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했더니 무공 천재-598화 (598/705)

제581화

천극자가 인계로 내려온 이유는 손자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의 계획에서 천살성인 손자는 이준을 보호해주는 역할 뿐.

주경아를 이기는 게 아니었다.

손자가 이준과 완전히 다른 자아라지만.

현재 손자는 이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한 채 주경아를 죽여선 안 됐다.

‘태어나지 못한 아기라고는 하나 아들이 제 엄마를 죽이게 해선 안 되지.’

천극자는 염라대왕만 아는 비밀을 알고 있었다.

신계의 시간은 인계의 시간보다 굉장히 빨랐다.

인계의 하루가 신계에선 100년.

인계의 1년은 신계로 치자면 3만6천500년.

천극자가 신선제가 되고 인계를 내려다본 지 오래였다.

그는 신선경 호수에서 제자의 비극을 눈으로 직접 보았다.

인계로 내려가고 싶었으나.

선계의 왕이 됐다.

이곳을 내팽개치고 갈 수 없는 입장.

제자가 슬픔에 사무치고 아파하는 모습을 계속 지켜봐야 했다.

결국에는 무신에서 파천혈신이란 이명을 얻게 되고.

무림에서 공포로 불리는 대명사가 됐다.

이 모든 게 자신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자책하며 세월을 보내고 있는데 세상이 어그러졌다.

마치 세상이 재창조된 것같은 느낌.

이게 무엇인지 알았을 때부터 이 판을 짰다.

염라대왕이 숨겼던 비밀을 알게 됐으니까.

염라대왕은 이 비밀을 혼자 안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틀렸다.

주경아가 낳지 못하고 죽어 환생한 아이가 이준이라는 걸 진즉 알았다.

설극의 혼원신공은 아무나 익히지 못하는 무공이다.

마신지체로 태어났다고 해도.

천살성을 타고났다고 해도 불가능했다.

혼원신공은 천지간의 기운을 품기도 했으나.

사람을 가렸다.

영혼.

사신문의 근본은 전승자의 영혼을 구분했다.

혼원신공은 사신문의 무공에서 태어난 파편.

제자인 설극의 성격이 고스란히 담긴 무공이었다.

그래서 제자의 무공을 다른 이들이 배우지 못한 거다.

사신문의 무공은 계승자의 영혼을 구분했다.

파편인 혼원신공도 마찬가지.

설극이 무림에서 현대의 이준을 찾을 수 있었던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이 사부가 인과율을 바로 잡아주겠느니라.’

손자는 어차피 죽은 몸.

다시 살아날 수 없었다.

그럴 바에는 손자를 희생해서 제자의 행복을 바라는 게 낫지 않나.

무엇보다 자신의 욕심때문에 손자가 언제까지 천살성으로 살아갈 순 없었다.

천살성에 갇힌 손자의 자아를 거두고, 주경아의 마기를 빼앗는 것.

자신이 해야할 일이었다.

주경아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할애비가 원망스럽지 않더냐.”

천극자는 무극자가 이준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손자에게 했다.

“무엇이 원망스럽겠습니까. 할아버지는 절 보고 싶어서 이렇게 만드신 게 아닙니까.”

“맞… 다. 그래서 인과율이 어긋났지.”

“할아버지가 제 앞에 나타났다는 건 어긋난 인과율을 바로잡으시려는 거군요.”

“네게는 미안하구나. 이 할애비의 욕심 때문에 너만 고통을 받았어.”

“그런 말하지 마십시오. 오랜만에 좋았습니다.”

그토록 차갑고 살기를 뿜어내던 왕휘가 웃었다.

억지로 미소를 짓는 게 아닌, 참 웃음.

왕휘는 할아버지를 다시 봐서 정말로 기뻤다.

그가 손가락으로 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녀석의 선함으로 인해 옛 기억을 계속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다른 놈이었다면 살육에 미친 악귀가 됐을지도 모릅니다.”

“넌 천살성과 다른 뜻을 지닌 존재이다.”

“알고 있습니다. 할아버지께 그리 만드셨지 않습니까. 그게 더 무섭습니다. 신을 죽이는 악마이지 않습니까. 여기서 끝나는 게 저로선 좋습니다. 다만….”

왕휘가 고개를 돌려 주경아를 보았다.

아직도 쓰러져 있는 그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이 녀석과 약속을 했습니다. 마왕을 죽여주겠다고 말입니다.”

“네가 저 아이를 죽이면 안 된다.”

“이유가 있습니까?”

“이준은… 주경아의 태어나지 못한 아이의 환생이라 할 수 있다. 네가 저 아이를 죽이면 안 된다고 한 이유를 알겠느냐.”

“짓궂군요.”

“염왕의 배려라 할 수 있지. 그에게 너무도 많은 실례를 했어.”

주경아는 천극자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왕의 권능이 발현된 지금.

그녀는 이성이 없었다.

마기에 삼켜진 대악마만 있을 뿐.

주경아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저 아이부터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줘야겠구나.”

천극자가 주경아에게로 몸을 돌렸다.

* * *

염라대왕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주경아의 아이가 이준으로 환생했다는 걸 저놈이 어찌 안단 말이냐.”

오직 자신만이 아는 사실이었다.

지옥에서도 특별 관리 대상.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될 비밀이었다.

혼란스러워하고 있는데 무언가 번뜩 떠올랐다.

“설마! 내가 왕의 권한을 사용한 것까지 알고 있었던가!?”

염라대왕은 재위 동안 딱 한번 사용이 가능한 신의 권능.

왕의 권한을 사용했다.

너무도 허무하게 죽은 이준을 위해서 말이다.

이준이 혈족 계승을 받지 못한 건 핏줄이 나빠서가 아니었다.

혈통이 너무 좋기 때문.

무려 천극자의 제자와 천마의 딸의 피를 이어받은 아이였다.

이준이 황보세가의 무공을 계승한 신력권가의 무공을 이어받기에는.

내공이 너무도 형편없었다.

그 때문에 아예 혈족 계승이 안 된 것이다.

혈통이 너무 좋아 생긴 비극.

이 또한 인과율이 망가져서 생긴 일이었다.

파천혈신의 아들을 환생시켰으나.

너무도 허무하게 죽었다.

염라대왕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

이 사실이 만약 파천혈신의 귀에 들어간다면.

혹시라도 구천옥의 주경아에게 알려진다면 엄청난 파문이 일어날 터.

인과율이 아예 망가질 수도 있었다.

자신의 권능을 사용해 이준을 회귀시킨 것도 이러한 이유였다.

마침 천극자도 권능을 사용해 파천혈신을 비롯한 몇명에게 상태창을 부여했다.

“그래서 천극자가 왕의 권한을 사용했던 거구나! 모든 걸 알고 있었으면서 여태 모른 척 벌을 받고 있었다니!”

염라대왕이 부들부들 떨었다.

뭔가 농락당한 기분.

그가 짠 판에 놀아난 꼴이었다.

염라대왕이 화를 꾹 참고 있을 때였다.

쾅!

염라전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대전의 문을 부수고 나타난 한 사람.

선계의 왕인 설극이었다.

“경아의 아들이 준이라니! 무슨 말이오.”

설극의 눈에선 짙은 살기가 번들거렸다.

염라대왕이 이마를 부여잡고 말았다.

인계를 지켜보고 있던 설극도 알게 됐다.

“말 그대로다. 본왕이 저 아이를 불쌍히 여겨 환생을 시켜주었다. 이게 그렇게 화낼 일이냐.”

염라대왕이 은은한 분노를 보였다.

지옥계가 무슨 동네 북인지.

사제기잔이 번갈아 가면서 제집 드나들듯 오는 게 아닌가.

지옥계의 위엄이 떨어졌단 증거이기도 했다.

‘일 사자와 수문장을 닥달해서 강하게 만들어야겠어.’

공동 서열 2위가 나약하니.

외부에서 지옥계를 얕잡아보는 거라고 핑계를 돌리는 염라대왕이었다.

“왜 내게는 말해주지 않았소?”

“나만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사부님은 알고 있지 않소!”

“그놈이 어떻게 알았는지는 본왕도 자세히는 모른다.”

“당신이 아는 것을 말해주시오.”

설극은 화를 가라 앉히고 염라대왕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준이 환생을 했는데 너무도 허무하게 죽은 것부터.

권능을 사용해 회귀시킨 것과 이때 천극자가 권능을 사용했다는 것까지 말했다.

잠자코 듣던 설극이 이마를 좁혔다.

“내가 무공을 전해줄 아이를 찾다가 일어난 일이 아니었어….”

설극은 자신으로 인해 이준이 회귀했다고 생각했다.

무림에서 상태창을 가진 것도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일.

회귀도 가능하리라 여겼다.

자신은 깨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한데, 아니었다.

이 모든 게 염라대왕과 천극자 사부님으로 인한 일.

“사부님의 생각은 대체 무엇인지.”

“네 사부가 모든 짐을 떠안고 가려는 것 같다.”

“사부님이….”

이준이 아들의 환생이면 싸우는 게 불가능했다.

사실 손을 나누는 것조차 패륜.

이를 위해 천극자 사부가 나선 것이다.

“내가 인계에 내려 가야겠소.”

“네 사부의 노력을 헛되게 하지 마라.”

“이때를 위해 신선제도 버리고 선계와 구천옥에서 억겁의 세월을 산 놈이다. 너 하나 때문에 모든 걸 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네 사부의 뜻을 짓밟으려면 인계로 내려가거라.”

염라대왕의 말에 설극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제 손자까지 희생시키면서 지켜주려 한 행복.

이 사실을 깨달았기에 무작정 행동할 수 없었다.

“크윽….”

무극자가 주먹을 꽉 쥐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한탄스러웠다.

“이곳에서 기다리다 보면 놈이 올라올 것이다. 그때 이야기를 놔눠 봐라.”

* * *

천극자가 다가오자 어떻게든 일어선 주경아였다.

그녀가 거칠게 팔을 휘둘렀다.

허공에 뭉친 검은 아지랑이가 한곳으로 뭉쳤다.

흉측하고 거대한 손 모양의 검은 기운이 천극자를 할퀴었다.

쿵.

천극자가 뒷짐을 한 채 한 손으로 가뿐히 막았다.

“쯧쯧. 그토록 말렸건만.”

그가 활짝 편 손으로 주경아의 이마를 짚었다.

그녀의 마기가 천극자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흐윽!”

주경아가 격렬히 저항했다.

하나 소용없었다.

상대는 천극자.

신계의 왕들조차 어쩌지 못하는 절대적 존재였다.

이제 갓 마왕이 된 그녀가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주경아의 몸에서 흘러나온 마기가 아우성쳤다.

허공에 만들어진 검은 형상.

악마가 자신을 놔달라고 발악을 했다.

“꺄아아악!”

그녀의 비명과 함께 일그러진 하늘에서 마계의 모습이 나타났다.

“저항하지 말거라. 그래야지만 온전한 정신으로 돌아갈 수 있어.”

마계가 점점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주경아의, 그녀의 안에 있는 악마의 마지막 저항이었다.

여태 감겨 있던 천극자의 눈이 떠졌다.

백안.

지옥의 염왕과 대치할 때도 보이지 않은 눈동자였다.

그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패기가 나왔다.

주경아의 마기는 천극자의 패기로 잔뜩 오므라들었다.

마왕의 흑마력이 대항도 못 하고 숨어버리기까지.

얼마나 두려웠으면 주경아의 몸에서 벗어나려 할까.

천극자는 마왕의 흑마력을 죄다 흡수해버렸다.

털썩.

주경아가 힘없이 쓰러졌다.

천살성 왕휘가 천극자에게 다가왔다.

“끝났군요.”

왕휘는 너무도 당연한 얼굴을 했다.

그에게 할아버지는 고금제일인.

신살룡인 자신보다 훨씬 강한 무인이었다.

할어버지라면 마왕이라도 쉽게 쓰러트릴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 네 차례구나. 휘야.”

천극자는 슬픈 음성으로 말했다.

왕휘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 준비 됐습니다.”

“잠깐이라도 봐서 이 할애비는 기쁘구나.”

“저도 할아버지를 봐서 좋았습니다. 강녕하십시오.”

“일이 마무리가 되면 곧 따라가마.”

“최대한 늦게 오십시오. 소멸하는 게 뭐가 좋다고 빨리 오려 하십니까.”

왕휘의 말에 천극자가 희미하게 웃었다.

아픔이 가득한 미소였다.

천극자가 그의 단전에 손을 얹었다.

백안이 다시 번쩍였다.

“흡!”

왕휘의 눈이 커졌다.

단전 안.

혼원신공이 자리 잡은 깊은 구석에서부터 흘러나온 기운이 천극자의 손으로 들어갔다.

“으윽…!”

왕휘가 고통스러워했다.

존재하고 있던 자아가 점점 소멸되고 있었다.

이준과 함께 싸웠던 기억도.

옛날 신살룡 때의 기억도.

전부 사라지고 있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그가 힘겹게 말했다.

“할아버지의 컥…! 소, 손자로 태어나서 자랑…스러웠습…니다….”

“고맙고…”

천극자는 왕휘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왕휘, 정확히는 이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데.

순간 손자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미안하구나, 휘야.”

왕휘가 마지막으로 웃어보이곤 고개를 떨구었다.

이준의 몸에서 천살성이 소멸됐다.

영원히 사라진 손자.

천극자의 눈동자에 지독한 슬픔이 맺혔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