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제3부 30화.
‘핏줄을 찾았을지도’
붉은 머리 남자의 이름은 메더.
이곳 제로니아 왕국의 위대한 기둥 중 한 곳인 루블리스 가의 사람이었다
지금은 망하고 명맥만 간신히 이어가지만.
옛날에는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이름이었다.
메더 루블리스는 직계가 아닌 방계.
그중에도 피가 약하게 이어진 남자였다.
재능이 뛰어나 붉은 머리를 가지게 된 것.
원래 방계는 메더처럼 선명한 색을 띠지 않았다.
그런 그가 이준을 보고 놀라 했다.
이유는 단 하나.
가문에서 내려온 초상화와 이준이 너무 닮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게 있다면 머리 색.
붉은색이어야 할 머리가 짙은 검은색이었다.
메더는 마력 감지를 통해 이준의 몸을 살폈다.
루블리스의 성을 이은 자들만이 가진 특징 중 하나가 바로 같은 핏줄을 알아보는 것.
정확히는 마력 공명이었다.
웅.
웅웅.
메더의 마나 하트가 두근거렸다.
마치 잊고 있던 사람을 오랜만에 만난 것처럼.
’직계 핏줄을 찾았어!‘
메더는 직감했다.
이 사람은 자신이 그동안 찾아 헤매던 사람이라고.
그가 마력 공명을 운용하고 있는데.
“누가 날 살피는 건 별로 안 내키는데요.”
이준의 목소리에 메더가 정신을 번쩍 차렸다.
“실례했습니다.”
메더가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그가 극진히 예의를 차렸다.
그 모습에 무릎 꿇고 있던 무리가 경악했다.
“대장이 고개를 숙이셨어!”
“외지인에 불과한 자에게 헉!”
“상대가 강하다 한들 저자세로 나가실 분이 아닌데….”
모두가 이해할 수 없는 얼굴을 했다.
메더는 호리호리했다.
운동은 안 하고 집에 틀어박혀서 공부만 한 사람 같았다.
하나 겉보기와는 완전 딴판.
그는 제로니스 왕국을 떠나.
그란투스 대륙에서 알아주는 기사였다.
현재 왕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루블리스 가문이 망했다고는 하지만.
그들은 수호자.
제로니아 왕국을 매번 구한 가문이기도 했다.
메더 또한 광기의 균열로부터 왕국을 구하고 있었다.
망했던 가문이.
방계 출신의 인물이.
왕이 다스리는 도시에서 용병단을 숨기지 않고 운용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죄송하지만.”
메더가 이준에게 질문을 하려 하자 그리에스가 차단했다.
“당신이 찾는 사람 아니야.”
“제가 누구를 찾는지 아시고 이러십니까.”
“루블리스 가문의 직계 혈통. 이러면 답이 돼?”
그녀의 목소리에 메더가 다시 한번 놀랐다.
정확한 이유였다.
직계 혈통을 찾아 루블리스 가문을 일으키는 게 메더의 사명.
죽을 때까지 그들을 찾아 헤맬 생각이었다.
“당신들은 누굽니까?”
메더가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그가 루블리스의 직계 혈통을 찾는 건 비밀이었다.
“우린 여기에 잠시 있다가 갈 거니까 신경 쓰지 마.”
사실 그리에스는 붉은 머리 남자가 더욱 들러붙어 주길 원했다.
그녀도 이준의 정체가 긴가민가했다.
마나 하트가 존재하지 않는데 암흑대공의 힘을 가지고 있다.
이게 무슨 경우인가.
마력을 사용하려면 무조건 마나 하트가 있어야 했다.
이준은 마나 하트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암흑대공의 힘을 보였다.
불가사의한 인간.
옆에서 계속 지켜보았으나.
이준이 거짓말을 치진 않은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이 궁금증을 풀어줬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 그리에스였다.
“제게는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양해를.”
메더가 이준에게 손을 뻗으려는 순간.
벌컥!
주점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대장! 해미리트 영지에 드래곤이 나타났습니다.”
“또? 상황은 어때?”
“심각합니다. 왕궁에선 해미리트 영지를 버리려고 하는지 지원병 소식은 없습니다.”
“젠장. 해미리트 영지는 최후 전선인데 멍청한 국왕 같으니 또 자경단이랑 용병만 죽어 나가겠어.”
“어떻게 합니까?”
“즉시 출발해야지. 해미리트 영지가 뚫리면 다음은 왕도야.”
주점에 있는 용병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무릎을 꿇고 있던 이들도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죄송합니다. 제가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메더가 미련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등을 돌려 주점을 나가려는데 이준의 음성이 들렸다.
“저희도 따라가도 되나요?”
“도와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겸사겸사요.”
“감사합니다. 절 따라오십시오.”
이준 일행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해미리트 영지는 일행의 목적지였다.
* * *
해미리트 영지로 가는 길.
마차가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왕도를 나와서 조금만 가자.
균열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심각하지 않은 정도.
주변으로 퍼질 오염은 아니었다.
“얼마나 걸리려나.”
들판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끝도 없는 길이.
시간이 꽤나 걸릴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대장. 사역마도 아니고 그냥 말로는 한나절이나 걸립니다. 말을 버리고 가는 게 어떱니까.”
메더가 말을 몰다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은 이준 일행에 닿아 있었다.
달리는 속도를 늦춘 그가 이준을 향해 말했다.
“저희는 먼저 가야 할 듯싶습니다. 호위 병력을 놔두고 갈 테니 천천히 오십시오.”
메더의 말에 그리에스와 이준이 눈을 마주쳤다.
그녀가 이준에게 시크릿 보이스를 사용했다.
[너를 암흑대공의 직계로 여기고 있나봐.]
[이 얼굴이 그렇게 닮았어?]
[그냥 판박이야. 핏줄도 아니고 암흑대공의 얼굴을 하고 있다고.]
[귀찮게 됐네.]
[따라갈 거지?]
[혁진이 봐봐. 안 따라가면 날 죽일 기세야. 중세시대에 과몰입한 상태야.]
박혁진은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자기가 언제 소설에서만 보던 곳을 경험할 수 있을까.
마치 주인공이 된 느낌이었다.
“우리도 따라가자. 마차는 적성에 안 맞아.”
“경공이 낫긴 해. 엉덩이 아파서 못 타겠어.”
박혁진과 박정연은 당장이라도 싸우고 싶은지.
괜히 마차를 탓했다.
“그렇다네요.”
“따라오실 수 있습니까?”
모두가 빙그레 웃었다.
들은 말 중 가장 웃겼다.
“안내해주세요.”
메더가 고개를 끄덕이곤 전방을 향해 외쳤다.
“말을 버린다.”
용병단이 말을 버렸다.
그들의 다리에 마법의 고리가 걸리더니.
팡-
압축된 공기가 터지면서 앞으로 쭉 쏘아졌다.
“이 세상은 기사가 마력을 쓰는 것 같다. 맞지, 준아.”
“그래 보여.”
기사는 오러 마법사는 마력.
이게 기본적인 내용이었다.
하나 그란투스 대륙은 기사와 마법사 모두 마력을 사용했다.
기사도 마법사처럼 속성을 선택하는 곳.
그게 바로 그란투스 대륙이었다.
용병단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이준과 일행도 뒤늦게 출발했다.
“나 먼저 간다.”
“천천히 와.”
박혁진과 박정연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어느새 점이 되어 사라진 두 사람.
뒤이어 한지유와 그리에스도 출발했다.
이준은 천천히 걸었다.
저들이 애를 써봤자 모두 그의 손바닥 안.
딱 한 걸음.
이 한 번의 걸음으로 모두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이준의 무릎이 굽혀졌다.
허벅지와 종아리에 힘이 잔뜩 들어간 순간.
쾅!
땅이 거미줄처럼 갈라지면서 이준이 사라졌다.
용병단과 메더는 최고 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때 옆에서 바람이 불더니.
파직-
푸른 뇌전이 번쩍임과 동시에 두 사람이 옆을 지나쳤다.
길은 모르는 두 사람은 아차 싶었지.
속도를 최대한 줄였다.
“헉!”
“어, 언제!?”
“우리가 먼저 출발한 것 같은데….”
“대, 대장. 뒤편을 보십시오!”
빠르게 달리던 메더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동자가 앞으로 튀어나올 듯 커졌다.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무어라 말을 하지 못했다.
“프, 플라이 마법?”
하늘을 나는 마법은 고등 마법이었다.
옛날에는 꽤 많은 마법사들이 플라이 마법을 사용했으나.
현재는 전부 실전된 상태.
플라이 마법이 수백 년 만에 나타난 것이었다.
저들의 반응에 박혁진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
“풉! 플라이 마법이라고 오해할 만해.”
이준의 무극군림보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이동하는 경공이기도 했다.
디딤발도 사용하는 게 드물었다.
그러니 하늘을 난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그리에스는 어떤가.
이준보다 더 심했다.
그녀야말로 플라이 마법의 정수를 사용하는 중이었다.
하늘을 요리조리 정신없이 날았다.
드래곤으로 변하지 않아도 가능한 비행.
빠르기도 무지막지했다.
그리에스가 해미리트 영지를 아는 듯.
앞으로 치고 갔다.
“먼저 갑니다.”
“이따 봐요.”
모두가 점이 되어 사라지자 용병단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자기들이 형편없어 보였다.
이준은 그런 이들에게 절망을 선사했다.
“쟤들을 안 놓치고 싶으면 죽을힘을 다해 달려야 할 거예요. 그래도 놓치겠지만 힘내세요.”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번쩍-
함께 달리던 공간에서 사라졌다.
“세, 세상에!”
“텔레포트….”
“고등 마법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고 있어요.”
“저들의 정체가 뭡니까 대장?”
“우리의 주인을… 드디어 찾은 듯싶다.”
“예?”
“전력을 다해 쫓아간다.”
메더가 전속력을 펼쳐 달리자.
나머지 용병단들도 안간힘을 쓰며 따라붙었다.
* * *
“으응….”
“사, 살려 컥.”
해미리트 영지가 화마에 휩싸였다.
붉은 드래곤.
적룡 두 마리가 불을 뿜어내니.
삽시간에 건물이 잿더미가 됐다.
“도망쳐!”
“여기 있다간 다 죽을 거야.”
“꺄아아악!”
비명이 난무했다.
고작 드래곤이 두 마리였지만 기존에 나타나던 드래곤과는 격이 달랐다.
“단장님! 마법이 전혀 먹히지 않습니다.”
“그럴 리 없다! 아쿠아 붐을 쏴라.”
아쿠아 붐은 5서클의 마법.
적룡에게 취약한 마법이기도 했다.
수십의 마법사들이 아쿠아 붐을 쏘아댔다.
물폭탄이 적룡에게 적중했으나 소용없었다.
데미지를 입지 않은 듯.
적룡의 성질만 돋우고 있었다.
“브, 브레스.”
“온다!”
“베리어!”
마법사들이 투명한 막을 만들어 브레스에 대항했다.
하나 부질없었다.
불길은 너무도 쉽게 베리어를 깨부쉈다.
수십의 마법사들이 브레스에 녹아내렸다.
“각지에 지원군은 보냈나?”
안타까운 시선으로 지켜보던 영주가 힘없이 물었다.
“전령을 보냈지만 연락이 없습니다.”
“허. 하늘이 우릴 버리는구나.”
영주가 개탄을 했다.
나라에 충성을 했으나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해미리트 영지가 어떤 곳인가.
제로니아 왕국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목이었다.
여기가 무너지면 곧장 왕도였다.
쉽게 뚫리면 안 되는 영지.
어떻게든 사수해야 하는 지역이었다.
“단장. 최소한의 병력만 남기고 모두 뒤로 물리시게.”
“그러면 해미리트 영지가 무너질 겁니다.”
“무너지는 건 기정사실. 시간이라도 끌어봐야지.”
“영주님도 같이 가십시오.”
“난 해미리트와 함께 하겠네. 내 어리석은 선택의 결과야.”
베오가 영주가 모든 걸 포기하려는데 난데없이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졌다.
쾅!
빛이 다시 한번 번쩍였다.
적룡을 가르며 지나가는 푸른 뇌전.
불을 뿜어내던 적룡이 두 동강 나며 아래로 떨어졌다.
해미리트 영지를 절망에 빠트렸던 드래곤이 죽었다.
베오가 용주는 놀란 표정으로 앞을 보기만 했다.
자기가 보고 있는 게 사실인지 아닌지.
분간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적룡이… 죽었습니다.”
그의 옆에 있던 기사단장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기사단장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베오가 영주가 다급히 외쳤다.
“누가 해치웠는지 알아보게.”
기시단장이 적룡이 떨어진 곳으로 황급히 달려갔다.
한편.
박정연은 쓰러진 드래곤을 바로 툭툭 찼다.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원래 잿빛으로 사라지지 않아?”
“그런 줄 알았는데 얘는 다르네. 시체로 남아있어.”
박혁진이 천월로 적룡의 비늘을 찢었다.
벌어진 부위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하이 드래곤이 아닌가?”
“용신족이 맞아.”
그리에스가 바닥에 착지하며 말했다.
“그란투스 대륙이라 육신은 그대로 있고 영혼만 사라질 거야.”
“지구에서 죽을 때랑은 다른가 보다.”
“여긴 우리가 살았던 세계니까.”
“그리에스.”
“왜?”
“용신족도 도발에 잘 넘어가려나?”
이준의 물음에 그리에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용신족마다 다르지만 대부분 자존심이 강해서 잘 걸려들어. 그건 왜?”
“이 시체 모두가 보이는 곳에서 태우면 어떨 것 같아?”
“적룡왕을 도발하려고?”
“계획은 그래. 군주들을 없애지 않은 이상은 집으로 빨리 돌아가긴 틀릴 것 같아서 말이야.”
“적룡왕은… 음흉해. 다른 왕이라면 몰라도 안 걸려들어.”
“다른 군주라도 오게 만들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