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3화
[고유 스킬을 삭제합니다.]
[혼원신공을 삭제했습니다.]
[무극기를 삭제했습니다.]
[무극군림보를 삭제했습니다.]
……
……
……
[진천무를 삭제했습니다.]
[일반 스킬을 삭제합니다.]
[흡성공을 삭제했습니다.]
[전륜마멸진을 삭제했습니다.]
……
……
……
[수미천왕신공을 삭제했습니다.]
이준의 모든 무공이 삭제됐다.
더 놀라운 건 따로 있었다.
[특성 ‘신살의 운명을 받은 파천의 길 루트’를 폐쇄합니다.]
[특성 ‘무공천재’를 획득했습니다.]
루트창마저 없어졌다.
그렇다고 무공이 아예 사라진 건 아니었다.
대신 새로운 게 생겼다.
[사신문의 무공 진천사신무(ex)가 새로이 등록되었습니다.]
[사신문의 사신기(ex)를 배웠습니다.]
[사신문의 진천무(ex)를 배웠습니다.]
[사신문의 사신선(ex)을 배웠습니다.]
“음….”
천극자가 신음을 했다.
평생을 수련한 정수를 이준에게 넘겼다.
거기다 이준의 몸에 든 마력을 없애고 대신 차고 넘치는 내공을 심장에 채워 넣었다.
이것만해도 엄청난 공부.
천극자 정도의 무인이 아니고서는 아무나 흉내 낼 수 없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그가 눈을 감고 있는 이준을 깨웠다.
“일어나보거라.”
이준의 감겨 있던 눈꺼풀이 스르륵 떠졌다.
“태사… 부님?”
“날 알아보겠느냐.”
이준은 왕휘의 눈을 통해 천극자를 볼 수 있었다.
천살성의 할아버지가 태사부님이라는 걸 처음 알게 됐다.
사부에게 귀가 따갑게 들었던 태사부의 강함.
소름이 끼쳤다.
전율스러울 정도로 강한 사람.
무극자 사부조차도 이길 수 없는 사람 같았다.
“조사전에 걸려있는 족자로 처음 봤어요.”
“그럼 이야기가 편해지겠구나. 이 할애비에게는 시간이 많이 없단다.”
이준은 핏기 한 점 없는 천극자의 얼굴을 봤다.
곧 죽을 사람처럼 생기가 없었다.
무엇보다 몸이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천극자 태사부 말대로 시간이 많아 보이지 않았다.
“이제 네게는 천살성이 없다. 그 말은 앞으로 널 대신해서 싸워줄 힘이 없다는 말이지.”
“아….”
이준은 깨어나자마자 느꼈다.
무언가 공허했는데 천살성이 원인인지 뒤늦게 알았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무공에 잡아먹힐 것이다.”
“천살성 말고 또 누가 있나요?”
“네가 익힌 무공은 사신의 힘으로 만들었단다.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워낙 강한 힘이지. 이 무공에 잡아먹히지 않게 긴장을 늦추지 말거라.”
강한 힘인 대신 대가가 따르는 것.
사신의 힘이 그랬다
파멸겁과 청룡무의.
혼원반지와 호왕신.
사대 기보는 장비이기 이전에 사신의 힘이 폭주하지 못하게 하는 보호 장치였다.
“넌 아마도 평생을 마기와 싸워야할 것이다.”
마신지체를 타고난 자의 숙명이었다.
천살성이 사라져도 마기는 주인을 영원히 따라다닐 터.
정기와는 달리 마기는 제 주인이 약해지면 공격을 해 온다.
특히 무극자가 만든 혼원신공이 그랬다.
“물론 네가 약한 모습만 보이지 않으면 이만한 아군이 없… 쿨럭쿨럭!”
천극자가 기침을 했다.
입을 가린 손바닥엔 피가 묻어 있었다.
“괜찮으세요?”
“잠깐 무리해서 그러니 신경 쓰지 말거라.”
그가 멀쩡한 다른 쪽 손으로 이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제자의 아들.
환생해서 지금은 다른 아버지가 있으나.
그래도 제자의 아들이었다는 건 변함이 없었다.
“이렇게 보니 어렸을 적의 극이를 똑 닮았구나.”
“제가요? 전혀 달라요. 사부님처럼 전 꼰대는 아니라고요.”
“꼰대?”
천극자는 인계의 말투를 전혀 알지 못했다.
무극자는 각성자 시스템으로 현시대를 빠르게 파악했으나.
천극자는 아니었다.
“권위적인 사람을 비꼬는 단어에요.”
“그게 꼰대라는 말이냐?”
“네.”
“하하하.”
천극자가 호탕하게 웃었다.
이준에게 평생을 갈고 닦은 정수를 전해줬음에도.
웃음으로 인해 천지가 진동했다.
“극이가 한 꼰대하지.”
“그런데 사부님은 자기보다 태사부님이 더 꼰대라고 하셨어요.”
“그 녀석이 그랬단 말이냐. 고얀지고. 올라가서 녀석의 엉덩이를 차버려야겠구나.”
“제가 말한 건 비밀로 해주세요.”
“네 사부에게는 절대 말하지 않으마.”
영락없이 사조와 사손의 대화였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좋은 분위기는 계속 이어졌다.
천극자가 곧 사라질 거라는 걸 인지한 이준이 쉼 없이 말을 걸었다.
‘녀석. 극이처럼 정이 많아서는….’
천극자는 인정이 많은 이준을 보다가 기절해 있는 주경아가 생각났다.
주경아는 이준의 엄마였다.
그녀가 복수하려는 이유 중 하나.
아니, 가장 결정적인 이유였다.
어미에게 아이는 목숨보다 소중한 존재였으니까.
‘이 아이에게 준이의 정체를 알려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구나.’
마왕의 힘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설극에게 복수하려고 발악을 할 터다.
주경아의 분노를 잠재울 방법이 있긴 있었다.
염라대왕의 증언.
그의 말이면 분노가 조금은 옅어질 거다.
태어나지 못한 아이를 환생시켰다고 하는데.
그 어떤 어미가 화를 낼까.
오히려 고마워야 했다.
환생은 죄업을 다 닦은 자만 받는 일종의 축복이었으니까.
‘그렇다고 내 말을 믿을지도 모르겠고.’
천극자가 고민에 빠져 있을 때였다.
그의 귀로 염라대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이 되었다. 이제 그만 올라와라. 네놈이 인계에 더 있다간 천계에서 폴짝 뛸 것이다.]
[알았네.]
천극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경아를 깨우는 걸 포기했다.
시간도 없을뿐더러 지옥계에서 가르쳐줘도 늦지 않다고 여겼다.
“준아.”
“네 태사부님.”
“극이를 잘 돌봐다오.”
“태사부님이 계시잖아요.”
“나도 늙었단다. 제자를 계속 돌봐줄 기력이 이제는 없구나.”
서글픈 음성이었다.
천극자의 부탁에 이준이 당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격이 괴팍하지만, 제자인 제가 당연히 모셔야죠. 저한테 맡기세요.”
“믿으마.”
그가 이준의 어깨를 두드렸다.
따뜻한 손길이었다.
그의 몸이 절반가량 사라질 쯤 천극자의 전음이 이준에게 들렸다.
[저놈은 네가 꼭 죽여야 한다.]
[그것도 제게 맡기세요.]
천극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애로운 음성이 대번에 분노로 바뀌었다.
[저놈이 네 사부를 고통받게 한 원흉, 백무생이다. 다른 사람이 아닌 네 손으로 꼭 죽여야 할 놈이니라.]
[백무생!]
이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사부와 마주를 갈라놓은 악적.
그가 아니었다면 무극자 사부는 파천혈신이란 이명을 얻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마주와 행복하게 살았을 터.
백무생은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인간이었다.
[잘 알아들었느냐.]
[네. 제가 꼭 지옥으로 보낼게요.]
이준의 눈이 활활 타올랐다.
백무생이 왜 오만의 수장인 알제스 루퍼가 되어 있는지는 모르나.
저자를 보자 심장이 두근거리는 이유를 알게 됐다.
무극자 사부의 원수는 자신의 원수 이기도 했다.
“아쉽지만 헤어져야 할 시간이구나.”
“짧은 시간이었지만 즐거웠어요. 태사부님.”
“나도 널 보아 즐거웠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천극자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마왕 주경아의 모습과 함께 말이다.
남은 건 알제스 루퍼, 백무생뿐이었다.
* * *
인계에서 지옥계로 소환된 천극자가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누군가를 찾는 모습이었다.
“왕휘를 찾는 거냐.”
“내 손자는 어디에 있는 겐가.”
“이미 팔대지옥에 들었다.”
“벌써 말인가? 내가 한발 늦었구나.”
천극자의 얼굴이 굳어졌다.
손자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었다.
“이 할애비의 얼굴도 보지 않고 갔어. 못난 놈 같으니라고.”
인계에서 대화를 나누니 욕심이 생겼다.
잠깐이라도 예전의 모습을 직접 보고 싶었달까.
하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내가 지옥계로 오기 전까지만이라도 판결을 미뤄주지 그랬나.”
“나도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설극이 염라대왕의 말을 가로챘다.
“사형이 염왕에게 부탁한 겁니다.”
“사형?”
천극자가 설극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되었습니다.”
“극이 네가 그럴 성격은 아니고 휘아가 그랬더냐?”
“맞습니다.”
설극 또한 왕휘와 성격이 비슷했다.
하나 백무생으로 인해 파천혈신이 되고 나서부터 성격이 바뀌었다.
완전히 다른 사람.
남에게 먼저 다가가지 않게 된 것이다.
“허허.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구나. 잘 갔더냐.”
“홀가분한 얼굴이었습니다.”
“그러면 되었다. 녀석이 괜찮다 하면 된 것이야.”
천극자가 빙그레 웃었다.
많은 짐을 내려놓은 미소였다.
“극이는 이 아이부터 챙기거라.”
그가 설극에게 주경아를 건넸다.
설극은 주경아를 조심스럽게 받아들었다.
천극자가 손가락을 튕기자 주경아의 몸이 들썩였다.
“으음….”
“경아. 정신이 들어?”
주경아의 감긴 눈꺼풀이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다, 당신!”
정신을 차린 그녀가 설극에게 기댄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녀가 두 손에 마력을 모았다.
“소용없느니라. 흑마력은 내가 전부 없앴다.”
주경아가 주위를 살폈다.
거대한 대전 안.
의자에 앉아 있는 염라대왕이 보였다.
“염라전… 절 방해하지 않겠다면서요!”
주경아가 천극자에게 버럭 소리쳤다.
“그랬지.”
“이게 방해하지 않은 건가요?”
“노부가 경고하지 않았더냐. 극이를 아프게 하지 말라고. 그게 아니라면 뭐든 해도 좋다고 했다. 하지만 너는 노부의 말을 어겼어.”
“억지에요!”
“억지는 네가 부리고 있는 것이다.”
그때였다.
탕탕탕!
염라대왕이 직인인장으로 책상을 치며 말했다.
“여긴 신성한 염라전이다. 구천옥의 죄인이 돌아왔으니 우선 판결을 내리겠다.
“선계의 권한을.”
염라대왕이 설극의 말을 막았다.
“판결이 먼저다. 권능은 이후에 써도 늦지 않아.”
설극이 천극자를 바라보자 천극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설극이 뒤로 물러났다.
“여기서 포기할 순 없어!”
주경아가 설극에게 달려들었다.
마왕의 흑마력은 없어도 내공은 그대로였다.
그녀가 천마신공의 내기를 손에 두른 채.
설극을 향해 살수를 펼쳤다.
하나 이곳은 염라대왕이 있는 염라전.
망자의 죄를 결정하는 곳이었다.
이런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던지라.
철컥!
쇠사슬이 그녀의 사지를 옭아맸다.
“이거 놔!”
그녀가 발버둥 쳤으나 쇠사슬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염라대왕이 책을 폈다.
“너는 구천옥을 탈출한 중범죄를 일으켰다. 그것도 모자라 마계로 가서 마왕의 힘을 취하고 그걸 바탕으로 인계를 도탄에 빠트렸다. 인정하느냐.”
“어떻게든 당신을 꼭 죽이고 말거야!”
그녀는 염라대왕의 말에 응답하지 않았다.
대신 설극을 향해 저주를 퍼부었다.
“균열로 인한 사망자 수가 수백만에 달한다. 인계를 아주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어.”
그러거나 말거나.
염라대왕은 그녀의 죄를 계속 읽어갔다.
이준이 막지 않았다면 사망자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을 터였다.
“넌 지옥에서 가장 큰 죄를 범했다. 환생은 불가. 평생을 구천옥의 심처에서 죄를 받아야 할 것이다. 주경아에게 구천옥 무기징역을 명한다.”
염라대왕이 판결을 내었다.
원래 판결이 나면 형을 집행하는 관리관이 나타난다.
한데 대전으로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제 네 차례다.”
염라대왕이 설극을 향해 말했다.
설극은 아련한 눈을 한 채 입을 열었다.
“나 선계의 왕은 주경아의 죄를 씻는 데 권능을 사용하겠소.”
“정말 사용해버렸군.”
염라대왕이 설극을 보며 중얼거렸다.
왕의 권한을 사용해버렸다.
고작 죄인을 구하기 위해서.
역대 선계의 왕들이 이 사실을 알기라도 하면 뒷목을 잡고 쓰러질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