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부 23화
“어째서….”
레미엘이 절망에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통하지 않은 공격.
상대는 신성력을 죄다 베었다.
뿐인가.
권능인 재생까지 불가능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
파천혈신에게 패했을 때와 같은 감정을 느꼈다.
척-
주경아의 검이 레미엘의 목젖에 닿아 있었다.
“네 죄가 무엇인지 아느냐.”
“어째서 천계의 신인 내가 구천옥의 죄인이었던 여자를 이기지 못하는 거지…?’
레미엘은 정신이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정신을 놨구나. 충격이 크겠지. 콧대 높은 천계의 신이 한낱 여자인 내게 졌으니 말이야.”
주경아가 검을 거두었다.
벽운과 복마참백연이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갔다.
그녀가 몸을 돌리자.
철의 군단이 레미엘을 부축했다.
“가주님을 모셔라.”
“큭. 이 치욕을 꼭 갚아주겠다.”
“다음에는 각오해야 할 것이오.”
그들이 한마디씩 했다.
주경아는 몸을 돌리지 않은 그 상태로 입을 열었다.
“누가 너희를 용서한다고 했더냐.”
그녀의 목소리에 모두가 움직임을 멈췄다.
제 의지가 아니었다.
주경아의 말 한마디에 몸이 굳은 것.
그들의 얼굴이 점점 빨갛게 달아올랐다.
철의 군단이 간과한 게 있었다.
그녀는 구천옥의 주인이자 마의 주인이기도 했다.
심성은 고약하지 않으나.
누구보다 강함을 흠모하고 섬겼다.
그녀가 파천혈신이자 신선제인 설극에게 반한 것도 이 때문.
그렇기에 생김새와는 달리 손속에 거침이 없었던 것이다.
“우, 우린….”
“너희에게 입을 열라고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몸을 돌렸다.
철의 군단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검게 빛났다.
마안.
이준이 가진 마안과 똑같았다.
다른 게 있다면 이준의 마안은 심연의 공포를 끄집어내는 기능이 있다면.
주경아의 마안은 상대를 파멸로 이끌었다.
지금과 같이 말이다.
푹-
푹푹-
“컥!”
“너, 너희가 왜…?”
철의 군단은 서로를 향해 공격했다.
그들의 손은 동료의 몸을 관통하고 있었다.
철의 군단장은 심장이 뚫려 바닥에 쓰러졌다.
살아남은 이들이 몸을 떨었다.
‘죽는다….’
‘저 여자의 비위를 건드리면 안 돼!’
‘마녀, 악마가 강림했어.’
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마계의 악마도 이 정도까진 아니었다.
진정한 공포가 무엇인지.
뇌에 새겨진 순간이었다.
“이제야 알아들은 것 같다만 너희는 주어진 기회를 전부 날렸다.”
주경아가 손을 횡으로 그었다.
그들의 목이 일제히 땅으로 떨어졌다.
목숨을 잃었음에도 눈동자는 여전히 공포에 잠겨있었다.
“이대로… 죽을 수 없다!”
레미엘이 마지막 발악을 했다.
그를 향해 하늘에서 빛이 내려왔다.
그의 몸이 점점 허공으로 떴다.
가진 신성력을 전부 토해내며 외쳤다.
“신을 능멸한 자에게 천벌을!”
주경아와 이준의 발밑에서 빛의 기둥이 솟았다.
박정연과 한지유, 박혁진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들을 덮친 빛의 기둥.
인간의 육체를 아예 없애버리려는 듯.
강한 빛을 발했다.
그와 함께 철이 기둥을 덮었다.
다섯 사람의 몸이 철에 완전히 둘러싸였다.
“허억… 봤느냐 이게 바로 허억, 신의 힘이라는… 것이다.”
레미엘이 땀을 흘리며 힘겹게 말했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최후의 승자는 나 레미엘의 것이란 말이다. 하하하.”
호탕하게 웃고 있을 때였다.
그의 몸이 삽시간에 부풀리더니 폭죽처럼 터졌다.
어이없는 소멸.
주경아와 이준을 덮었던 철의 기둥이 사라졌다.
그녀가 손을 털며 말했다.
“괜찮니?”
“네 저희는 괜찮아요.”
박정연과 한지유, 박혁진도 무사했다.
가슴을 쓸어내린 세 사람이었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주경아가 보호해주지 않았다면 지옥문을 봤을지도 몰랐다.
* * *
[신이 천벌을 내립니다.]
[철의 신에게 적대적인 각성자를 무력화시킵니다.]
[내공 사용자로 패널티가 부가됩니다.]
[천벌이 내린 영역에선 내공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이들은 오직 철의 군단뿐입니다.]
[천무의 능력으로 패널티가 40%만 적용됩니다.]
[검은 대공 파편 조각3을 획득했습니다.]
[바로 보시겠습니까? (Y/N)]
레미엘의 마지막 공격을 맞고 뜬 상태창이었다.
주변이 정리되자 그제야 메시지를 수락했다.
[검은 대공의 기억을 엿보았습니다.]
이준이 멍하니 있자 박정연이 그를 불렀다.
“준아. 왜 그래?”
“놔두거라. 깨달음을 얻으려는 모양이다.”
“넵!”
주경아의 말에 박정연이 크게 대답했다.
롤모델이 인자한 표정으로 말하니.
기쁜 듯이 고개를 끄덕인 박정연이었다.
그 모습에 주경아도 덩달아 미소를 보였다.
‘귀여운 아이구나.’
후보 며느리 중 한 명.
밝고 명랑한 게 마음에 쏙 들었다.
이준과도 꽤나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물론 한지유와도 얼굴 궁합은 완벽했다.
누구와도 잘 어울리는 아들.
속으로 뿌듯해하는 주경아였다.
한편 이준은 기억의 파편 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그가 처음 본 장면은 처참한 전장 속.
한 남자가 검을 땅에 박은 채 몸을 기대고 있는 게 보였다.
-파르가.
-힘겨워 보이군.
-너도 마찬가지다.
-용족왕이자 대군주인 나는 끄떡없다.
-다 죽어가면서 큰 소리는 여전해.
-흥. 난 불멸의 존재. 죽는 게 아닌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파르가란 검은 드래곤은 말과는 다릴 치명상을 입고 쓰러져 있었다.
남자의 말대로 죽기 일보 직전.
당장에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자존심하고는.
-그보다 영웅왕과 신성상을 놓쳤는데 괜찮나.
-치명상을 입어서 얼마 살지 못할 거다.
-확실하게 목숨을 끊어놓지 못한 게 아쉬워.
-대륙의 파멸은 막았으니 그걸로 위안을 삼자.
-검은 대공.
-말해.
-네 검술이 어디서 왔는지 궁금하다고 있었나?
-이제야 알려주려고?
-넌 모든 걸 다 아는 예언자와 같았다. 하지만 검술과 마법의 근간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지.
-그게 이상해?
-모든 게 끝난 마당에 네가 회귀자든 빙의자든 중요하지 않다. 다만, 검술의 근간은 알아두었으면 좋겠다.
검은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흑룡왕 파르가가 호흡을 가다듬고 말을 이어갔다.
-네 검술은 동쪽 나라에서 왔다.
-뭐!?
-무엇이든 알던 네가 이리 놀라니 즐겁군. 네가 말했던 적이 있을 거다. 대륙 무림. 그쪽이 네 근간이다.
-어쩐지….
-너도 대충은 짐작하고 있었으리라 본다.
-어떻게 네가 무림을 알아?
-그곳에서 넘어온 자가 있었다. 이름이… 천극자라고 했던가? 그에게 구함을 받은 적이 있는데 내게 대뜸 책 한 권을 주더군.
-그게 파르가의 고서?
-맞다. 호흡법만 내 숨결을 사용하고 나머진 천극자란 이의 것이다.
-천극자….
-예언가인 네가 모르다니. 별 일이이야.
천극자란 말에 이준의 눈이 커진 순간.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왔다.
“사조의 존함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어. 그런데… 연대기가 안 맞지 않나?”
이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기가 맞지 않았다.
무극자 사부가 고려 사람.
천극자 사부는 고려인이든지 아니면 후삼국시대의 인물이었다.
“그란투스 대륙은 4천 년이 훌쩍 넘게 존재했다는데… 천극자께서 신선제일 때 내려오신 건가?”
혼란스러웠다.
정리를 해 보려 노력했으나.
좀처럼 정보가 알맞게 나열되지 않았다.
그가 생각에 잠기려는 찰나.
레미엘이 죽었던 자리에 빛이 남아있던 게 보였다.
“나중에 생각하고 저것부터 회수하자.”
이준은 그쪽으로 가서 팔을 뻗었다.
[특성 무공천재(EX)가 발동했습니다.]
[모투술(S)을 사용합니다.]
[상단전의 힘이 모투술(S)을 제어합니다.]
[지나갔던 과거의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직접 죽이진 않았으나.
아직 남아있는 레미엘의 기운을 읽었다.
무공천재란 특성을 획득하고부터 모투술은 더욱 사기 스킬이 됐다.
이렇게 기운만 남아있으면 상대의 기억을 읽을 수 있었다.
‘천계가 사부님을 많이 어려워하네.’
그럴 수밖에.
선선제의 성격은 종잡을 수 없었다.
이준이 붙여준 별명인 괴짜가 맞았다.
자기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망나니였다.
염왕도 컨트롤하지 못하니.
그 누가 신선제를 말릴 수 있을까.
그래서 그런지 7대 천사들은 무극자를 꺼려 했다.
“네 사부가 천계에 경고를 보낼 거니까 안심해.”
이준의 생각이 깊어 보이자 주경아가 안심을 시켰다.
“모두가 사부님을 무서워하는 것 같아서 참 고독하신 분이구나 생각했어요.”
“착한 아이구나.”
“사모님이 옆에서 잘 챙겨주세요.”
“노력해보마.”
“이제 올라가시는 거예요?”
“인계에 너무 오래 있었더니, 지옥의 문지기가 눈치를 주는구나.”
[당신 정도의 신선이 인계에 내려오는 건 재앙이다. 신선제도 많이 곤란해할 거다.]
“그렇다는구나. 이만 올라가야겠다.”
주경아가 굉장히 아쉬워했다.
“준아.”
“네. 사모님.”
그녀에게 사모님이란 단어가 가슴에 꽂혔다.
어머니란 말을 듣고 싶었으나.
그 단어를 들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
여태까지 정체를 숨긴 이유였다.
그녀는 구천옥의 죄인.
아들이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함부로 정체를 밝힐 수 없었다.
“또 보자꾸나.”
“종종 내려오세요.”
“그러마.”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박정연과 한지유에게도 인사했다.
“준이를 잘 부탁해.”
“걱정 마세요. 제가 옆에서 챙길게요.”
“저도요….”
“잘 있으렴.”
주경아가 활짝 웃었다.
동시에 그녀의 몸이 희미해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 * *
천계.
미카엘이 있는 천상계의 문을 벌컥 열렸다.
“천왕이시어! 레미엘이 소멸됐습니다.”
“정말인가.”
“예… 레미엘에게 이어진 끈이 끊기며 사라졌습니다.”
“파천제에게 죽은 겐가.”
“아닙니다.”
“그러면?”
“마주에게 죽었습니다.”
“마주라면 주경아!? 그녀가 왜?”
“이유는 조사 중에 있습니다.”
천계는 이준과 주경아의 사이를 모른다.
아들과 엄마의 관계.
지옥계와 신선계에서도 소수만 아는 내용이었다.
정보가 느린 천계에서 알 턱이 있나.
이 사실을 모르는 미카엘은 혼란에 빠졌다.
파천제를 건드리면 신선제가 노할 거라 여겼는데.
마주 주경아가 나타났다.
서로 적이었던 사이 아닌가.
한데 파천제를 구하러 신선계에서 내려오다니.
머리가 엉클어진 느낌이었다.
“그보다 백룡왕과 녹룡왕은 확보했는가.”
“그게….”
“제대로 말하게.”
“못한 것 같습니다. 파천제가 두 군주의 기운을 흡수한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쾅!
천상계의 돌 탁자가 가루가 되었다.
미카엘의 주먹에 의해 사라졌다.
노기 가득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걸 말이라고! 군주의 소멸은 흑룡왕만이 재생할 수 있다. 흑룡왕이 나타나기 전까지 우리의 힘을 되찾지 못한다는 소리 아닌가!”
천계의 힘이 대폭 줄어든 지금.
용군주의 힘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들이 있어야만 천계가 원래의 힘으로 돌아간다.
한데 용군주가 죽었다니.
머리가 지끈 아파 왔다.
“적룡왕이나 독룡왕의 힘이라도 흡수해야 합니다.”
“알고 있네. 모든 가주를 소집하게. 지상이야.”
“천왕의 명을 받습니다.”
미카엘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용군주가 죽은 것도 굉장히 크지만.
그보다 더 큰 일이 있었다.
레미엘이 인계에 강림했다는 사실이 신선제에게 들어갈 터.
심지어 그의 제자와 레미엘이 충돌했다.
신선제의 성격으로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이를 어쩐단 말인가.”
천왕으로서 체면이 안 섰다.
신선제가 천계를 깽판 쳐도 말리지 못했던 그였다.
또다시 천계로 쳐들어온다면 위신은 똥통에 처박힐 터.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도저히 답이 안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