가 아니야. 황도도 버리고 도망친 무능한 황제가 저런 살기를 가질 리 없다.’
위엄은 황제들이면 모두가 가졌다.
무능한 황제라도 말이다.
하나 살기는 아니었다.
누군가를 죽여봐야지만 가질 수 있는 살기.
황제가 보인 기운은 매우 진득했다.
마치 무수히 많은 사람을 죽여본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기운이었다.
* * *
말파르 광산 내부에 있는 감옥에 드워프가 감금되었다.
“어이쿠야!”
“개새끼들.”
“두고 봐. 내가 이 수모를 반드시 갚아주고 말겠다.”
“나가게 된다면 꼭 너부터 조져버릴 거야.”
드워프들이 악담을 퍼부었다.
눈동자에는 원한이 가득했다.
당장에라도 기사를 죽일 표정이었다.
하지만 기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큭큭. 너희들의 왕이 성검을 만들길 기원이나 해. 실패하면 한 놈씩 죽이기로 했거든.”
“비겁한 놈들.”
“너희가 그러고도 황제의 친위대냐.”
“로에니아 제국도 이제 망했어. 저런 망나니들을 정예라고 부르고 있으니 말이야.”
드워프의 막말에도 기사는 비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들은 감옥에 갇힌 내내 갖은 욕을 퍼부었지만.
황제의 친위대는 무시로 일관했다.
도발에도 꿈쩍하지 않자.
“이제 어쩌지?”
“여기서 탈출할까?”
“말론은 어쩌고.”
“아, 말론이 있었지. 빌어먹을.”
자기들끼리 소곤거렸다.
드워프들은 마음만 먹는다면 감옥을 탈출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말파르 광산은 그들의 집.
이곳의 구조를 누구보다도 잘 안다.
말론만 무사한다면 탈옥을 감행할 테지만 왕을 두고 도망칠 수 없으니.
고민이 많았다.
그러다 문득 누군가가 떠올랐다.
“테구르한테 도움을 청할까?”
“이방인을 주인으로 섬기는 놈이잖아.”
“그렇긴 한데 그 이방인은 좀 다른 것 같아.”
“…동감해. 말파르 광산 인근의 균열도 전부 없애주기도 했어.”
“균열로 인해 하마터면 흑마정석의 힘을 잃을 뻔했는데 때마침 정화를 해줘서 다행이야.”
“그 이방인은 믿어볼 수 있을 듯해.”
“모두가 같은 생각이냐?”
드워프들이 서로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볼까?”
“그러자.”
“그런데 어떻게 연락해?”
“우리가 쫓아내서 이미 멀리 갔을지도 모르는데.”
“흐흐. 내가 광산 위에서 봤어. 인근 숲속에서 며칠이나 야영을 하고 있더라고.”
“정말?”
“말론도 봤을걸?”
“뭐라고 안 해?”
“아무 말도 안 하던걸.”
“그냥 눈감아줬나 보네.”
“이방인이지만 그에게 은혜를 입었으니까.”
“그럼 내가 연락한다?”
모두가 동의하자 한 드워프가 감옥의 흙을 팠다.
손으로 흙을 모아 뭉치게 했다.
동그란 흙을 이어 붙이곤 팔과 다리를 만들었다.
마지막엔 눈까지 완성.
철을 긁어모아 흙에 뿌리니.
주먹보다 작은 눈사람 아니, 흙사람이 눈을 떴다.
“테구르에게 도움을 청해. 우릴 구해주면 이 은혜를 잊지 않고 꼭 갚겠다고.”
“넵!”
흙사람이 빨빨빨 달려가 창살의 틈으로 나가려 했나.
“미친.”
“창살에 꼈잖아. 왜 너처럼 뚱뚱하게 만들었냐.”
“저럴 줄 몰랐지.”
“으이구.”
흙사람이 바둥거리다가 이내 뚱뚱한 배와 등을 자르고 나갔다.
창살에 의해 강제 다이어트에 성공했다.
흙사람은 기사를 피해 빠른 속도로 광산을 빠져나왔다.
“헥헥!”
짧은 다리 때문인지.
흙사람에게는 굉장히 먼 거리를 달려 온 것.
지칠 만했다.
하지만 흙사람은 잠깐만 숨을 돌리더니 다시 뛰었다.
거대한 벌레가 녀석의 앞길을 막았지만.
“히엑!?”
뛰고 또 뛰었다.
자신을 만들어준 주인의 명령을 완수하기 위한 여정.
고난과 역경을 넘으니.
고지가 눈앞에 보였다.
이젠 흙이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상황.
흙사람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저기요!”
그가 누군가를 불렀다.
하지만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인지.
몸을 돌리지 않았다.
“이봐요! 저 좀 봐주세요!”
흙사람이 크게 외쳐서야 앞에 있는 사람이 몸을 돌렸다.
“응?”
한지유였다.
“테구르 어디에 있어요?”
“넌 뭐 하는 애니?”
“저 급해요. 테구르 어딨냐구요!”
애가 보채는 듯 흙사람이 테구르를 찾았다.
“저기에 있어.”
테구르는 주방장 모자와 앞치마를 두른 채 요리를 하고 있었다.
흙사람이 테구르에게 달려가 말했다.
“테구르 님, 도와주세요!”
한지유는 흙사람이 하는 행동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테구르가 요리에만 열중해 있자.
그녀가 흙사람 대신 말했다.
“테구르. 너보고 도와달래.”
“예? 무슨 말입니까요?”
모두의 시선이 한지유에게로 향했다.
“너 아래에 있는 아이가 도와주라고 말했어.”
한지유가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내린 테구르의 눈이 크게 떠졌다.
“뭐, 뭐야?”
“인간들한테 말론 님이 잡혔어요. 도와주세요.”
“나 지금 요, 요리 중인데.”
“도와주면 은혜를 꼭 갚겠다고 했어요.”
“누가?”
“드워프들이겠지.”
이준이 대신 대답했다.
“신기하네. 그런데 다 죽어가고 있어.”
그는 흙사람을 유심히 보았다.
언뜻 보면 소환수로 보이나 그냥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이었다.
그것도 주먹보다 작은 크기의 사람.
‘아마도 몸에 붙어있는 이 가루 때문에 소환수처럼 보이는 것 같네.’
참 신기한 걸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준이 무너져 가는 흙사람에게 손을 뻗었다.
웅웅.
이준의 손바닥에 은은한 기운이 맺혔다.
무너져 가는 흙사람이 점점 기운을 차렸다.
“오오!”
흙사람은 자신의 몸에 들어오는 기운에 환호성을 질렀다.
생기가 넘쳐흐른다.
새 생명을 부여받은 느낌.
사라져가는 기억이 또렷해지는 기분이었다.
“자 선물.”
이준이 한지유에게 흙사람을 건넸다.
“선… 물?”
“응.”
그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앞장서서 걸었다.
박정연이 부러워하는 눈빛으로 한지유를 보았다.
“준아. 나는?”
“누나도 필요해?”
“응!”
“나중에 똑같은 걸로 선물해줄게.”
“나는 다른 모양으로 부탁해.”
“알았어.”
이준이 말파르 광산으로 향하니.
모두가 그를 따랐다.
한지유는 손바닥에 있는 흙사람을 보며 중얼거렸다.
“…준이가 준 선물.”
그녀는 흙사람을 굉장히 소중히 다뤘다.
* * *
샤샤드는 말론과 함께 무기고로 왔다.
“열어라.”
“내 말귀를 전혀 못 알아들었어.”
“넌 잔말 말고 내 말에 따르기만 하면 돼.”
“후회하지마.”
말론이 무기고의 문에 손을 얹었다.
지잉-
문 앞에 마법진이 나타났다.
문양이 옆으로 돌더니.
철컥 소리와 함께 무기고의 문이 열렸다.
무기고의 중앙.
빛을 잃은 검이 검은색 철에 박혀있었다.
“성검이 흑마정석에 박혀 있었구나.”
샤샤드가 성검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탐욕을 부르는 명검.
빛을 잃었으나 사람의 시선을 빼앗고 있었다.
빨려들게 만드는 유혹.
샤샤드는 저도 모르게 팔을 앞으로 뻗었다.
번쩍!
그녀가 성검을 쥐려는 찰나.
빛이 짧게 번쩍였다.
“윽.”
샤샤드가 시커멓게 탄 손바닥을 보았다.
성검이라 그런지 주인을 가렸다.
말론이 경고를 한 이유가 있었다.
하나 샤샤드는 포기하지 않았다.
“고작 성검 하나도 못 뽑으면 그분을 볼 낯이 안 서.”
샤샤드는 황제의 모습을 풀었다.
본래의 매혹적인 적발을 드러냈다.
육감적인 몸매는 덤.
샤샤드의 모습에 말론의 눈이 동그래졌다.
‘적룡!’
말론은 샤샤드의 정체를 뒤늦게 알았다.
그녀가 만약 등 뒤에 날개를 보이지 않았다면 그저 황제로 변장한 인간이라 여겼을 테다.
하나 날개가 드래곤이라는 걸 말해줬다.
“얼마나 도도한지 볼까?”
샤샤드는 다시 한번 성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또다시 빛을 번쩍였지만.
그녀의 손에 상처를 가하지 못했다.
불의 마력이 손을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호호호. 그래. 이렇게 고분고분해야지.”
그녀가 성검을 무리 없이 잡았다.
이제 뽑기만 하면 됐다.
말론이 침을 꼴깍 삼켰다.
과연 성검이 뽑힐까.
드래곤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때.
스릉.
성검이 흑마정석에서 조금씩 뽑혀 나왔다.
그녀가 미소를 짓는 순간!
쾅-
무기고 밖에서 굉음이 울렸다.
먼지를 뚫고 한 그림자가 무기고 안으로 걸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