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제3부 33화
해미리트 영지는 활기가 넘쳐났다.
적룡 두 마리를 막은 영지.
죽다 살아나기도 했으니.
영지민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내가 좀 이기적이었나?”
저들을 본 이준이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그리에스가 고개를 저었다.
“용신족을 막지 않으면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어. 해미리트 영지는 용신족을 끌어들이는 용도로만 쓸 거잖아.”
이준은 해미리트 영지민의 얼굴을 보곤 마음이 안 좋아졌다.
이곳을 괜히 전장으로 삼았나.
자신 때문에 사람들이 피해를 보면 어떡하나 걱정이 됐다.
‘해미리트 영지가 아닌 다른 곳에서 도발을 한다면 용신족이 나타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용신족은 계속 헛발질을 했다.
사신수를 놓치고 백룡왕과 녹룡왕을 잃었다.
경계와 분노가 한층 강화된 상태였다.
용신족의 분노가 애꿎은 사람에게로 향하면 안 된다.
영지민의 해맑은 표정을 보자.
마음이 약해지다가도 그리에스의 말을 듣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다 피식 웃었다.
‘차라리 천살성이 있을 때가 좋았어.’
천살성과 함께 할 때는 그가 걱정을 덜어줬다.
자신의 나약한 마음을 다잡아주기도 했다.
조력자이자 친구이며 버팀목이던 존재.
천살성이 사라지니.
그 옛날 우유부단했던 성격이 돌아오는 듯했다.
‘정신 차려, 이준. 용신족을 죽이는 것만 생각하자.’
이준이 영지민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자리를 뜨려고 몸을 돌리려는 순간.
“걸려들었어.”
그의 넓은 기감에 드래곤의 기척이 잡혔다.
“얼마나?”
“백 마리쯤.”
“해미리트 영지가 아니라 왕국 전체를 공격하려는 거야?”
그리에스의 얼굴이 굳었다.
무려 백 마리.
어떤 종족인지는 몰라도 영지를 공격하는데 과한 전력이었다.
“메더 님.”
이준은 영지민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메더를 불렀다.
메더가 이야기를 끊고 그에게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싸움은 저희가 할 테니 메더님은 영지민을 보호해주세요.”
“저희도 싸우게 해 주십시오.”
메더가 강렬한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이준은 고개를 저었다.
“목숨만 잃을 뿐이에요. 저희를 믿어주세요.”
“저만이라도….”
메더가 끝까지 고집을 피웠지만 이내 결정을 따랐다.
이준의 눈은 단호했다.
의견을 바꿀 생각 따위는 없어 보였다.
“조심하십시오.”
메더는 이준의 옆에 있고 싶었다.
루블리스의 상징인 붉은 머리는 아니나.
루블리스 가에서 가장 강했던 남자와 똑같이 생겼다.
심지어 베오가 영주에게 들어보니 이름도 똑같았다.
아이덴.
루블리스의 핏줄이라면 모를 수 없는 이름이었다.
작은 왕국이었던 제로니아를 로에니아 제국과 같은 반열에 오르게 한 귀족.
아이덴 루블리스는 가문 역사상 가장 강한 기사였다.
메더는 이준을 아이덴 루블리스의 혈통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옆에서 지켜보고 싶었다.
메더의 눈동자는 이준의 등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대, 대장 저길 보세요!”
떨어지는 별 용병단 중 한 명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저 멀리서 보이는 검은 점.
그 숫자가 꽤 많았다.
심지어 덩치도 하나 같이 컸다.
“적룡의 숫자가….”
“드래곤은 한두 마리도 보기 힘든데 저건.”
수하는 말을 끝까지 못 했다.
점들이 계속 나타나고 있었으니까.
그 수가 족히 백은 되어 보였다.
“베오가 영주한테 드래곤이 나타났다고 알려. 나머진 영지민을 돕는다.”
메더의 지시에 따라 용병들이 흩어졌다.
그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태어나서 한 번도 보지 못한 광경.
드래곤 백 마리가 말이 되나.
근 몇백 년 동안 드래곤이 그란투스 대륙에 모습을 보인 건 열 마리도 채 되지 않았다.
“결국 대륙이 멸망하는 것인가.”
메더는 모습을 보이는 드래곤을 보며 희망을 잃었다.
* * *
해미리트 영지 남쪽 성문.
이준은 그리에스와 함께 성벽 위에 서 있었다.
“고작 백 마리?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박혁진이 이준 옆으로 오며 말했다.
절망에 빠진 영지민과는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성벽 위를 지키는 병사들 또한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을 했다.
전의를 이미 상실한 모습.
박혁진의 말에 병사들은 미친놈처럼 그를 보았다.
박정연, 한지유도 합류했다.
“우리만 있으면 상관없는데 영지민을 다치게 해선 안 돼. 긴장하고 싸워.”
“걱정하지 마. 나 박혁진이야.”
“뒤편은 내가 탐색해볼게.”
“응. 누나가 맡아줘야겠어.”
드래곤의 후미를 박혁진에게 맡길 순 없었다.
녀석도 일 처리는 뛰어나지만.
덤벙거리는 구석이 있었다.
한 번의 실수로 큰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으니.
박정연이 후미에 제격이었다.
“난 오른쪽.”
“그럼 내가 왼쪽.”
한지유가 오른쪽 방향을 맡았고, 그리에스가 왼쪽을 맡았다.
사방에서 둘러싸서 도망치지 못하게 모두를 섬멸해야 했다.
“혁진아. 확실하게 해야 해.”
“나만 믿어.”
박혁진은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를 포함한 네 사람이 성벽에서 뛰어내렸다.
이준은 성벽 위에 그대로 있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마법은 무공보다 다양한 공격이 가능해.”
하늘에서부터 존재감을 드러낸 드래곤들이 하나둘씩 땅으로 하강을 시작했다.
그 모습에 이준이 자조 섞인 말투로 중얼거렸다.
“내가 너무 과했나?”
드래곤이 인간으로 변한 걸 폴리모프라 한다.
폴리모프한 드래곤은 마력이 약해진다.
즉, 전력이 감소한다는 이야기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성벽을 지키고 있었는데.
괜한 짓이었다.
자신들을 상대로 과한 자신감을 드러내는 게 아닌가.
어떻게 드래곤은 하나같이 오만한지.
머리가 좋으면 욕이라도 안 해.
머리까지 안 좋았다.
저런 것들이 어찌 하이 드래곤일까.
저들을 이끈 용족왕이 대단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어쩌면 저런 머리를 가지고 있으니까 용계에 묶어놨을 수도 있어.”
마법은 흑룡왕에게서 탄생했다.
녀석은 그 마법을 바탕으로 새로운 드래곤을 만들어 냈다.
각자 속성에 맞게 나눠준 마법.
흑룡왕은 그들에게 스승이자 태어나게 해준 부모였다.
군주들의 단점을 잘 알기에 흑룡왕은 그들을 용계에 묶어 둔 게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보는 이준이었다.
이준이 용신족을 하찮게 보고 있는 사이.
적룡족의 네이탈이 거만한 목소리로 박혁진에게 말했다.
“네가 우리 동족을 죽인 인간이냐.”
“응. 너도 날 즐겁게 해줄 거지?”
박혁진이 싱글벙글 웃었다.
그는 검에 미친 검귀였다.
전생에도.
회귀 전에도.
검과 싸움을 가장 좋아했다.
호승심이 강하다고 해야 하나.
네이탈을 보자 싱글벙글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미친 인간인가. 날 보고도 그런 여유를 갖고 있다니. 강심장이라는 건 인정해주지.”
“말하는 걸 보면 한 따까리 하는 것 같은데? 좋아. 들어와. 빠르게 썰어줄 테니까.”
박혁진이 천월을 뽑았다.
그리고 네이탈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감히 네이탈 님에게! 주제도 모르는 인간을 네이탈 님께서 직접 처리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나가서 목숨을 끊어 놓겠습니다.”
네이탈의 뒤에 있던 남자가 앞으로 걸어나왔다.
애꾸눈을 가진 남자가 등 뒤에서 쌍검을 뽑았다.
걸음걸이에 자신감이 잔뜩 배어있었다.
“혼자는 무리일 텐데.”
“하찮은 도발에 넘어갈 듯싶으냐.”
“너희 대장하고 말할 때부터 이미 도발에 넘어온 것 같은데.”
“주둥이로만 싸우고 있구나.”
“빨리 죽고 싶다면 소원대로 해 줄게. 난 더 날려주고 싶었어. 말했다. 후회하지 마.”
“정신 나간 놈….”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람이 불었다.
적룡들의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스치는 바람.
애꾸눈 남자는 걷는 그대로 상체가 분리되어 엎어졌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애꾸눈 남자의 뒤에 서 있던 네이탈의 광대 피부가 갈렸다.
실선이 길게 나 있는 상태.
조금만 깊었다면 광대가 날려 나갔을 것이다.
네이탈이 목을 꺾으며 반응했기 때문에 이걸로만 끝난 거다.
그 선상에 서 있는 적룡의 얼굴이 죄다 잘려 나가 있었다.
“억 미안. 이렇게 약할 줄 몰랐어. 쏴리.”
박혁진의 얼굴에는 전혀 미안한 마음이 없었다.
되려 즐겁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현대의 MZ세대 언어로 킹받는다고나 할까.
아무튼 네이탈의 이성이 끊어지기에 충분했다.
“가만두지 않겠다!”
“제발 날 궁지에 몰리게 해줬으면 좋겠어.”
“크아아악!”
네이탈이 포효했다.
그의 등에서 드래곤의 날개가 활짝 펼쳐졌다.
적룡의 마력이 뿜어지면서 하늘을 뒤덮었다.
무거워진 공기.
중압감이 주위로 휘몰아쳤다.
“알았어. 장난은 그만 칠 테니까 화 풀어.”
박혁진은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월을 어깨에 걸친 채 뇌신공을 운용하려는 찰나.
콰앙!
적룡들이 서 있는 양옆에서 폭음이 울렸다.
“그만 좀 조잘거려.”
한지유가 박혁진에게 핀잔을 줬다.
“그 입만 가만히 있으면 괜찮은 앤데.”
그리에스도 한지유와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 * *
적룡들의 뒤편으로 빠르게 이동한 박정연이 남은 병력을 찾았다.
산을 넘으니 보이는 평야.
그곳에 대놓고 자리하는 게 보였다.
그 숫자는 본진의 반도 되지 않았다.
“빠르게 처리하고 합류해야지.”
이준에게 칭찬받을 생각에 박정연은 그 누구보다 민첩하게 행동했다.
뇌운보를 펼쳐 달리니.
멀리서 보였던 적룡들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서걱!
뇌전이 번쩍이며 적룡의 목이 땅으로 떨어졌다.
머리가 공처럼 굴러서 동족의 발을 두드렸다.
“어?”
하나 그가 놀라기 전에 찌릿한 무언가가 가슴을 가르고 지나갔다.
털썩.
순식간에 두 마리의 적룡이 죽었다.
그녀가 허리를 숙이며 벽운을 역수로 잡으며 중얼거렸다.
“뇌풍.”
그녀의 신형이 사라졌다.
동족이 죽은 걸 뒤늦게 알아챈 적룡들의 뒤에서 나타났다.
역수로 잡은 벽운에선 아지랑이가 피어나고 있었다.
그녀가 몸을 일으키자.
푸확-
바람이 불더니 적룡의 몸을 반으로 잘라버리는 동시에.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후우우.”
그녀가 심호흡을 한 후 벽운을 검집에 넣었다.
스물다섯 마리의 적룡이 순식간에 전멸했다.
드래곤의 형태면 몰라도 적룡들은 폴리모프를 한 상태.
힘이 약해진 드래곤은 박정연의 상태가 되지 못했다.
“다른 곳은….”
박정연이 기감을 넓혔다.
혹시나 근처에 적룡이 또 있을까 확인해 보았으나.
“여기가 끝이네. 돌아가야겠다.”
생명이라곤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가 땅을 박찼다.
엄청난 속도로 산을 오르며 나아갔다.
다른 쪽은 한창 싸우는 중일 거라 생각 했지만.
“아직도 안 싸우고 있어?”
박혁진은 아직도 주둥이를 털고 있는 게 아닌가.
“저 입을 꿰매야 해.”
한지유와 그리에스가 더 이상 못참은 나머지.
양옆에서 공격을 가했다.
박혁진은 아차 싶었는지 뒤늦게 뛰어들었다.
“쟤들보다 못할 순 없지.”
박정연은 한지유와 그리에스를 보다가 이내 몸을 날렸다.
경쟁자.
두 사람 다 이준에게 관심이 있었다.
물론 두 여자에게 밀린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틈을 줘선 안 됐다.
모든 칭찬은 자신이 받아야 했기에 최선을 다해 뇌신검법을 펼쳤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번개.
지상에서 솟구치는 얼음.
백 마리의 적룡이 혼란에 빠졌다.
그들이 업신여긴 인간이 생각과는 달리 너무 강했기 때문.
혼란을 수습하려 했으나.
옆에 있던 동료가 우후죽순 죽어 나가는 걸 보고는 더욱 패닉에 빠졌다.
박혁진과 싸우고 있는 네이탈이 어금니를 씹었다.
“네놈들이!”
“분한가 봐. 얼굴이 빨간데. 아니지. 원래 빨간가?”
박혁진의 농담에도 네이탈은 이를 악물 뿐이었다.
“우릴 죽이는 걸로 끝났다 생각하지 마라.”
“끝났다고 생각 안 할 건데?”
그는 이상함을 느꼈다.
‘준이가 마법을 조심하라고 했어.’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면 불나방처럼 죽으려 하는 이들이 있었다.
어떻게든 엿을 먹이려고 하는 자들.
네이탈의 말투가 딱 그래 보였다.
‘이제 죽여야겠어.’
그가 전뢰검법의 전반부 3식인 뇌강을 뽑았다.
천월에 무지막지한 뇌전이 뿜어져 나왔다.
마지막 공격이라는 걸 네이탈도 인지했는지.
녀석은 무기를 버리고 마법진을 만들었다.
“나와 함께 가자.”
네이탈이 바닥을 향해 손을 내린 순간.
박혁진의 뇌강이 네이탈의 머리로 떨어졌다.
죽음을 앞둔 와중에도 네이탈의 표정은 웃고 있었다.
쾅!
네이탈의 있던 자리에 큰 굉음이 울렸다.
그와 동시에 해미리트 영지가 있는 곳에서 폭발음이 들려왔다.
박혁진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