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제3부 42화
로에니아 제국의 황제는 균열로 인해 하는 수 없이 성을 버리고 피신했다.
제국의 서쪽.
밀레이엄 영지는 그나마 균열이 덜 퍼진 상태.
황제는 황실 마법단으로 균열을 막고 있었다.
“길렉스 후작.”
“하명하십시오, 폐하.”
“내가 언제까지 이곳에 있어야 하느냐.”
“해결할 방법을 찾고 있다 하니 조금만 버티십시오.”
“황도를 너무 오래 비웠어. 들리는 소문으로는 균열이 사라졌다 하더군.”
“일시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반란군이 황도를 먼저 점거하게 해선 안 돼. 어떻게든 수일 내에 해결책을 찾아야 해.”
황제는 마음이 다급했다.
반대파 귀족과 반란군.
황제가 무능해서 균열이 생겨났다고 소문을 냈다.
현재의 자리도 위태로운 상황.
황도까지 저들의 손에 넘어가면 끝장이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정 안되면 그들의 손이라도 잡아야….”
“아니 됩니다.”
“앉아서 당할 순 없어.”
“절 믿어 컥!”
금발 머리를 한 길렉스 후작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길렉스 후작!”
황제가 그를 불렀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숨을 거뒀다.
“여봐라. 밖에 아무도 없느냐! 근위단장!”
황제의 부름에도 밖은 조용했다.
그러던 그때였다.
저벅.
저벅.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황제의 귀에 들렸다.
“근위단장이냐. 길렉스 후작이…!?”
황제의 눈이 커졌다.
근위단장이 아니었다.
황도에 있을 때 궁으로 스며들었던 여자였다.
“…감히 네가.”
“폐하. 고정하세요. 화를 내봤자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답니다.”
잠시 후.
그녀를 따라 무수히 많은 인원이 성으로 들어왔다.
황제와 반대편에 서 있는 귀족들이었다.
“그러게 좋은 말로 할 때 제 말을 듣지 그랬어요. 그랬다면 측근이 죽지 않았을 텐데 말이에요.”
붉은 머리의 여자가 눈웃음을 쳤다.
그 속에는 살기가 어려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샤샤드.
적룡이었다.
하이 드래곤이 아닌 현시대에 사는 드래곤.
그녀는 적룡왕 카르디의 재림으로 인해 인간 속에서 살던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폐하를 이런 식으로 몰아붙이고 싶지 않았는데 저도 급해졌어요.”
샤샤드가 황제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뭐 하는 짓이냐!”
“당신의 얼굴이 필요해요. 이만 죽어주세요.”
말을 끝낸 샤샤드가 황제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황제의 눈과 코, 입, 귀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털썩.
황제가 쓰러졌다.
그의 얼굴 위에 작은 마법진이 그려졌다.
샤샤드의 얼굴 앞에도 마법진이 생겼다.
두 개의 마법진이 빛나더니.
황제와 샤샤드의 얼굴을 바꿨다.
샤샤드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몸을 돌렸다.
“황제를 알현하나이다.”
반대파 귀족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이미 샤샤드에게 정신이 사로잡혀 있었다.
그녀의 꼭두각시.
황제 편에 서 있는 귀족도 모두 죽었으니.
샤샤드를 의심할 귀족은 아무도 없었다.
슬라임처럼 물컹한 액체가 샤샤드의 옆에 생기더니.
길렉스 후작의 얼굴을 한 남자가 나타났다.
“길렉스.”
“하명하십시오. 폐하.”
말투며 행동이며 영락없이 길렉스 후작이었다.
“황제의 직인을 가지고 가서 말파르 산에 보관된 영웅왕의 성검을 내어달라고 해.”
“영웅왕이 직접 와서 뽑아가지 않으면 내어주는 건 불가능하다고 몇 번이나 거절하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도 거절하면 모두 죽여버려. 카르디 님께서 허락하셨다.”
“알겠습니다.”
길렉스로 변장한 남자가 귀족들을 데리고 나갔다.
샤샤드가 황제의 팔에 상처를 내고 병에 피를 담았다.
그리고 방을 나갔다.
그녀가 성을 거닐며 하나의 방을 찾았다.
황제의 금고.
궁을 버리고 나올 때 챙긴 보물들을 둔 방이었다.
그녀가 걸음을 멈췄다.
끼이익-
문을 열자 금은보화가 가득했다.
그녀는 금은보화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나의 물건.
금갑에 고이 담겨있는 보물이었다.
그녀는 황제의 피를 금갑에 떨어트렸다.
붉은 피가 퍼지더니.
딸칵.
금갑의 잠금장치가 풀렸다.
“이게 독의 돌….”
크리스탈은 보라색 빛깔로 반짝이고 있었다.
빨려 들어갈 듯한 강렬함에 샤샤드가 금갑을 닫았다.
“이걸 세상 밖에 내놔.”
“네 샤샤드 님.”
그림자가 불쑥 나타나더니 금갑을 가지고 사라졌다.
* * *
말파르 광산에 망치 소리가 울렸다.
탕!
경쾌한 소리가 주변으로 선율처럼 흘렀다.
이와는 달리 테구르는 죽을 맛이었다.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하는 겁니까요.’
최선을 다해 무기를 제련하고 있지만.
이제는 한계였다.
마력도 거의 동난 상황.
마력을 사용한 채 망치를 두드릴 수 없게 됐다.
이러다 어정쩡한 무기가 만들어질 수도 있었다.
‘이러다 실수하면 죽게 될 거야. 집중하자.’
테구르가 눈을 부릅뜨곤 망치를 힘차게 두들겼다.
옆에선 드워프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며칠째 망치를 두드렸는데 아직도 저런 힘이 남아있다니.”
“프하하하. 아주 터프해.”
“저 끈기와 인내는 우리도 배워야겠어.”
그들은 연신 감탄했다.
테구르의 대장장이 기술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배우고 싶을 정도.
같은 종족이었다면 끈덕지게 달라붙어 물어봤을 테지만.
테구르는 다른 종족.
실례였다.
이렇게 곁에서 대장장이 기술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집중하게 조용히 좀 해봐.”
“창에 마력을 어떻게 집어넣는지 자세히 봐야 해.”
“미, 미안.”
드워프들은 입을 다물고 테구르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 시각.
말파르 광산의 초입에 이준 일행이 도착했다.
“테구르가 균열을 제거했나 보네.”
광산 주위는 아주 깨끗했다.
푸른 등불 꽃으로 균열을 전부 없앤 모습이었다.
공기 중에도 마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준아. 잠깐.”
박정연이 이준의 팔을 잡았다.
입술을 손가락으로 가리며 조용히 시켰다.
“무슨 소리가 나. 귀 기울여봐.”
이준은 입을 다물고 소리에 집중했다.
탕!
탕탕!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작게 났다.
집중하지 않으면 안 들렸다.
“누가 무기를 제련하고 있어.”
이준의 말에 그리에스가 입을 열었다.
“드워프지 않을까? 말파르 광산은 드워프의 본거지야.”
“그런데 이 리듬, 꽤 익숙해.”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많이 들어온 듯한 음정.
귀에 쏙쏙 박혔다.
어디서 들었을까.
기억을 더듬어 본 끝에 알아낼 수 있었다.
“이건… 테구르의 망치 소리인데?”
“테구르? 걔가 왜 여기서 망치질을 해?”
박혁진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곳에서 망치질할 일이 있나.
칼의 이가 빠진 것도 아닐 터다.
테구르와 스케먼은 애초에 칼이 아닌 마력총을 사용했으니까.
“나도 모르겠다. 가서 확인해봐야지.”
이준이 걸음을 옮겼다.
말파르 광산의 입구 앞 공터는 술동이가 나뒹굴고 있었다.
술판을 벌인 모습.
축제라도 즐겼는지 아주 난장판이었다.
“모두 광산 안에 있어.”
수많은 기척이 느껴졌다.
광산 안으로 걸음을 옮기자.
스케먼들이 무언가를 구경하고 있었다.
“쟤 뭐 하고 있냐.”
정신없이 구경하고 있던 스케먼이 이준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주, 주인님!”
“언제 오셨습니까?”
“조금 전에. 그런데 테구르는 저기서 뭐해?”
“그게….”
스케먼들이 난감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였다.
말론 툰두가 이준에게로 걸어왔다.
“당신이 동생의 주인이오?”
말론의 반존대에 드워프의 고개가 돌아갔다.
“말론이 존대를 했어?”
“인간 황제가 와도 쌍욕을 퍼부은 놈인데.”
“미쳤나?”
말론의 행동에 드워프들이 입을 떡 벌렸다.
“동생이요?”
“저기에 있는 스케먼을 말하오.”
“아, 맞아요.”
이준의 대답과 함께 망치 소리가 끊겼다.
그리고 테구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니이이님!”
테구르가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드워프에게 괴롭힘이라 당했나.
서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준이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데 말론이 손을 내밀었다.
“반갑소. 난 말론 툰두라 하오. 말파르 광산의 주인이라오.”
“강철의 대장장이 말론 툰두! 아직 살아 있었어?”
그리에스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유명하긴 하지.”
말론 툰두는 그란투스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인사 중 한 명이었다.
4대 대장장이.
그가 만든 장비는 죄다 보구였다.
하나만 세상 밖으로 나가도 피가 강을 이뤘다.
그만큼 뛰어난 대장장이였다.
“넌 왜 놀라. 지구도 내려다볼 수 있으면 그란투스 대륙도 볼 수 있지 않아?”
“널 살펴보느라 그란투스 대륙은 신경을 끄고 있었어.”
하긴 용계는 암흑대공의 힘이 가장 중요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말론 툰두가 이준을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봤다.
“흠.”
말론이 턱을 쓰다듬더니.
이내 주먹으로 반대편 손바닥으로 탁 쳤다.
“동생의 주인답소. 엄청난 능력을 가진 인간이구먼.”
“그 정도야?”
“얼마나 강한데?”
“이보르나 오바디아보다 강해?”
드워프의 폭풍 질문에 그리에스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풉!”
모두의 시선이 그리에스에게로 갔다.
“아가씨는 왜 웃어.”
“우리가 웃겨?”
“난 진지해.”
이준이 바로 암흑대공이었다.
영웅왕 이보르 러예스와 신성왕 오바디아 반스를 물리친 괴물.
두 얼굴을 지닌 위선자의 가면을 박살낸 인물이었다.
그런 인간 앞에서 강하냐고 물으니.
웃음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시끄러워! 지금 이야기 중이잖아.”
말론이 드워프를 조용히 시켰다.
“몸에 사대 원소를 모두 지닌 인간은 오랜만에 보는데… 음.”
그는 자꾸 이준의 얼굴을 살폈다.
무언가를 떠올리려는 듯.
이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리에스. 이 얼굴은 불편해서 못하겠다.”
이준은 그리에스의 변장 마법을 풀었다.
어딜 가나 관심받는 얼굴.
자신이 아이덴 루블리스가 맞긴 하나.
어디까지나 전생이었다.
현재는 이준이란 이름으로 살고 있으니.
기억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관심을 받고 싶지 않았다.
이준이 본래의 얼굴로 돌아왔다.
“헉!”
“이, 이방인?”
“이방인이 4대 대장장이의 주인이었다니….”
“이 무슨!”
드워프들이 놀라면서 경계했다.
이방인은 그란투스 대륙을 학살하는 존재들.
악마였다.
드워프는 다행히 균열로 인해 공간이 분리되지 않았으나.
그들도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었다.
언젠가는 균열로 인해 이방인과 충돌할 거라고 말이다.
드워프들이 망치와 도끼를 꺼내 들려는 순간.
말론이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 시켰다.
“당신에게 물어볼 게 있소.”
“뭐든지 물어보세요.”
“당신의 몸속에 있는 그 힘은 무엇이오. 파멸이오? 아니면 생명이오.”
“너무 뜬금없는 질문인데.”
이준이 머리를 긁적였다.
몸에 지닌 4대 원소와 관련된 질문을 할 줄 알았다.
한데 예상과는 달리 심오한 질문을 하는 게 아닌가.
말론이 부연 설명을 했다.
“그란투스 대륙에는 하나의 전설이 내려오오. 4대 원소를 한 몸에 지닌 인간은 대륙을 파멸로 몰고 갈 수 있기도 희망을 줄 수도 있다 했소.”
“둘 다 관심 없어요. 전 제 세계만 안전하면 되는 주의라서요.”
“관심이 없다라…. 이건 또 신박한 대답이군.”
“전 여기에 강철의 돌을 가지러 왔을 뿐. 그란투스 대륙에 오래 머물 생각이 없어요.”
“그렇담 내 질문에 꼭 대답해주시오. 질문 여하에 따라 강철의 돌을 쉽게 가져갈 수도 있고 아니면 세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소.”
이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드워프들의 경계가 상당했다.
“이거야 원.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이준이 난감해했다.
그러다 이내 생각을 정리했는지 입을 열었다.
“그란투스 대륙이 어떻게 되든 전 상관없어요. 여기 일은 이쪽 세상 사람들이 해결할 일이에요.”
이준다운 대답이었다.
영웅과 거리가 먼 이준.
본인과 주변 사람만 잘 먹고 잘살면 됐다.
“그러면… 나도 어쩔 수 없소. 당신이 찾는 물건을 주지 못하오.”
“어쩔 수 없죠. 테구르, 가자.”
테구르가 후다닥 이준의 뒤에 붙었다.
이준이 순순히 뒤로 물러나자 박혁진이 작게 말했다.
“강철의 돌은 어쩌고?”
“다 생각이 있어.”
적룡왕의 계획은 머릿속에 들어있었다.
말파르 광산도 그중 하나.
드워프는 곧 위기에 처할 것이다.
인간에 의해서.
드워프가 도움을 청할 곳은 없었다.
드워프끼리만 연락할뿐더러 도움을 요청한다 해도 시간이 걸릴 터.
지원군이 오기 전에 죽으리라.
‘그때 내가 도와주면 돼. 드워프는 은혜를 원수로 갚는 종족은 아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