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9화
천극자가 신선계를 떠났다.
그가 향한 곳은 지옥계.
염라대왕이 있는 염라전이었다.
구천옥을 벗어난 천극자가 다시 지옥계에 모습을 드러냈다.
천극자의 기운이 느껴지자 염라대왕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무슨 속셈인 거냐.’
지옥계에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천극자였다.
한데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온 게 아닌가.
천극자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도통 모르는 염라대왕이었다.
저 멀리서 느껴지던 기운이 어느새 지척에서 느껴졌다.
“일은 끝냈느냐.”
“잘 해결됐네.”
“네가 신선계를 떠났다는 걸 알면 설극이 마음을 바꿀 수도 있지 않나.”
“그럴 일 없네. 극이는 내가 가장 잘 알아.”
“그럼 이곳엔 무엇 때문에 온 거냐.”
염라대왕이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가장 궁금한 점이었다.
천극자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신선계를 떠나 다시 지옥계로 온 이유를.
“날 인계로 내려 보내주게.”
“뭐!?”
염라대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뭘 그리 놀라는 겐가.”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그가 버럭 소리쳤다.
염라전이 무너질 듯 흔들렸다.
“그냥 내려보내 주라는 게 아니네.”
“절대 불가하다. 네 부탁만 벌써 여러 번 들어줬다. 염치가 있으면 그만 부탁을 해야지!”
염라대왕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천극자 왕소와 파천혈신 설극으로 인해 자신의 위엄이 땅바닥으로 처박힌 지 오래였다.
그런데 또 뻔뻔하게 부탁을 해오는 게 아닌가.
이제는 정말 사생결단을 할 때가 왔다.
“미안허이. 대신 날 인계에 내려보내 주면 자네에게 목을 내놓겠네.”
“미친놈을 보았나. 정녕 날 능멸하는 게냐!”
쾅-
염라대왕이 손으로 책상을 쳤다.
그의 앞에 놓인 책상이 부서진 것도 모자라 가루가 되었다.
뿐인가.
얼마나 화가 났으면 그의 몸에 불이 넘실거렸다.
지옥의 화염인 암화.
아니, 염라대왕이 쓰는 화염은 암화가 아니었다.
겁화.
세상을 멸하는, 가장 강한 불꽃이었다.
천극자가 구천옥의 심처를 벗어날 때도 일으키지 않은 기운.
그가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화를 가라앉히게. 이러다 염라전이 다 타버리겠네.”
“널 죽여 본왕의 위엄을 다시 세우고 말리라!”
염라대왕은 직인인장을 꺼내 천극자를 압박했다.
그가 이토록 분노하는 이유는 단 하나.
조금 전 천극자가 꺼냈던 말 때문이었다.
천극자는 죽지 않은 존재.
지옥의 관문도.
환생 관문도.
천극자의 몸에 생채기도 내지 못했다.
그만큼 강인한 신체를 가졌다.
전대 마왕이 괜히 천극자에게 죽은 게 아니었다.
그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불사의 존재.
타계의 왕들이 모두 합심하지 않으면 천극자를 죽이지 못했다.
그걸 알기에 염라대왕이 분노한 것이다.
지옥계는 죽은 자를 벌하거나 환생시키는 곳.
마지막에는 신선계의 신선도 다시 시간의 굴레에 빠지게 하는 곳이 바로 지옥계였다.
천극자가 한 말은 지옥계에 대한 망언이자 모독이었다.
그때였다.
“내가 직접 소멸하겠네.”
천극자가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
이에 염라대왕의 기운이 한층 누그러졌다.
“그게 가능 하느냐. 전에도 시도해봤지 않느냐.”
천극자는 자신이 인과율을 망쳐서 일어난 결과물로 인해 자책했다.
인과율을 어그러트린 자가 죽어야지만 톱니바퀴가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갔다.
그가 살아있는 이상.
톱니바퀴는 여전히 찌그러진 채 돌아갔다.
그래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으나.
불가능했다.
마왕과 싸웠던 것도 죽으러 간 거였는데…
마왕이 생각보다 약했다.
아니, 너무도 약해 죽을 수 없다고 판단.
결국 선택한 게 바로 구천옥의 심처에서 벌을 받는 것이었다.
“극이가 신선제에 올랐으니 날 속박하던 선계의 율이 사라졌을 터. 이제는 가능하리라 보네. 무엇보다… 난 그 전보다 더 강해졌어. 스스로 소멸시킬 수 있는 힘이 생겼네.”
선계의 율은 신선들이 펼치는 결계이기도 했으나.
신선계에 속한 모든 이들을 속박하는 법이기도 했다.
그들이 스스로 죽지 못하게끔 만든 장치.
신에 속한 자가 스스로 죽는 걸 허용하지 않는 신계였다.
“그리고 정 못 미더우면 자네와 계약하면 되지 않는가.”
“이 또한 먹통이었다.”
“말했다시피 난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네. 나도 이젠 짐을 내려놓고 싶으이.”
천극자의 눈동자는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음….”
염라대왕은 망설여졌다.
천극자가 인계에 내려가는 건 신계의 율을 어기는 거다.
그는 사대왕급의 무력을 가진 자.
아니 모두를 합친다 해도 어쩌면 그가 가장 강했다.
그런 자를 인계에 내려보내는 건 재앙이었다.
어쩌면 그로 인해 또 다른 인과율이 망가질지 모른다.
이런 부분을 감수하고도 그를 내려보내는 게 맞나.
염라대왕은 깊은 고심에 빠졌다.
“보고만 오겠네. 휘가 주경아를 이기는 걸 말이야.”
“천살성이 눈을 뜰 거라는 걸 예상한 거냐.”
“후후.”
천극자는 대답 대신 웃기만 했다.
부정이 아닌 긍정이었다.
“자네도 내가 사라지면 최대의 업적을 남기는 게 아닌가. 잘 생각해보게.”
천극자는 염라대왕의 정곡을 찔렀다.
염라대왕이 고민에 빠진 이유.
천극자를 다시 운명의 수레바퀴에 돌리면 지옥의 왕으로서 최대 업적을 달성할 터.
지옥계의 전대 왕들의 업적을 죄다 갈아치우는 계기가 될 거다.
땅에 떨어졌던 권위와 명예도 순식간에 회복될 거고.
리스크가 큰 만큼 돌아오는 것도 컸다.
“다른 건 하나도 건드리지 말고 오겠네.”
천극자의 눈은 간절해 보였다.
그가 저러는 이유를 아는 염라대왕이었다.
‘제 손주를 보고 싶은 거겠지. 남의 몸을 통해서라도 말이야.’
손주의 죽음이 얼마나 원통했으면 직접 천살성으로 만들 생각을 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를 위해 손주를 희생시키고 있었다.
사실 천극자가 설극에게 왕의 권한을 이용해 손주인 왕휘를 살리게 하는 것도 가능했다.
하나 천극자는 그러지 않았다.
모두 제자를 위해 포기한 것.
그가 신선제에 있을 때 왕의 권한도 설극을 위해 사용했다.
이를 알기에 더는 천극자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약속은 반드시 지켜라. 아니면 본왕이 직접 널 죽이고 말겠다.”
“고마우이.”
천극자는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안타까운지.
염라대왕은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
“썩 꺼져라.”
쿵.
다시 한번 염라전이 흔들렸다.
대전 중앙에 열린 포탈.
인계로 가는 통로였다.
“갔다 오겠네.”
천극자는 지체 없이 포탈로 몸을 날렸다.
그가 사라지자 염라대왕이 크게 소리쳤다.
“이 시간부로 자잘한 일은 모두 너희에게 위임하겠다. 큰 건수가 아니면 보고 하지 말도록. 본왕은 특급 관리 대상을 관찰하겠다.”
“대왕의 명을 받들겠나이다.”
염라전의 관리자들이 일제히 몸을 숙였다.
“대, 대와아앙!”
저 멀리서 염라대왕을 다급히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냐.”
“그, 금색 테두리의 서책에 이름이 적혔습니다.”
그는 사자서각의 관리자였다.
“무어라 적혀 있더냐.”
“신살룡 왕휘. 천극자의 손자라 쓰였습니다.”
“놈의 말대로 흘러갔군.”
“아, 안 놀라십니까?”
“놀랄 게 무어냐. 이미 예상 하고 있었다.”
“그, 그래도 천극자의 손자가 천살성으로 나타났는데….”
사자서각의 관리자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반응이 미지근 하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주위를 보니.
‘이미 한차례 폭풍이 불었구나.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는 이곳에 천극자가 다녀간 지 모르는 상황.
그러니 이런 반응을 한 게 어쩌면 당연했다.
“수고했다. 가서 할 일을 하거라.”
“예 대왕.”
사자서각의 관리자는 찜찜한 상태로 염라전을 빠져나갔다.
‘조금만 더 빨리 올 걸 그랬나.’
그랬으면 지금처럼 찜찜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 관리자였다.
* * *
연아린을 비롯한 신선 모두가 입을 떡 벌렸다.
말도 안 되는 무위.
신선인 그들조차도 잔뜩 긴장하게 하는 무공이었다.
“뭔 무공이….”
“손짓 한 번에 마족이 모두 죽… 었어….”
“내가 헛걸 본 게 아니지?”
전멸.
더 놀라운 건 적만을 골라 섬멸했다.
아군과 적군이 뒤엉켜 있는데도 말이다.
이토록 큰 공격은 아군마저 휩쓸어 죽여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적군만을 죽였다는 건 내공을 완벽히 조절할 수 있다는 듯.
이건 신선인 그들조차도 흉내 내지 못했다.
“미쳤어….”
연아린이 넋을 잃은 사이.
“내가 너에게 가르쳐줄 건 이게 끝이다.”
천살성이 주경아의 목을 틀어쥔 채 걸음을 옮겼다.
“이제 끝을 내주마.”
“난… 여기서 죽을 수 없어!”
주경아의 마기가 폭발했다.
천살성이 무형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허공에 뜬 그녀의 신형.
몸이 점점 검게 변해갔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던 그녀가 점점 다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머리에 뿔이 생기고 등에 검은 날개가 생겼다.
“그래봤자 무의의해.”
천살성이 땅을 박찼다.
사신문의 무공은 그에게도 벅차 무극군림보를 사용했다.
사신형보다는 느리나.
무극군림보 또한 절세의 보법.
어느새 그녀의 지척에 도달했다.
“죽어.”
천살성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던 그때.
마계수에서 나온 검은 아지랑이가 주경아를 감쌌다.
“음….”
천살성이 팔로 얼굴을 보호했다.
마계수로부터 뿜어지는 무시무시한 마기.
너무도 지독해서 주변이 황폐해졌다.
돌, 물, 나무.
가릴 것 없이 바스라졌다.
균열 오염이 짙어진 건 덤이었다.
“아직 힘을 드러내지 않았던 모양이군. 시간이 없는데….”
천살성이 마기에 감싸인 주경아를 주의 깊게 봤다.
마기의 폭풍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리고 보이는 한 사람.
주경아가 완전한 마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전과는 다른 기도를 보이기도 했다.
그녀의 몸에 난 상처는 어느새 치유된 상태였다.
“호호호호.”
그녀가 갑작스레 웃었다.
진동하는 대기.
지독한 마기가 출렁이면서 신선들을 압박했다.
“큭!”
“커헙!”
“윽. 호신강기를….”
연아린을 비롯한 신선들이 내상을 입고 말았다.
기세만으로 입은 충격.
마왕과 신선들의 격차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그 모습에 천살성이 발을 굴렀다.
쿵!
신선들과 야차, 나찰을 겁박하던 마기가 뒤로 물러났다.
천살성의 무극기가 마기와 대치했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겠군.”
마왕 주경아의 기세가 하늘을 찔렀다.
천살성의 예상을 뛰어넘는 마기.
아무래도 저 마계수로 인한 결과 같았다.
“얼마나 강한지 확인이 먼저야.”
그가 멈췄던 발을 다시 움직였다.
감쪽같이 사라졌음에도 주경아는 긴 손톱을 허공에 그었다.
손톱에서 흘러나온 검은 강기가 아무도 없는 곳을 강타했다.
콰앙!
거대한 폭음 소리.
누군가가 강기에 맞았다.
“이 정도의 속도로는 어림없다 이건가?”
먼지를 털어내며 천살성이 중얼거렸다.
주경아의 손톱자국이 그의 팔에 고스란히 남았다.
그의 호신강기를 깨부순 결과였다.
상처가 깊게 남았으나.
천살성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럼 이 정도는?”
그가 다시 사라졌다.
주경아가 고개를 돌리다가 이내 손을 뻗었다.
그녀의 몸에서 뻗어나간 마기 가시가 허공을 찔렀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은 찰나.
허공에 핏방울이 떨어졌다.
“어이가 없군. 혼원신공을 10성까지 끌어올렸는데 다 피하지도 못하다니.”
이준이었다면 극성으로 펼치고도 당했을 터.
하나 지금은 천살성 왕휘였다.
신살룡.
천극자를 가장 많이 닮은 남자.
어렸을 적부터 광오한 칭오까지 붙을 정도로 강했던 그라.
10성의 혼원신공 정도면 주경아의 공격을 피할 줄 알았다.
“이번에는 쉽지 않을 거다.”
그는 혼원신공을 12성으로 운용했다.
10성과 12성은 하늘과 땅 차이.
천살성인 왕휘가 운용하니 전혀 다른 속도를 내었다.
주경아가 그의 신형을 놓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