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8화
이준의 눈동자가 붉게 빛났다.
회안이 아니었다.
혼원신공은 회색.
회색빛이 반짝여야 하는 게 옳았다.
그런데 왜 붉은 빛이 반짝일까.
그의 불길한 눈동자에 주경아가 손을 풀고 뒤로 물러났다.
그녀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천살성!?”
“내 정체를 알았으면 도망쳐야할텐데.”
천살성.
피에 굶주린 악귀.
천살성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하나 다른 뜻도 있다.
하늘도 죽이는 별.
모든 천살성은 전자의 의미 밖에 지니지 못했으나.
이준의 천살성은 전자가 아닌 후자였다.
천살성이 손으로 목을 메만졌다.
“처음 겪는 일이라 엿같군.”
그는 상당히 불쾌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제 몸을 살폈다.
혼원신공을 돌려보기도.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기도.
무릎을 들어보이기도 했다.
마치 새로운 몸에 적응하려는 사람 같았다.
그의 행동을 본 주경아가 고운 아미를 찌푸리며 말했다.
“천살성이… 자아를 가졌다니….”
그녀는 이준 안에 괴물이 산다는 것을 진즉이 깨달았다.
그 정체가 천살성이라는 것도.
마왕인 그녀는 천살성이 깨어나도 무섭지 않았다.
대게 천살성들은 살인에 미친 악마였으니까.
그 미친놈들은 자아가 없었다.
오직 살인을 저지르겠다는 의지만 있을 뿐.
생각하는 자아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한데 이준의 천살성은 자아가 있었다.
그것도 살인에 취한 눈빛이 아닌.
너무도 광오하고 오만한 눈동자를 가진 게 아닌가.
그녀가 놀란 이유였다.
“날 깨워 놓고 놀라면 안되지. 앞으로 기겁할 일이 많을 텐데 말이야.”
천살성의 목소리는 굉장히 여유로웠다.
마치 자기보다 약한 자를 앞에 두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주경아는 기가 찼다.
마왕인 자신을 보고 하는 말.
아무리 천살성이라지만 자신 앞에서 너무 여유를 부리는 게 아닌가.
그녀가 놀란 표정을 숨겼다.
“그래봤자 인간의 몸에 기생하는 벌레면서 오만한 척하는구나.”
“그 말. 취소해야 할 거다.”
쿵.
이준이 사라졌다.
그가 있던 자리가 거미줄처럼 박살나 있었다.
이준이 다시 나타난 곳은 그녀의 코앞.
눈깜짝할 사이에 그녀의 지근거리까지 다가왔다.
그의 주먹이 움직였다.
쾅!
찢어지는 굉음이 일어났다.
이준의 주먹이 주경아가 펼친 호신강기와 부딪혔다.
두 사람이 있는 자리가 폭싹 내려앉았다.
“광오하게 말한 것 치고는 별거 없구나.”
주경아가 이준을 도발했다.
천살성이 입매를 비틀었다.
섬뜩한 미소였다.
주경아의 내공이 흔들렸다.
‘마소?’
마기의 정점에 있는 천마신공이 불안정했다.
이준이, 아니 천살성이 보인 마소 때문이었다.
마소라 할지라도 마왕인 그녀의 내공을 흔드는 건 불가능했다.
하나 천살성의 마소는 그녀에게 한방 먹였다.
그녀의 내공이 불안정해서 그런가.
그토록 견고하던 호신강기가 찌그러지기 시작했다.
이준의 주먹이 호신강기를 파고 들어갔다.
“틈이보이는군.”
그의 손이 점점 전전했다.
자기가 당했던 짓을 돌려주기라도 하려는 듯.
손이 활짝 펴지면서 주경아의 목을 움켜쥐려 했다.
그녀가 손에 마기를 두르며 이준의 팔을 후려쳤다.
쿵.
그녀의 주먹이 이준의 손아귀에 잡혔다.
“고작 마왕이 인간의 몸에 기생하는 벌레에게 쩔쩔매고 있군.”
주경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기가 했던 말을 도리어 돌려 받았다.
“이거 놓치못해?”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남은 손을 휘둘렀다.
새하얀 손.
투명하고 아릅답기까지 했다.
하지만 손에선 지독한 한기가 뿜어졌다.
“소수마공이냐.”
여인들만 익힐 수 있는 수법.
아름다워 잠시 넋을 잃는 것과는 달리 심히 패도적인 무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살성은 감응없는 눈빛으로 소수마공을 맞받아쳤다.
콰아아앙!
천지가 흔들렸다.
강력한 기의 충돌로 인해 신선들이 친 결계가 무너졌다.
“잡다한 걸 쓰는군.”
천살성의 말이 심히 거슬렸는지.
주경아는 입을 다문 채 그를 향해 쇄도했다.
“난 시작도 안했는데 이성을 잃으면 쓰나.”
천살성이 혼원신공을 움직였다.
그에게는 새로우면서도 익숙한 내공이었다.
“사신문의 무공을 보여주마. 딱 한번이니 잘 기억해둬.”
그는 누군가를 향해 중얼거리면서 주경아와 격돌했다.
* * *
이준, 아니 천살성의 눈동자가 붉은색에서 흰색으로 변했다.
몸에선 사색의 기운이 반짝였다.
“사신기.”
그의 몸에서 강력한 뇌기가 뿜어졌다.
청룡의 뇌력을 닮은 듯했다.
몸 전체에 뇌기를 두른 그가 주경아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그녀 또한 지지 않고 맞부딪혔다.
쿵!
굉음은 들리지 않았으나.
두 사람의 주위로 기파가 퍼져나갔다.
“선계의 율이 깨진다!”
“모두 뒤로 물러나!”
신선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엄청난 충격에 미국의 영토가 들썩였다.
선계의 결계도 깨트려버리는 파괴력.
괜히 마왕이 아니었다.
천살성은 어떤가.
그의 얼굴은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 무공 시범을 보이는 듯.
상대가 죽지 않을 만큼의 내공만 사용했다.
이에 주경아가 버럭 소리쳤다.
“감히 나를 얕보는 것이냐!”
천살성을 상대하고 있던 그녀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격분에도 천살성은 무기로 일관했다.
“사신기는 청룡의 힘이 담겨 있다. 네가 익힌 풍살의 완성형이라 할 수 있지. 검기처럼 사용하지 말고 앞으로는 강기처럼 사용해라.”
그 말이 끝나고 천살성이 다시 움직였다.
갑자기 뜨거워지는 대기.
극한의 고열이 주변을 달구었다.
숨을 쉬기도 어려운 상황.
심지어 주경아의 숨결도 조금은 가빠지는 게 보였다.
“이것이 사신투다.”
천살성의 손이 어지럽게 움직였다.
그의 팔이 움직일 때마다 노란 불꽃을 뿜어냈다.
맞받아치는 주경아의 손이 그을렸다.
일반인이었다면 이미 고통에 울부짖었을 터.
마왕이라 그의 주먹을 연달아 받아칠 수 있었다.
“적익의 완성형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파괴력은 극대화되는 무공이다.”
쿵.
쿵쿵!
육중한 소리가 드릴때마다 주경아의 신형이 뒤로 밀려났다.
어느새 50합.
그녀도 버티지 못하고 맞받아치는 걸 포기했다.
그녀의 얼굴에 땀이 맺혔다.
“아직 보여줄 게 세 개나 남았는데 잘 버텨봐.”
천살성은 주경아에게 힘내라고 응원까지 했다.
그녀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치욕스러웠다.
마왕이 되어 그 어떤 자도 발 아래에 놓일 수 있다고 장담했는데.
뜬금없이 튀어나온 천살성이 자신을 욕보이는 게 아닌가.
그녀도 흑마력까지 끌어올려 부딪혀왔다.
그녀의 몸에서 나온 수백 갈래의 검은 아지랑이가 천살성에게 폭사했다.
콰아아앙-
엄청난 폭음이 들렸다.
검은 가시들이 아직까지도 천살성이 있는 자리로 떨어졌다.
가득찬 먼지가 가라앉았다.
그리고 드러난 광경.
천살성이 있는 자리에는 가시로 가득했다.
그 자리에 박힌 듯 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때 천살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신벽. 이 또한 현무벽의 완성형이다. 그 어떤 공격도 막을 수 있는 무공이다.”
그는 무시무시한 공세속에서도 다치지 않았다.
피부가 쓸리지도.
옷자락이 닿지도 않았다.
완벽한 방어였다.
“다음은 사신형.”
천살성은 팔을 앞으로 뻗고 있었다.
그러던 그때였다.
“컥!”
주경아의 신음이 들렸다.
어느새 천살성의 손아귀에 그녀의 목이 잡혀 있는 게 아닌가.
두 명의 이준.
주경아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어, 어떻게… 큭!”
그녀도 보지 못한 움직임이었다.
아직도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에 저 멀리서 팔을 뻗고 있는 이준이 보였다.
“호보이다. 백호의 힘을 완전히 받아들이면 얻을 수 있는 움직임이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저 멀리서 보이던 이준의 모습이 사라졌다.
너무 빨라서 남은 잔상이 보인 것.
천살성의 움직임을 눈이 따라가지 못했다.
“이 네가지만 익히고 있으면 절대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분의 가르침이지.”
그의 목소리에는 무공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했다.
불패의 무공.
신마저 죽일 수 있다하여 신살의 무공이라 불리었다.
“마지막으로.”
천살성이 백안을 번뜩였다.
그 어느때보다 번쩍이는 하얀빛.
주경아의 목을 움켜잡은 손 말고.
반대편 팔을 들어올리며 중얼거렸다.
“사신선.”
허공이 여러 갈래로 갈렸다.
그들이 있는 공간 전부가 하얀 실선으로 그어진 순간!
빛이 시야를 가렸다.
잠시의 공백.
숨을 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정적.
이 공간에 아무도 없는 듯.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저 천살성의 목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사신문의 최종오의 사신선이다. 결을 지배하는 무공이지. 심즉살의 극의에 올라 있기에 마음만 먹으면 움직이지 않고도 상대를 죽일 수 있다. 넌 마안을 가지고 있고 이미 결을 볼 수 있다. 네 경지가 탈신경에 오른다면 사용할 수 있다.”
그의 입에서도 한줄기 선혈이 흘렀다.
그조차도 힘든 무공이 사신선이었다.
천극자가 지옥계에서 보여줬던 신기를 인계에서 사용한 것이다.
“이럴…수가…!”
알제스 루퍼가 눈을 크게 뜬 채 놀라했다.
그가 목도한 광경.
2차 각성을 한 마족과 몬스터가 죄다 죽어 있었다.
그것도 몸이 토막난 상태로 말이다.
무려 1만 군단.
2차 각성을 한 마족을 한꺼번에 죽일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마왕이라면 1만 군단도 상대할 수 있을 테지만 한꺼번에 죽이진 못했다.
그는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 때문에 패닉에 빠졌다.
천살성이 저지른 건 꿈에도 모른 채.
위 아래 턱이 계속 부딪히며 떨어댔다.
* * *
“천살성이 어떻게 저 무공을!?”
무극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도 너무 잘 아는 무공이었다.
자신의 사부의 독문 무공 아닌가.
물론 자신도 사신문의 무공을 배웠다.
하나 완벽히는 익히지 못했다.
그래서 천극자 진천무를 만들어 주었다.
자신에 맞는 무공.
사신문의 무공은 자신에게 맞지 않았으나 진천무는 딱 알맞았다.
“내 말했지 않느냐. 네 제자는 절대 죽지 않는다고.”
천극자 사부의 씁쓸한 목소리는 여전했다.
사부의 아픔이 어디서 나온지 뒤늦게 깨달았다.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네가 아파하는 꼴은 보지 못하겠느니라.”
“그래도 사부님!”
“더는 말하지 말거라. 이 사부가 정한 것이다.”
천극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입을 다물었다.
눈은 감고 있으나 느껴졌다.
그 옛날.
인계에서 보았던 손자의 기운을.
너무도 오래만이라 그립기까지 했다.
더 지켜보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으나.
손자가 저 몸에서 오래 눈을 뜨고 있으면 안 됐다.
그리되면 몸의 주인인 이준이 소멸되고 말테니까.
“사부님….”
“이 모든 일의 발단은 사부의 욕심으로 생긴 일. 마무리도 내가 하는 게 옳은 것이니라.”
천극자는 제자인 설극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고 자신을 탓했다.
무극자도 이를 느꼈다.
사부의 극진한 보살핌.
고금제일인이.
신선제에 오른 자신이.
아직도 늙은 사부의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사부는 너무 오래 살았느니라. 내 할일을 끝맺으면 무로 돌아갈 터이니 그리 알거라.”
“무로 돌아간다니요! 아니될 말씀이십니다.”
“내 뜻을 꺽지 말아다오.”
천극자가 무극자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리곤 뒷짐을 했다.
태산같은 모습이었다.
그 누구도 위에 두지 않은 모습이랄까.
도인같은 모습이면서도 절대자의 풍모를 풍기고 있었다.
“극아. 언제나 행복해야 한다.”
천극자는 마치 마지막 인사를 하는 듯했다.
무극자가 그를 잡아보려 했으나.
천극자의 다음 행동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쿵!
천극자의 진각에 의해 신선경의 호수가 하늘 높이 쏫아올랐다.
호숫물은 인계를 내려다보는 장치.
이 물이 없으면 일시적으로 인계를 관찰하지 못한다.
“잠시 인계는 잊고 있거라.”
“사…”
무극자가 천극자를 불렀으나 그는 어디론가 사라진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