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제3부 21화.
쾅!
인계를 보고 있던 설극이 주먹으로 바닥을 쳤다.
그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큰 진동이 일어났다.
근처에 있는 신선들은 신선제인 그의 눈치를 봤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시지?”
“신선제께서 인계를 보시는 것 같던데….”
“제자분에게 변고가 생긴 건가?”
신선들은 설극과 거리를 두었다.
괜히 곁에 있다가 불덩이가 튈지 몰랐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설극이 지독한 살기를 뿌려댔다.
신선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기운이었다.
“저놈이 신계의 율법은 개나줘버렸구나!”
설극을 보필하는 뇌문의 여신선, 연아린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르신께서 하실 말씀은 아니셔요.”
“감히 내 아드… 아니, 제자를 해하려 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
“고정하세요.”
“내가 진정하게 생겼느냐. 저 음흉한 놈이 인계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힘을 얻었다는 뜻이다. 준이가 강하다고는 하나 인간. 권능을 가진 신을 상대하진 못할 것이다.”
설극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가 신계를 날 뛸 수 있었던 건 천계가 힘을 잃었기 때문.
만약 천계가 힘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으면 미쳐 날뛰진 못했으리라.
지금은 알맹이가 빠져 있었으나.
옛날의 천계는 강한 힘을 보유했었다고 한다.
“그래도 어르신께서 직접 인계에 강림하는 건 불가능해요.”
“저놈도 인계에 강림했지 않느냐.”
“레미엘과 어르신의 무게는 하늘과 땅 차이예요.”
최상위 신선이 인계로 내려간 것과 신선계의 왕이 직접 내려가는 차이.
왕이 움직인다면, 다른 층계의 왕도 움직여야 했다.
그래야지만 세상의 균형이 맞았다.
“내가 가지 않으면 준이가 위험하다. 저 아이가 죽는 꼴을 절대 보지 못한다.”
연아린도 그가 얼마나 이준을 아끼는지 안다.
이준 때문에 신선제인 그가 인계로 강림하려는 적이 한두 번인가.
그를 말리느라 매번 진땀을 뺐다.
“신선제께서 안 나셔도 나설 자는 많습니다.”
“아무리 너라도 지금의 레미엘은 상대하지 못할 거다.”
설극은 자존심 상할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었다.
이준의 생사와 관련된 일.
상대의 기분 따위를 생각하면서 뱉을 정도로 한가하지 않았다.
“제가 상대하지 못하면 다른 신선들도 상대하지 못할 거예요.”
“그래서 내가 움직여야 한다고 말한 것이니라.”
“하지만 딱 한 분 계세요.”
“내가 모르는 강한 신선이 있느냐?”
설극이 눈을 끔뻑였다.
뇌문의 여신선, 연아린보다 강한 신선이 있었으나.
생각을 해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마선이라면 레미엘을 제압할 수 있어요.”
“경아 말이냐?”
그녀의 말에 설극의 눈이 커졌다.
주경아는 하루가 다르게 강해지고 있었다.
구천옥의 광기가 그녀의 선기로 전환됐다.
선기는 다시 마기가 되어 그녀의 힘을 증폭시켜주었다.
뿐인가.
깨끗하고 맑은 마기는 마왕의 힘까지 흡수했다.
이 힘은 아직까지 완벽하게 제어하지 못하지만.
이게 아니더라도 그녀는 신선계에서 설극 다음으로 강했다.
“마선이라면 믿고 맡기실 수 있을 거예요.”
연아린의 대답에 설극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경아는 이 자리에 없었다.
“아까부터 경아가 안 보이는데 어디 갔는지 아느냐.”
“어르신의 곁에 계시지 않았어요?”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구나.”
설극과 연아린이 주변을 살펴보고 있을 때였다.
신선경의 호수가 거칠게 출렁였다.
그리고 그 거울 속에 한 여자가 비추자.
“어, 어르신! 저기 좀 보세요!”
연아린이 기겁하며 외쳤다.
설극의 고개가 돌아았다.
그의 눈동자에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겨, 경아!?”
주경아는 이미 인계로 강림한 상태였다.
꺼림직한 건 그녀의 표정에 감정이 드러나 있었다.
잔뜩 화가 난 얼굴에 설극이 인상을 찌푸렸다.
“난리가 나겠구나.”
“그, 그래도 일은 잘 해결되겠어요.”
주경아는 아직까지 지옥계의 감시 대상이었다.
왕의 권한을 사용해서 그녀의 죄가 사면됐다고는 하나.
주경아는 마왕이 됐던 자였다.
마계의 힘이 몸속에 남아있는 이상.
지옥계는 그녀를 계속해서 감시할 것이다.
이 때문에 함부로 신선계 밖으로 나가면 안 되는데…
그녀가 멋대로 인계에 강림한 거다.
아들의 일로 빡쳐서 말이다.
신선제인 설극도 그녀를 말릴 수 없었다.
그녀를 마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
이준뿐이었다.
이준은 전생에 그녀의 태어나지 못한 아들이었으니까.
* * *
삼두는 불안함을 느꼈다.
그는 지옥계의 서열 2의.
인계의 흐름을 읽을 수 있었다.
그의 눈에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이 보였다.
레미엘이 내려왔을 때와는 다른 기둥.
하나 그 빛이 희미해 이곳에 있는 모두가 알아차리지 못했다.
[신선제한테 그렇게 당하고도 그를 모르다니.]
“그 입 다무는 게 좋소. 말했다시피 난 이전의 내가 아니오.”
[벽창호 같은 놈. 말이 안 통해.]
레미엘의 행동에 삼두의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그의 눈에 보이는 기둥이 점점 선명해졌다.
완연한 색을 띠었을 때는 레미엘도 이상함을 눈치챘다.
“흩어져!”
레미엘의 외침에 천사들이 날개를 펼치며 산개했다.
쾅!
그들이 있는 중앙에 하얀 기둥이 내려앉았다.
기둥이 사라지고 그 안의 모습이 드러났다.
“신선?”
레미엘의 눈썹이 휘었다.
기둥 아래에 그려진 문양.
신선이 강림할 때나 나타나는 표식이었다.
“가주님. 신선들은 모두 하얀 옷을 입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 여자는 검은 비단옷을 입고 있습니다.”
선녀들이 입을 법한 하늘하늘거리는 날개옷을 입었는데.
다른 건 색이 검다는 것이다.
신선들의 복장은 전부 하얀색.
검은 옷을 입은 신선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유독 눈에 띄는 복장과 얼굴.
모두의 시선이 주목될 정도로 얼굴이 예뻤다.
박정연과 한지유가 한 수 접고 들어갈 만큼 새로 나타난 여자는 아름다웠다.
그녀가 바짓단을 붙잡고 걸어갔다.
사뿐사뿐 걷는 걸음걸이.
몸에 우아함이 배어있었다.
그녀가 레미엘을 지나치려 했을 때였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레미엘이 정중히 말했다.
신계에 관계된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예의 있게 행동하는 게 그였다.
하나 주경아는 그를 무시하고 지나쳤다.
“감히 신선 따위가 천계의 최상위 신인 레미엘을 무시한단 말이냐!”
모든 신계는 계급이 존재했다.
신선계도 마찬가지.
소매에 그려진 동백꽃의 숫자로 서열을 판가름했다.
신선제의 신선에게는 다섯 개의 동백꽃을.
최상위급 신선에게는 네 개의 동백꽃을.
관리급 신선에게는 세 개.
그 아래부터는 하급으로 두 개와 한 개의 동백꽃을 수 놓는다.
한데 여자의 소매에는 자수가 없었다.
그래도 천계의 천사가 버럭 소리친 것이다.
주경아의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저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을 만나는 자라니 피는 사양할게요.”
목소리에 은은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아들과 만나는 자리는 피로 얼룩지기 싫은 주경아였다.
화를 꾹꾹 누르며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에 레미엘의 수하들이 입을 열었다.
“가주, 명을 내려주십시오. 저 신선을 가주님 앞에 무릎 꿇리겠습니다.”
“신의 권위를 세우소서.”
수하들의 외침에도 레미엘은 섣부르게 말을 하지 못했다.
‘하급 신선? 절대 아니야. 최상위 신선의 무력을 가지고 있어. 헌데 어째서 소매에 자수가 없는 거지?’
이게 의문이었다.
함부로 명령을 내릴 수 없는 이유.
신선이 인계로 혼자 내려온 것도 이상했다.
신선계의 법도가 바뀌었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찝찝한 마음이 계속 드니.
레미엘이 수하를 향해 눈짓했다.
명령을 기다리던 다섯의 천사가 주경아를 향해 움직였다.
그들의 손에는 각양각색의 무기가 들려 있었다.
한 천사가 날개를 활짝 편 채 주경아를 향해 지팡이를 겨누자.
철의 가시가 여러 갈래로 쏘아져 나오며 그녀에게 폭사했다.
쾅!
나머지 네 천사가 먼지구덩이를 향해 몸을 날렸다.
먼지 안으로 사라진 네 천사가 다시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하나 같이 제 몸을 가누지 못한 채 공중에 떠 있었다.
“으읍!”
“모, 몸이 말을 안 들어.”
“이거 놓지 못해!”
그들이 아둥바둥하고 있는 사이.
먼지가 걷히고 주경아의 모습이 드러났다.
상처 하나, 아니 먼지 하나 묻지 않았다.
그녀는 손매에 두 손을 넣은 상태 그대로였다.
“조금 더 살려주겠다 해도 죽겠다고 하니 소원대로 해줄게요.”
“어억!”
“몸이 부풀어 오고 있어!”
“가, 가주님 살려주십시오.”
그들이 애원했으나.
퍼엉!
푹죽처럼 일제히 터져버렸다.
그녀가 익힌 무공은 천마신공.
기공에서도 최고봉에 속한 무공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정도인이 아닌 마도인이었던 여자.
구천옥에서 억겁의 세월을 견뎠으며 마왕까지 됐던 사람이었다.
이것도 아들을 만난다고 손속에 사정을 둔 것이다.
“저와 이야기하고 싶은 건 알겠지만 당신들에게는 따로 볼 일이 있으니 그때까지 기다리세요.”
그녀가 경고하자 레미엘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 * *
[주, 주경아라니!]
삼두의 안 좋은 예감이 맞아 떨어졌다.
주경아의 죄가 없어졌다고는 하나.
그녀는 억겁의 세월동안 구천옥에 갇혀있던 죄수이자 마의 주인이었다.
그런 그녀가 인계에 강림한 것이다.
“저분이 왜 오셨지?”
이준과 삼두가 놀라하고 있는 사이.
주경아가 그의 앞에 서며 웃었다.
“준아. 오랜만이구나.”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네가 곤란에 처한 것 같아서 왔어.”
“사부님도 아세요?”
이준의 물음에 주경아가 빙긋 웃기만 했다.
‘사부님 모르게 오셨구나.’
그는 무극자와만 이야기를 나눈 게 아니었다.
간혹 주경아와도 이야기를 나눴다.
처음에는 그 횟수가 적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대화하는 날이 많아졌다.
이제는 농담 따먹기까지 할 정도였다.
“사부님이 곤란해하시면 안 되는데….”
“괜찮아. 난 신선계 소속이긴 해도 지옥계 감시 대상이라 자유로워.”
“그렇담 다행이에요. 사부님 곤란하게 하시면 안 돼요. 언제 또 토라질지 몰라요. 사부님 은근 뒤끝 길거든요.”
“호호호. 나한테는 뒤끝 못 부릴 텐데?”
“그게 다 저한테 날아온다고요.”
“그럼 내가 가가를 혼내지 뭐.”
“저 죽는 꼴 보고 싶으세요? 제발 참으세요.”
이준의 말리는 행동에 주경아가 소매로 입을 가리며 미소 지었다.
적이 눈앞에 있다는 걸 잊은 걸까.
경계가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
“준이 넌 여전히 해맑구나.”
“사모님도 변한 게 없어요. 아니, 더 예뻐지셨어요.”
“능청스럽기까지.”
그녀가 이준에게서 박정연으로 시선을 옮겼다.
“네가 정연이구나. 어쩜 이리 예쁘게 생겼느냐.”
“사부님 와이프. 사모님이셔.”
“안녕하세요! 박정연이라 합니다.”
그녀의 인사에 흑염마조가 중얼거렸다.
[마치 부모한테 처음으로 여자친구를 소개하는 자리 같군.]
청룡이 이에 동감했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지.]
[흥. 그 아이보다 한지유가 더 잘 어울린다.]
현무가 코웃음을 쳤다.
그가 밀고 있는 사람은 한지유라서 그런지 심통을 부렸다.
[뭐가 됐든 지금은 초 치지 말고 조용해!]
삼두가 버럭했다.
부모와 자식의 재회.
괜한 이야기로 모자 상봉을 방해해선 안 됐다.
청룡과 현무도 입을 다물었다.
“준아.”
“네.”
“지유도 섭섭하지 않게 챙겨주고 그래.”
“그럴…”
이준의 목소리가 끊겼다.
바닥에서 쇠가 치솟았기 때문이다.
그가 손을 뻗어 한지유를 잡으려 했으나.
바닥을 뚫고 나오는 철이 더 빨랐다.
한지유의 몸이 뚫리려는 순간.
어느새 나타난 주경아의 손이 치솟아 오른 철을 그대로 뭉개버렸다.
주경아는 위기를 넘긴 한지유를 안아 들며 바닥에 내려앉았다.
“준아.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꾸나.”
“도와드릴게요.”
“넌 저 아이들을 보호하고 있으렴.”
“혼자 괜찮으시겠어요?”
“너와 싸웠을 때의 나를 생각하면 큰코다칠 거야.”
신계의 시간은 굉장히 빠르게 흘렀다.
그 말은 강해지는 것도 빠르다는 뜻.
옛날의 주경아가 아니었다.
“좋은 시간을 방해한 대가는 많이 클 거다.”
그녀는 레미엘에게 예의를 갖추는 것도 집어치웠다.
레미엘은 자신의 아들과 예비 며느리를 공격한 적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