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5화
이준의 기도가 바뀌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칼같은 분위기였다.
“고맙다, 천살성.”
그는 천살성에게 고마워했다.
다시 한번 자신을 믿어줬으니까.
쾅-
이준이 땅을 박찼다.
그가 주경아에게 쇄도했다.
“막게!”
알제스 루퍼가 소리치자 분노군주 페나 비아키가 나섰다.
“어림없다.”
페나 비아키가 옆으로 손을 뻗었다.
마법진에서 뽑아낸 하나의 대검.
그의 머리색과 같은 붉은색이었다.
그 대검을 일자로 휘둘렀다.
지잉-
공중에 생긴 수 개의 거대한 마법진에서 화염이 뿜어졌다.
모든 걸 녹일 정도로 뜨거운 불꽃.
분노군주인 페나 비아키의 흑마력이었다.
이준은 불꽃을 피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현무벽.”
그가 짧게 중얼거렸다.
그의 손에서 흘러나온 한기가 거대한 얼음 방벽을 만들었다.
상성상 불이 얼음을 녹여야 했지만.
현무벽은 사신수의 힘으로 태어난 무공이었다.
마계의 최상위 마족이라도 무극자가 사신수의 힘을 통해 만든 현무벽을 간단히 무너트리지 못했다.
콰아아앙!
거대한 폭음이 들렸다.
페나 비아키가 소환한 불꽃이 죽지 않고 현무벽을 때렸다.
그것도 모자라 그의 대검에서도 화염이 치솟았다.
“죽어라 하찮은 벌레야!”
페나 비아키가 자신있게 대검을 그었다.
공기마저 베어버린 대검이 이준을 갈라버릴 기세로 움직였지만.
강맹한 기세는 어디가고 어느 순간 제자리에 멈추고 말았다.
페나 비아키의 눈이 커졌다.
“무슨…!?”
그의 대검이 이준의 손가락에 잡혀 있었다.
“너희는 내 상대가 아니다.”
퍽-
이준의 발이 페나 비아키의 복부에 박혔다.
그의 발은 무극기로 휘감겨 있는 상태였다.
그 어떤 무기보다 강력했다.
둔중한 소리와 함께 저 멀리 처박힌 페나 비아키.
몇 번 꿈틀거리더니 이내 몸이 축 늘어졌다.
분노군주가 너무도 쉽게 쓰러지자 질투군주 하몬 레탄이 말을 잇지 못했다.
오만군주 알제스 루퍼 또한 마찬가지.
그는 속으로 기겁했다.
‘설극의 무공이다! 그 천고의 무공이 저놈에게서 펼쳐지고 있어.’
알제스 루퍼가 겪은 무공과 이준의 무공은 살짝 달랐다.
아니, 많이 달랐다.
이준이 사용하는 무공이 더 발전된 느낌이랄까.
사용하는 게 아직 미숙해 보이지만 이를 상쇄하는 파괴력을 가졌다.
‘이걸 주경아가 모를 리 없을 텐데?’
알제스 루퍼가 고개를 돌렸다.
옆에 있는 주경아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설극의 그녀의 원수.
원수의 무공이 눈앞에 보이니 눈이 돌아갔다.
“너를 죽이면 그자가 위에서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구나.”
주경아가 땅을 박찼다.
그녀의 손에는 검은 강기가 맺혀 있었다.
천마의 계승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무공.
천마신공이었다.
천마신공은 호흡법이면서 강기공.
혼원신공과 같은 종류의 무공이었다.
그녀의 쌍장이 이준에게 쏘아졌다.
이준은 마안으로 쌍장을 눈여겨 보았다.
‘세 가지 기운이 들어 있다.’
하나는 마기, 다른 하나는 마력.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옥의 기운까지.
하나의 기운만 있어도 엄청난 파괴력을 지녔건만.
무려 세 가지 기운이 녹여 있었다.
‘우선 무극기로 마기를 먹어치운다. 그 다음 혼돈의 기운으로 마력을 분해하고 지옥의 기운은 파괴하면 돼.’
천살성의 힘이 없다면 그녀의 공격을 감당하기 힘들었을 터.
지금은 이길 자신이 있었다.
천살성은 하늘마저 죽이는 힘을 가졌다 하지 않았나.
특히 자신의 천살성은 많이 특별했다.
그와 함께라면 주경아도 죽일 수 있었다.
이준은 천살성과 동화한 덕분인지.
패천사공을 펼칠 수 있었다.
“파천멸진.”
이준의 중얼거림에 주변이 암흑으로 물들었다.
* * *
그 무렵.
구천옥 깊은 심처에 있던 천극자가 감았던 눈을 떴다.
그의 백안이 번쩍였다.
순간 그의 기운이 지옥계를 지배했다.
그것도 잠시.
떴던 눈을 도로 감자 파멸적인 기운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제 여기를 나갈 때인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위의 기운이 일렁였다.
심처에 들고 난 후 평생을 괴롭혔던 지독한 기운이었다.
한기와 화기.
오직 구천옥의 심처에서만 느낄 수 있는 형벌이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곳에 들고서 며칠 지나지 않아 죽었을 터.
천극자라 억겁의 세월 동안 고통을 버티는 게 가능했다.
그가 눈을 감은 채 걸음을 옮겼다.
한기와 화기는 천극자를 집요하게 옭아매려 했다.
하나 그는 너무 가볍게도 두 기운에서 벗어났다.
구천옥 금지 밖.
동굴을 나오니 익숙한 뒷모습이 천극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구천옥에 모습을 드러낸지 얼마나 됐다고 또 그곳에서 나오는 거냐.”
“잠시 마실이나 다녀올까 하네.”
“가능할 거라 보느냐.”
“자네가 나를 막을 겐가. 그래서 염왕의 무기인 직인인장까지 들었나.”
“너를 신선계로 보낼 수 없다. 나와의 약속을 잊은 건 아니겠지?”
“잊지 않았네. 그래서 이곳에서 오랜동안 있었지 않은가. 답답해서 마실을 나갈까 하니 비켜주시게.”
염라대왕이 자신의 무기를 꽉 잡았다.
지옥계의 왕이 긴장을 했다.
‘여전히 괴물이구나. 시간을 끄는 게 다겠어.’
염라대왕은 천극자와의 싸움을 염두하고 있었다.
그가 가려는 곳은 신선계.
신선제에 오른 제자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가 움직이려는 이유는 딱 하나.
신선제인 제자를 위해서였다.
“네가 하는 행동은 인과율을 어기는 것이다. 지옥의 염왕인 내가 가만히 있을 거라고 보느냐.”
“말했지 않나. 다른 건 양보해도 내 제자에 관한 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네.”
“설극이 왕의 권한을 사용하든 말든 녀석의 선택이다.”
“제자의 슬픔을 헤아려주는 것도 사부의 일이네.”
“그랬으면 애초에 인과율을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참다참다 터진 염라대왕이었다.
그의 버럭에 천극자가 씁쓸한 미소를 보였다.
“욕심에는 끝이 없지. 나도 잘 아네.”
“인계에는 지옥의 수문장을 비롯한 나찰과 야차를 보냈다. 그것만으로 부족하면 설극이 나서겠지.”
“극이는 인계에 강림하면 안되네. 그리되면 비극이 반복될 게야.”
“그래서 네 손자가 깨어나게끔 하려는 것이냐.”
“거기까지 알고 있었던가.”
“본왕을 뭘로 보는 것이냐. 지옥을 다스리는 염라대왕이 나다. 명부에 네 손자의 이름이 빈 건 진즉에 알았다. 본왕이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건 네놈도 인지하고 있었지 않느냐.”
“그렇다면 날 보내주게. 내가 어떤 심정으로 이러는지 자네도 잘 알지 않는가.”
염라대왕이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손자를 버리면서까지 제자가 옛 비극을 겪지 않길 바라고 있었다.
천극자의 사정을 봐줄수도 있었으나.
자신은 지옥의 왕.
인과율을 어기는 행동을 하는 이를 가장 최우선으로 칭치하는 게 자신이었다.
“불가.”
염라대왕은 짧게 대답했다.
천극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담 어쩔 수 없지. 오시게. 다른 아이들은 힘빼지 말고 모습을 드러내라고 하시게.”
천극자가 뒷짐을 진 채 섰다.
그의 몸에서 폭발적인 기세가 뿜어졌다.
삽시간에 구천옥 하늘을 뒤덮은 기운.
엄청난 패기였다.
“억.”
“크으윽….”
“컥!”
몸을 숨기고 있던 사자들이 신음을 내뱉으며 쓰러졌다.
고작 기운을 보인 것만으로도 사자들이 내상을 입었다.
쿵.
염라대왕이 직인인장으로 바닥을 찍었다.
“정녕 지옥과 척을 지려는 것이냐.”
“마실을 다녀온다는데 나를 막은 건 자네네.”
“벽창호같으니라고.”
그가 천극자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는 쓰러진 사자들이 보였다.
지옥에 남은 야차와 나찰.
사대천왕까지 끌고 왔다.
고작 한 사람을 막기 위해서 지옥계의 전력을 죄다 끌고 온 것이다.
“하아아.”
“오지 않고 뭐하는 겐가.”
천극자의 말에 염라대왕이 버럭 소리쳤다.
“생각 중이다. 네놈과 생사결단을 내려야할지 아니면 내 고집을 꺾을지 말이다!”
“대왕!”
“그런 말씀마십시오.”
“인과율을 어긴 자는 누구라도 징치해야 하나이다.”
지옥의 사천왕이 화들짝 놀라했다.
염라대왕이 말을 번복하려 하는 게 아닌가.
그 누구에게도 꺾인 적 없던 그가 한발 물러나려 하고 있었다.
“너희들은 저놈이 누군지 아느냐.”
“…모르옵나이다.”
“구천옥에 있으니 죄인 아니옵니까.”
“왕소. 전대 신선제다.”
“저, 전대 신선제!?”
“실종된 자가 어찌 구천옥의 심처에 있는 것이옵나이까.”
“말하자면 길다. 너희가 나선다면 저놈을 이길 수 있느냐? 이긴다면 나도 물러나지 않으마.”
염라대왕의 질문에 사천왕이 말을 하지 못했다.
전대 신선제.
신계 역사상 가장 강한 인물.
마계와 천계의 싸움을 단숨에 종결시키고 사라진 남자였다.
무엇보다 신계에 떠도는 소문이 있었다.
세 왕이 한꺼번에 덤벼야지만 신선제와 동수를 이룰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천계와 마계가 발끈하고 나섰으나.
그렇다고 응징같은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왕들이 수긍하는 눈치였으니까.
그만큼 전대 신선제의 무력은 다른 왕들을 능가했다.
그러니 인과율을 어기고도 신선제가 되고 계속해서 살아가는 걸테다.
“음…”
“그것이…”
“다 같이 싸운다면 이기는 게 가능하지…”
천극자의 정체를 알자 사천왕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를 본 염라대왕이 이마를 잔뜩 찌푸렸다.
“못난 놈들.”
그렇다고 막 나무라지 않았다.
천극자를 마주하면 누구나 보일 법한 행동이었다.
무엇보다 현재 천극자의 눈은 감긴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있는 모두를 압도하는 상황.
이미 승패는 정해졌다.
“하아아.”
“안 싸울 거면 비켜주시게.”
“네놈처럼 본왕도 지키고 싶은 게 있다. 인과율이 최우선이지만 지옥계의 안정이야 말로 본왕의 사명이기도 하지.”
천극자와 끝까지 싸울 수는 있었다.
대신 지옥계가 엉망이 될 것이다.
구천옥의 죄인을 감시하는 인원의 공백.
인계의 망자를 데려와야 하는데 사자가 부족하니.
인과율은 더 엉망이 될 터.
아마 지옥계가 개판이 되지 않을까.
염라대왕은 이를 우려했다.
“말이 기네.”
“더는 네 사정을 봐줄 수 없다. 너 때문에 본왕의 체면이 말이 아니야.”
“배려 고맙네. 이 빚은 꼭 갚으이.”
“배로 갚아야 할 것이다.”
천극자가 먼저 움직였다.
그가 향한 곳은 신선계.
제자의 강림을 막기 위해 움직였다.
천극자가 사라지자 염라대왕이 크게 외쳤다.
“염라전으로 돌아간다.”
그가 직인인장을 들고 몸을 돌렸다.
아직 쓰러지지 않은 인원은 부상당한 자를 들쳐 업고 염라대왕의 뒤를 따랐다.
“대왕. 궁금한 점이 있나이다.”
“뭐냐.”
“천살성이 깨어나면 본래 몸의 영혼은 소멸되지 않나이까?”
“원래라면 그렇지.”
“이준이란 인간은 아니라는 말씀이신지…?”
“전대 신선제가 누구냐.”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괜찮다. 말해보거라.”
“인계와 신계를 통틀어 가장 강한 자이나이다.”
“맞다. 저놈이 모르는 무공과 사술은 없지. 천살성을 뜯어서 제 뜻대로 만든 것도 저놈이니라.”
“그 말씀은!?”
“일반적인 천살성과는 아예 격이 다르다는 말이지. 이준의 몸에 든 천살성은 살육에 미친 악귀가 아니다. 천극자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자아를 가지고 있어. 아마 이준의 천살성은 그놈이 원하는대로 움직여 줄 것이니라.”
염라대왕의 말이 끝났다.
그러다가 품에서 하나의 명부책을 꺼냈다.
거기에는 한 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파천자 이준.]
하지만 이름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러다 명부책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빌어먹을.”
인과율이 바뀐 것이다.
이를 바꾸게 한 범인을 찾아 바로 응징해야 했으나.
자신이 손수 범인을 놓아줬다.
“제멋대로인 사제지간 때문에 제명에 못살겠군.”
사라진 명부책에 새로운 이름이 쓰이기 시작했다.
빨간색으로 적힌 이름.
[신살룡 왕휘.]
천살성이자 천극자의 손자인 왕휘의 이름이 명부책에 새로이 적혔다.